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닫고 귀를 열어 경청傾聽하라!

원효의 화쟁론에서 배우는 대화의 철학

2014-11-04     불광출판사

2014년 4월 16일 이전의 대한민국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다른 사회다. 아니 다른 사회여야 한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과 함께 우리사회의 전환에 대한 요구와 열망도 커지고 있다. 살아온 길에 대한 성찰과 함께 앞으로 살아갈 길에 대한 물음도 진지하다. 
그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집약된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어떻게’는 무엇을, 언제, 어디서 등등을 묻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질문이다. ‘무엇을’ 혹은 ‘언제’라는 물음은 주어진 가능성 가운데 최선의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어떻게’ 라는 물음은 보이지 않는 길을 모색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세월호 참사 이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다만 세월호 참사 그리고 그 수습과 처리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 진보와 보수, 철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한 사회 혹은 국가의 나아갈 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회적 합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합의는 결과로서의 ‘일치된 의견’이 아니라 합의에 이르는 절차이자 그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해 한 사회에 단 하나의 의견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 투표라든지 다수결이 민주적 제도로서 의미를 갖는 것도 그 과정의 선함이 있는 것이지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결정이 늘 선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투표나 다수결은 한 사회의 ‘최종적 선택’이어야 한다. 투표는 파국을 막기 위한 마지막 제도적 장치이지 모든 것을 투표로만 결정해야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투표 이전에 다양한 방식과 경로를 통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면서 사회적 대타협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바람직한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시민의 총명함과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이 시민의 지혜다. 이견은 곧바로 분열로 이어진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자는 곧 타도의 대상이며 나의 적이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의견의 불일치가 곧 분열로 이어지는 사회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강정마을, 밀양 그리고 대북문제 등 여러 다른 사회적 주요 현안을 두고 국민들은 둘로 쪼개져버린다. 용액에 담그면 파란색 혹은 빨간색으로 변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민생을 얘기하면 보수가 되고 특별법을 얘기하면 진보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북한문제도 마찬가지다. 대북교류를 강조하는 순간 나는 ‘퍼주기’를 찬성하는 사람이 되고 심지어 ‘종북주의자’로 낙인찍힌다. 그런가 하면 북한인권문제를 얘기하면 ‘보수주의자’이자 ‘흡수통일론자’로 되어 버린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단순하게 갈라버리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용어들이 많이 있다. 안보를 얘기하면 보수고 환경을 얘기하면 진보다. 철저한 이분법이다. 민생과 특별법이 둘 다 중요한 문제이며 안보와 환경 둘 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가치로서 양쪽 모두를 살리는 방향에서 타협과 절충은 가능하지 않은 것인가? 양자택일의 선택지만이 주어진 가운데 나만이 옳고 저들은 그르다는 진영 논리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거나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여기에는 진영 논리와 지역성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존재를 한국 사회에서 다 몰아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기대할 것은 곧 시민의 지혜일 수밖에 없다. 

| 모두 ‘옳다’ 혹은 모두 ‘틀렸다’
원효의 화쟁론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시민의 지혜를 만들어 가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화쟁론은 사회학적 혹은 정치학적 이론이 아니다. 화쟁론은 7세기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교학적인 논쟁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일종의 경전해석학이다. 그렇지만 서로 상충되고 모순처럼 보이는 ‘백가의 이쟁(百家之異諍)들을 불설佛說의 관점으로 조화시키고자 하는 원효의 화쟁론은 오늘의 우리 사회의 문제와 결코 무관한 이론이 아니다. 화쟁론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대화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화쟁론을 통해 서로 다른 주장들이 결코 모순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원효가 들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예화에서 잘 드러난다. 코끼리 전모를 다 볼 수 없는 장님들은 각자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코끼리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하며 또 다른 이는 “기둥과 같다”고 한다. 그야말로 ‘백가의 이쟁’이지만 어느 한 사람의 장님도 자신의 주장을 굽힐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자신이 손으로 직접 코끼리를 만진 결과로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원효는 “모두 옳다(개시, 皆是)”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어느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코끼리 아닌 다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효는 또한 “모두 틀렸다(개비, 皆非)”고 한다. 어느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皆)”라고 하는 동시적 상황이다. 나의 옮음이 저들의 틀림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저들이 옳다고 해서 반드시 내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나의 옳음과 저들의 옳음이 다를 뿐이다. 화쟁론이 일종의 대화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두 손을 맞잡으면 화를 낼 수 없다
토론과 논쟁이 주로 나의 옳음과 상대방의 그름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면 대화란 저들의 옮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상대방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큰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사회의 공동선을 만들어 간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원효의 예화를 빌자면 각자 장님들이 자신의 주장을 와글와글 떠들고 있는 형국이다. 내가 옳고 저들은 그르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미래를 향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염원하는 훌륭한 사회를 위해서는 지금 당장 각자의 ‘입’을 닫고 ‘귀’를 열어 ‘경청’하는 일이다. 
화쟁론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중도의 철학에 기반한 것이다. 중도란 왼쪽과 오른쪽을 버린 가운데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왼쪽과 오른쪽이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실상을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오른손과 왼손은 구분된다. 그러나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나의 우뇌와 좌뇌 또한 마찬가지다. 우뇌와 좌뇌는 그 기능면에서 구분된다. 그러나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보수든 진보든, 좌우든 그 생각도 방향도 다르다. 분명히 구분이 된다. 그러나 그 좌우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폴 니터Paul Knitter라는 신학자는 그의 책 『붓다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정경일·이창엽 역, 클리어마인드, 2011)에서 기독교가 불교로부터 배워야 할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선악을 구분하면서 이 둘을 분리시켜 버렸다. 그러나 불교는 선악을 구분하지만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불교의 핵심인 중도中道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폴 니터 교수의 이러한 언급이다.  
우리 사회의 좌우 이념 대립을 해소하는 것은 한 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중도의 실상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 경청은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문득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후보시절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라크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다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통합의 정치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글을 읽어주신 월간 「불광」의 독자분들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화가 나면 좌우의 두 손을 마주잡으라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화가 날 때 두 손을 잡으면 화를 가라앉히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지금 당장 맞잡아 보시라. 마주 잡은 손으로는 화를 잘 낼 수가 없다. 우리는 보통 화가 나면 두 손을 양쪽으로 펼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두 손을 맞잡으면 화를 쉽사리 낼 수 없으며 차분해진다. 합장이나 기도를 할 때 우리가 두 손을 모으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 영문과 및 동국대 대학원을 졸업하고(석사, 인도철학), 미국 UC버클리대학원을 졸업했다(박사, 불교학). 미국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교수, 「불교평론」 주간,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 ‘우리는선우’ 상임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철학연구」 편집장과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는 『불교와 불교학』, 『퇴옹성철의 깨달음과 수행』, 「‘깨달음의 사회화’에 관련한 몇 가지 고찰」,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관한 검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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