셰프의 사랑가歌, 어머니를 위한 사찰음식

순하되 깊은 맛 표고와 표고냉채

2014-11-04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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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필담大味必淡. 오랜 감동으로 남는 맛은 필경 담백함이다. 젖이 모자란 어머니가 희디흰 쌀을 곱게 갈아 끓여주셨던 묽은 암죽의 맛이 그러했을 터이다. 어느 식사 말미에 무심코 건네어진 숭늉을 만날 때마다 떠오르는 아득한 기억 속의 그 맛. 찬찬히 씹어서 음미하고서야 비로소 열리는 맛의 비경秘境 말이다. 암죽뿐이겠는가. 표고가 또 그렇다. 표고의 순하되 깊은 맛과 향기의 품격을 전달하기에 대미필담 이상의 표현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부처님 오신 날이면 어머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고 했다. 어머니를 따라 절에 올라 산나물 캐고 도란도란 절밥 먹던 추억을 간직한 사람, 인터내셔널 호텔의 한식 총괄 셰프인 박종혁(34세) 씨다. 그가 가을 표고로 더덕과 유자를 곁들인 표고냉채를 만들어 어머니께 드리는 조촐한 상을 차렸다. 그것은 사랑가歌였다. 어머니를 향한, 사찰음식이 품은 사랑가.

| 죽은 나무가 피워낸 꽃, 표고
표고의 주산지로 이름 높은 곳은 전남 장흥이다. 장흥은 남쪽의 온화한 기후와 활엽수가 많은 높은 산, 그리고 그 산 너머 습한 바람을 몰고 오는 바다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일一능이 이二표고 삼三송이. 송이보다 앞서는 맛이 표고에 있다는 것이다. 송이와 능이는 살아있는 나무에서 자라고, 표고는 죽은 나무에서 자란다. 표고의 인공재배가 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맛에서 송이를 앞서는 표고가 그 가격에선 송이보다 못한 것도 그래서다. 
표고를 키워본 사람들은 말한다. “표고는 기다림이다.” 중국의 『왕정농서(王禎農書, 1313)』에 재배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나무를 베어다 도끼로 흠집을 내고 1년 간 썩힌 후 표고를 따다가 흠집 안에 집어넣는다.”라는 요지다. 지금은 표고의 종균을 넣는 것이 달라졌다. 나무가 잘 썩을 때까지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표고는 자라면서 갓이 커지고 점점 벌어지는데, 갓이 덜 피었을 때 수확해 작고 단단한 것은 동고冬菇, 활짝 핀 것은 향신香信, 적당히 핀 것은 향고香菇라 한다. 동고 가운데서도 표면에 그물무늬가 있는 것이 꽃표고, 즉 화고花菇다. 색에 따라 백화고와 흑화고로 나뉜다. 표고는 청혈과 항암, 진정 작용에 그 효능이 크다.
사찰에서 육수 대신 우려 쓰는 채수는 건표고와 무, 다시마를 기본으로 한다. 표고의 감칠맛은 생표고보다 말린 표고에서 더욱 강한데 이는 효소의 숙성작용 덕분이다. 아마도 그래서 어느 절 공양간의 원주스님 또한 표고는 기다림이라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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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덕과 유자를 곁들인 표고냉채의 품격
표고와 더덕, 유자가 한 그릇에 담긴 맛. 밑동을 떼어낸 표고가 소담한 그릇이 되어 더덕과 유자를 담아내고 있는 표고냉채다. 더덕은 아삭함을 더하고 유자는 산뜻함을 보태는 식재료다. 그래서 더덕과 유자를 곁들인 표고냉채를 한 입 먹게 되면 그 첫맛은 산뜻하게 들어가며 더덕의 아삭한 식감을 지난 다음 이윽고 표고의 깊은 풍미에 다다르게 된다. 산뜻함, 아삭함, 담백함을 차례로 통과하는 동안 맛의 풍경은 소박하고 고졸한 정원으로 펼쳐진다.
더덕과 유자를 곁들인 표고냉채는 채 썬 더덕과 오이, 당근 등을 유자소스에 무쳐서 데친 표고 위에 얹어 내는 요리다. 유자청을 주재료로 갈아서 만드는 유자소스는 요즘 시중에도 제품화되어 있다. 유자의 영어 이름은 ‘Citrus medica’로 약귤藥橘이라는 뜻이다. 투박한 껍질과 과육 사이 흰 살이 영양의 보고이며 울퉁불퉁 못생긴 것일수록 맛과 향이 뛰어나다. 아삭함과 독특한 향을 지닌 더덕에는 인삼에 버금가는 함량의 사포닌이 들어 있어 고혈압과 폐 기능 개선에 특효가 있다. 
이 특별한 표고냉채에는 유자소스의 감미甘味와 적당한 소금 간 이외에는 맛을 내기 위한 양념을 아무 것도 넣지 않는다. 맵거나 짠 맛이 들지 않아 순하고, 더덕, 유자, 표고가 제각기 내는 향이 어우러져 깊다. 그래서 찬으로 먹기보다는 전채 요리로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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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혁 셰프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널리 알리는 일에 관심이 많다. 부모님과 함께 용인의 한옥 효종당에서 한옥스테이를 운영 중이며, 집에서 담근 된장으로 관광객과 외국인 투숙객들에게 정성어린 음식을 대접하고 있다. 또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한식에 사찰음식을 접목한 메뉴를 개발해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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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음식에서 한식 세계화의 가능성을 보다
순하되 깊은 풍미는 표고와 표고냉채만의 것은 아니었다. “예술가에겐 예술이 그렇듯 나도 음식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구나, 그 생각이었지요.” 박종혁 셰프의 담담한 말끝에 여운이 길었다. 요리의 매력에 매료된 뒤로 오직 요리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처음엔 양식요리사였다. 미국 유학 중 초밥집에서 멕시코 사람이 초밥을 만들고 있는 걸 보았다. 어색해 보였다. ‘나는 어떤가? 내가 아무리 양식을 잘해도 결국은 흉내 내기 아닐까.’ 그 길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위해 한식요리사가 되었다. 
“봄에 사찰음식 프로모션을 했어요. 사찰음식의 정신을 어떻게 담아낼까, 고민 끝에 재현이 아닌 융합을 택했습니다. 봄나물과 채식과 사찰음식의 미덕을 함께 녹여냈죠. 스프처럼 진하게 끓인 버섯들깨탕, 강된장곰취쌈밥과 연잎밥, 봄나물과 마 단자(쪄서 꿀을 발라 잣가루를 묻힌 요리) 등을 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어렵게 대하면 깊은 맛을 즐길 수 없지요. 사찰음식이 좀 더 친숙하고 편안해졌으면 좋겠어요.”
호텔을 찾은 한 채식주의자가 이 음식들을 맛보게 되었다. 헐리우드의 유명배우였다. 전 세계의 온갖 채식요리를 먹어본 그가 연잎밥을 극찬했다. 더덕을 유자소스에 무쳐낸 요리에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재료의 품성이 살아있으면서 깊은 감동을 남기는 그 담백한 맛으로 인해 채식주의자들에게 사찰음식이란 일종의 로망이다.
“故 스티브 잡스가 채식주의자였던 건 잘 생각해봐야 해요. 첨단산업의 선두에 있었지만 음식에 대해선 지극히 보수적이었다는 거지요. 지켜야할 음식의 기본, 그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죠. 7월에 백악관 수석 셰프가 진관사에서 사찰음식을 배우고 갔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채식주의와 자연주의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셰프들이 사찰음식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런 그가 가장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또 사찰음식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자주 절에 갔다. 절 뒷산에서 햇볕을 등지고 산나물을 캤으며 숱하게 절밥을 먹었다. 그에게 추억 속 맛의 지도는 절집에서 시작해 절집으로 이어진다. 지금도 어머니는 도선사 108산사순례에 빠짐없이 다닐 만큼 신심이 깊다. 
현재 부모님은 용인에서 효종당이라는 이름의 한옥을 짓고 한옥스테이를 운영 중이다. 손수 기른 표고와 텃밭 농작물, 집에서 담근 된장으로 관광객과 외국인 투숙객에게 정성어린 음식을 대접하고 있다. 어머니 손맛 또한 절밥을 닮아 담백하다. 양념을 절제하고 간장에 나물을 무치는 식으로 맛을 내는데 담백한 음식일수록 손님들의 반응이 좋다. 가족 모두가 전통문화와 사찰음식을 대중에 전파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박종혁 셰프의 뒷모습에 문득 문득 수행자의 모습이 겹쳐진다.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전통음식을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심에 사찰음식이 있지요.” 
그가 만든 표고냉채. 손맛과 부처님 인연을 물려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초가을 빛깔로 거기 물들어 있다. 대를 이으며 전통을 현재에 불러내는 맛. 소박한 재료가 제 향기를 머금고 정좌한 그 맛. 한가위에는 가족과 함께 가을 표고의 대미필담을 나눠야할 일이다.

요리 감수 정관 스님(백양사 천진암 주지) 
요리 및 스타일링 박종혁
촬영 협조 효종당(010-9281-8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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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와 더덕을 곁들인 표고냉채

재료
표고 100g, 더덕 150g, 당근 100g, 
오이 120g, 유자소스 100ml, 소금 약간,
유자소스(유자청 300g, 유자즙 또는 레몬주스 150ml, 식용유 80ml와 약간의 소금을 믹서에 넣고 유자청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갈아낸다.)

만드는법
1. 밑동을 제거한 표고는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데쳐서 식힌다.
2. 데친 표고 중 한 개를 곱게 채 썰어 고명으로 준비한다.
3. 더덕과 당근은 껍질을 벗기고 채 썬다. 더덕은 소금물에 담가두어 쓴맛을 빼는 것이 좋다.
4. 오이의 씨를 제거하고 채 썰어 둔다.
5. 채 썬 더덕, 당근, 오이를 유자소스에 무친 다음 뒤집은 표고 위에 가지런히 올린다.
6. 고명을 얹고 그릇에 담아서 상에 낸다.

Tip_
표고는 표면이 매끄럽고 갈색빛을 띠며 안쪽은 하얀 것이 신선하다. 말린 표고 또한 안쪽의 살이 검은 것을 피하고, 너무 크거나 작지 않은 중간 크기의 것으로 고른다. 표고냉채에는 생표고와 말린 표고 불린 것, 어느 쪽을 써도 좋다. 말린 표고를 물에 불릴 때 감칠맛과 영양소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설탕을 조금 넣은 물에 10분 간 담가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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