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라보는 방법 그리고 1%의 희망

2014-11-04     불광출판사

“제발,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우리는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어요. 어차피 한동안은 이 땅에 다 같이 발붙이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니 서로 노력을 해가자고요.” 
(로드니 킹Rodney King의 말, 1992년 5월 1일 흑인 로드니 킹이 LA경관 4명에게 거의 죽을 지경으로 구타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약 1년 뒤 재판에서 경관은 모두 무죄판결이 났고, LA에서는 6일 동안 심각한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때 로드니 킹이 나서서 전한 평화의 메시지이다.)


| 더불어 산다는 것
계절이 바뀌고 있다. 산중 절에서 생활하다 보면 계절이 바뀌는 것을 금세 실감할 수 있는데, 도시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계절을 다른 스님들보다 늦게 체감하는 것 같다. 대신 산중 스님들보다 더 빨리 느끼는 것이 있다. 바로 세상의 아픔이다. 요즘 세상은 단 하루도 쉽게 넘어가는 날이 없는 것 같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울퉁불퉁 터지는 사건 사고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마냥 기다려 달라고, 제발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고 끊임없이 울부짖는다. 괴로움은 한이 되어 허공을 덮고 바다에서 슬피 운다. 
최근 나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스님이 사랑한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인터뷰를 위해 주제에 맞는 책을 찾으려고 피로하게 쌓인 책 더미를 몇 번이나 진지하게 둘러보았다. 그간 나의 독서취향이 얼마나 중구난방이었는지 확연히 느껴지기도 했고, 그 어떤 방향의 독서에도 깊이가 없었다는 점을 실감하는 반성의 계기도 되었다. 한마디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구나 싶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고민 끝에 전공과 관련된 제임스 레이첼즈의 『도덕철학의 기초』라는 책을 골랐다. 
이 책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7년 만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나는 모든 게 낯설었다. 우리사회도 낯설었고 불교계도 낯설었다. 온전히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국경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는 듯 나의 정체성은 모호했다. 사회현상이나 세상살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만한 말이 통하는 상대도 없었고, 무엇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몰라 소통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다양한 책을 읽어야겠다 싶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불교 밖의 외서外書라고 판단되는 일반서적들 중에서만 골라 읽었다. 그러다 만났다. 이 소중한 책을. 
『도덕철학의 기초』는 제목처럼 딱딱한 느낌의 책이 아니다. 여러 가지 예화를 소개해준다. 하나의 사안을 바라보는 데 있어 다양한 각도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즉 우리에게 입체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예를 들어, 병고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식을 죽인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나 무뇌아 아기의 장기이식에 관한 논쟁, 샴쌍둥이의 분리수술을 반대하는 부모 등이 나온다. 어느 것 하나 결론은 내기 어려우나 모두의 입장이 다 이해되는 그런 가슴 아픈 문제들이다. 어쨌든 이런 논쟁들을 읽어가며 내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인생의 큰 틀도 서서히 바뀌는 듯했다. 여러 가지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될 만한 일을 선택할 수 있는가’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길을 찾아가는 이정표가 되어준 책이 바로 『도덕철학의 기초』이다. 

| 종교를 넘어선 보편적 가치가 필요한 세상
물론 도덕책은 세상에 널렸다. 우리에게 친숙한 피터 싱어나 마이클 샌델처럼 유명한 사람의 책은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지금도 읽히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옳음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기 전에 나는 제임스 레이첼즈를 만났다. 마치 첫 정이라도 든 것처럼 그의 어법은 내 안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도덕철학의 마지막 지점에서 나는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생소한 연결이라 느껴질 수 있겠으나, 달라이 라마가 말한 ‘종교를 넘어선 보편적 도덕’에 관한 권유는 인류에게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설명해준다.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교는 과거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양화된 세계화 시대에는 종교가 인간의 모든 고민과 문제들에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이제 종교를 초월한 삶의 방식과 행복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해 있지만, 종교분쟁의 역사가 증명해주듯 피로 얼룩져 있다. 달라이 라마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 종교만을 주장할 시대가 아니다. 내 종교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맞는 말씀이지만, 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참 고민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는 이제 그 어떤 종교와도 모순되지 않는 공통된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는 보편적 가치로서 ‘도덕’을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폭력이나 종교 간 화합의 원리가 모두 여기에서 나왔으니까.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청운동주민센터 앞에 다녀왔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노숙을 하며 대통령께 만나달라고 애원하는 그 현장 말이다. 어이없게 자식을 잃고 서러운 것도 모자라 명절인데도 길바닥에서 보내야 하는 그 심경이 오죽할까 싶어 송편과 과일을 사들고 아는 스님, 수녀님과 같이 갔다. 그분들 옆에 앉아 노란 리본도 함께 만들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러고 있는데 얼마 후, 해맑은 예비 수녀님 두 분이 찾아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유가족 어머님 한 분이 나이 어린 예비 수녀님을 보고 “우리 아무개랑 너무 닮았어요.”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엔 그냥 ‘먼저 간 딸 생각에 어린 수녀님을 보고 떠올리게 되었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인사하고 나오면서 동사무소 옆 담벼락에 붙어있는 아이들 얼굴사진을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온몸이 얼어버렸다. 정말 어린 예비 수녀님과 똑같이 생긴 아이가 담벼락에 붙어 활짝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이런’. 가슴이 철렁했다.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우리들을 보고 어머니는 하염없이 울었다. 절망은 또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산 사람의 얼굴 위에 살아있는 죽은 자식의 얼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금쪽같은 제 새끼를. 
저들에게 과연 희망이란 있는 것일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돌아오는 내내 내 무의식은 절망과 희망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이 영화가 생각났다. 작년 초에 본 ‘라이프 오브 파이’ 라는 영화다. 

| 희망을 향해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이 되리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인도 폰디체리에서 동물원을 하는 집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파이’다. 이 아이는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이슬람교와 기독교, 천주교 등 모두를 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동물원을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기로 한다. 파이의 가족은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게 되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된다. 소년 파이는 가족을 모두 잃고 동물 몇 마리와 함께 살아남게 되는데, 이때 구명보트 안에서 공생할 수 없는 동물들과 함께 지내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몇몇 동물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싸움을 벌이다가 죽는다. 결국 태평양 위 좁은 배 안에서 호랑이 ‘리처드 파크’와 ‘파이’ 둘만 살아남는다. 반년이 넘도록 파이는 호랑이와 함께 외로움과 두려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멕시코 해안에 배가 닿자 숲으로 떠나가는 리처드 파크의 뒷모습을 보면서 형용할 수 없는 그것, 뭐랄까? 친구를 잃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를 잃는 느낌 때문일까? 기운도 없는 소년은 큰 소리로 울어댄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 영화는 마치 99%의 절망과 1%의 희망이 담겨있는 영화 같았다. 특히 그 1%가 보여주는 희망의 영상미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나는 100%의 절망만이 남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희망이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파이가 해안가에 도착해 구조된 것처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꽃피지 않을까 기대하고 싶다. 
『도덕철학의 기초』가 기본적인 삶의 사유방법을 가르쳐주었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에 빠진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떠오른 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처럼, 슬픔과 고통, 외로움과 두려움밖에 남아있지 않은 이들에게 단 1%의 희망조차 허락되지 않는다고 해도, 난 그들이 파도에 떠밀리듯 육지에 도착해서 구조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나는 작은 파도라도 일으키는 한 자락 바람이 되리라. 


원영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아사리(계율과 불교윤리 분야). 운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선원 안거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2008년 「대승계와 남산율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승계의 세계』, 『계율, 꽃과 가시』, 『인생아, 웃어라』 등이 있다. 현재 BBS불교방송 ‘아침풍경’을 진행하고 있으며, 중앙승가대학교 외래교수로서 강의와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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