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解寃이 가능한 세상을 위하여

2014-11-04     불광출판사

잉카제국의 대지에서 인디오는 
빛을 잃고 홀로 슬퍼 보이네.
침묵의 저편에 남겨져 
이제 결코 지배하는 일은 없으리.
잉카의 황제는 태양을 향해 떠나갔다.
그의 마음속으로 한 마리의 콘도르가 날아가네.
날면서 그의 고통을 노래하기 위해
날아라 콘도르여 끝없는 하늘을.
고원의 그림자, 아메리카 정신의 상징 
인디오 민족의 피여. 인디오 민족의 피여. 
잉카 제국은 배신당하고 케나는 슬피 우네.
파차마마는 인디오에게 가르쳤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 잉카문명의 몰락과 잔혹한 스페인 식민지에 저항했던 인디오의 한 서린 전설이 담긴 노래 ‘엘 꼰드르 빠사el condor pasa’ 가사 중에서

| 저마다의 원한 가득한 세상
영화 ‘명량’에서 단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을 무찌른 이순신은 이렇게 말한다. “이 쌓인 원한들을 어찌할꼬.” 이 대사를 듣는 순간, 8월 염천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단순히 일본인들의 한을 말하는 것은 아닐 터, 국적을 막론하고 국가의 이익에 앞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픈 원혼들을 걱정하는 말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원한은 처절하게 이어져 내려오기 마련이고, 그러한 원한이 쌓이고 쌓여 인간의 역사를 소용돌이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악연이 우리에게 준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생각하면 명량대첩에서 죽은 일본군쯤이야 뭐 그리 대수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통쾌하기도 하겠지. 그러나 커다란 흐름에서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나, 죽은 개개인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시키는 대로 전장에 나섰다가 죽은 사람에겐 그들 나름대로 원한이 생길 법도 하다는 말이다. 물론 맺힌 한으로 따지자면 우리나라 백성만 하겠는가.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위안부 할머니를 모욕하는 일본정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릴 지경이다.  
일본에 대해 언급하고 보니,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8월 1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1,500명 넘게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게다가 사망한 사람마저 어른이 아니고 어린이가 대부분이란다. 지난 7월 8일부터 이스라엘은 5분당 한 번꼴로 가자지구에 미사일을 퍼붓고, 천장 없는 감옥이라 불리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지상군까지 투입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은 실로 잔인하고 비겁하기 그지없다. 박노자 선생은 이를 보고 “민간인, 여성, 아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도살을 응시만 하고 아무런 제지도 하지 못하는 우리 세계는, 문명의 가면을 쓴 최악의 야만상태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을 정도다.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1917년 팔레스타인에는 5만 명의 유대인과 64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살고 있었다(1933년에는 17만 명과 75만 명).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1948년에는 팔레스타인 영토의 75%를 유대인이 점령하고 78만 명의 사람들을 영토 밖으로 내몰고 이스라엘을 세웠다. 수천 년을 살아오던 사람들을 내몰고도 그들이 반발하니 폭격이라니. 이스라엘은 전쟁 원인을 하마스의 공격으로 돌리지만, 지금 유대인의 얼굴에는 제국주의 일본군의 모습이 겹쳐있으며, 독일인 나치가 살아있는 듯 보일뿐이다. 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묵은 원한을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인가. 이 세상은 온통 원한으로 가득하다. 

| 나쁜 사람만 원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굵직한 얘기들 속에만 한이 서려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원한은 있을 수 있다. 친구 사이에서도 있을 수 있고, 가족관계에서도 원한은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머리와 가슴 속에 맺힌 한을 솔직하게 다 풀어헤쳐 세상에 내놓는다면, 아마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거란 생각이 든다. 서로 자기 맺힌 것만 얘기할 테니 말이다. 꼭 자기 자신이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지인의 이야기만 풀어내도 그렇다. 서리서리 맺힌 한들이 줄줄이 엮여 나올 터, 한 길 사람 속에 천길 만길 담긴 사연이란 정말이지 진하고도 질퍽하리라. 꼬물꼬물 자기 앞가림만 하며 살기에도 힘든 세상인데, 여기에 깊은 원한까지 있다니. 평생을 저주하며 살아갈 사람들을 생각하면 문득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원한에 대해 생각하니 기억나는 글이 한 편 있다. 리영희 선생이 어머니의 원수 얘기를 하며 쓴 글이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선생의 어머니는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배은망덕한 놈. 자기를 먹여 살린 주인을 총으로 쏴 죽인 나쁜 놈. 일본놈의 총에 맞아 뒈졌는지 만주 벌판에서 굶어 죽었는지. 아바지 원수를 못 갚고 마는구나.” 
구구절절한 사연은 대략 이러하다. 리영희 선생의 외가는 평안남도 압록강변, 벽동군 제일의 천석꾼 갑부였다. 먹지 않고 쓰지 않으면서 부자가 된 그 집에 ‘문학빈’이라는 머슴이 있었다. 뼈 빠지게 고생만 하던 머슴은 어느 날 갑자기 말없이 사라져 독립군이 되었다. 그리곤 어느 해 겨울밤, 자기가 살던 집에 몰래 들어와 총부리를 겨누고는 독립군 군자금을 요구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외조부는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어렵게 모은 돈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이듬해 겨울, 머슴은 또 찾아왔고 외조부는 본의 아니게 독립자금을 연거푸 대주게 되었다. 그 뒤 머슴이 다시 한 번 찾아오자 이번엔 격분해서 “어떻게 번 돈인데”라며 돈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머슴은 외조부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다. 선생의 어머니가 총소리를 듣고 방으로 달려갔을 땐 이미 외조부는 피투성이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러니 어머니의 입장에선 자기 집 머슴이었던 문학빈이 어디까지나 아버지를 죽인 철천지원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달랐다. 어려서는 어머니와 같이 문학빈을 원수라 여겼어도 나라와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외조부의 살인자 문학빈이라는 인물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머슴살이를 박차고 나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그를 생각하며, 어머니가 “벼락 맞아 뒈질 놈”이라고 저주해도 그가 ‘뒈지지 않고’ 살아서 조국의 광복을 누렸기를 빌었다고 썼다. 외조부의 죽음이 비참했기 때문에, 더욱 민족의 운명이 암담했던 때에 독립운동에 몸 바친 애국지사들에 대한 경외를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다면서.   
이분의 원한이야기가 유독 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나쁜 사람만 원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도 얼마든지 원수가 될 수 있고, 누구에게든 깊은 원한을 맺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멍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원한도 그저 상대적일 뿐이라는 그 분명한 진리에 놀라서 말이다. 누구에게나 원한은 생길 수 있고, 그 맺힌 한을 다 풀고 죽은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어떻게 원한을 이해할지는 오롯이 자신에게 달려있다.

| 쌓이는 원한과 복수, 과연 끝낼 수 있을까
원한을 끝낸다는 것,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아마 어려울 것이다. 소소하게 맺힌 분한 감정도 쉽게 풀어내기 어려운 게 우리네 마음인데, 하물며 뿌리 깊은 원한이랴. 당연히 풀기 어렵겠지. 마음 크게 내어 용서가 될 정도라면 굳이 원한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맺힌 한이 있다면 그 원한의 과정을 최대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상대는 왜 그래야만 했는지 상세히 알아봐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피해를 크게 확대해서 보지 않는다. 원인규명이 먼저라며 자식 잃고 단식까지 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만 보더라도 그렇다. 내 자식이 어찌하여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했는지 그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다. 해결 안 되는 억울한 현실이 애통할 뿐이다. 진도 앞 바다, 세월호 희생자의 원혼이 울고 있는 듯 파도소리마저 서러운 건 다 이유가 있다. 
한편 기도와 착한 마음씨가 원결을 풀어주기도 한다. 예전에 어디서 들은 얘기다. 한 여인이 3대독자 집안에 시집을 갔는데, 7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갖지 못했다. 시어머니의 모진 구박에 견디기 힘들었던 며느리는 늘 불보살님께 기도하며 삶을 지탱했다. 그러던 중, 하늘이 도왔는지 아기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금세 마음을 돌려 며느리를 극진히 대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며느리가 곧 유산을 했기 때문이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며느리는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모든 게 자기 때문이라며 가족에게 털어놓는다. 며느리가 유산하기 전날 밤 시아버지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나는 원래 네 가족으로 태어나서 너의 집안을 파멸시키려 했다. 그런데 네 며느리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너에게 맺힌 원한을 이제는 풀고자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며느리의 극진한 기도의 힘이 있었기에 집안의 몰락을 면하고 원한도 풀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평소 정성껏 조심스레 사는 것이 중요하다. 원한 맺을 만한 언행을 삼가고,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원한의 역사가 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는 인내하고 희생함으로써 원한을 끝내야 한다. 반복되는 복수의 칼끝은 늘 자신을 겨누고 있기 마련이다. 부처님 말씀처럼 ‘이 세상에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풀어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만이 풀린다.(『법구경』)’ 그러니 희생이 따르더라도 누군가는 참고 용서해야 한다. 적어도 원한관계에 끝을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원영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아사리(계율과 불교윤리 분야). 운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선원 안거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2008년 「대승계와 남산율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승계의 세계』, 『계율, 꽃과 가시』, 『인생아, 웃어라』 등이 있다. 현재 BBS불교방송 ‘아침풍경’을 진행하고 있으며, 중앙승가대학교 외래교수로서 강의와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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