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을 견디는 이음새를 짜다

인물열展 - 길 위에서 길을 찾다 | 불교문화지킴이 | 한국고건축박물관 전흥수 대목장

2014-09-01     불광출판사

 


절 마당을 박차고 일어나 길을 떠났다. 세상을 향한 출가出家, 고요한 사중의 길을 뛰쳐나와 그 발로 반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목수의 길을 걸었다. 정진하는 마음으로 천 년의 세월을 이어갈 도량을 짓는 대목장大木匠 전흥수(77. 중요무형문화재 74호) 선생의 이야기다.
나무를 배우고 기술을 닦아 수많은 전법의 도량을 빚어내며 우직하게 외길 인생을 걸어온 전흥수 대목장. 대목장이라는 무게처럼 그의 마디마디 말 속에는 굵직한 기둥이 뿌리깊이 세워져 있었다.



| 깊고 깊은 부처님과의 인연
“절하고는 아주 인연이 깊지. 내 마음 속 뿌리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늘 절에 있어.” 
대목장으로 부처님 모실 자리를 짓는 사람이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깊은 인연을 가져야 하는 걸까. 그와 마주 앉아 그가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듣다보니 그에게 절이 왜 ‘마음 속 뿌리’인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만공 스님의 유발 상좌였고, 어머니 또한 평생을 절에서 살다시피 했다.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으며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목수인 아버지가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9남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자식이 밥이라도 잘 먹고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13살 나이의 그와 그의 동생을 수덕사에 맡겨 스님이 되길 바랐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수덕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했지. 그런데 승려 생활도 팔자에 타고나야 하지 억지로는 못하겠더라고. 나는 집에 가고 싶었어. 성격이 불같아서 한 열 번 넘게 도망 나왔지. 그 때마다 아버지가 붙잡아서 데려 오고, 또 도망가면 스님에게 붙들려 오곤 했어. 동생은 참 고집이 대단했지. 동생은 그 길로 출가를 하더군.”
캄캄한 밤에 수덕사에서 내려다보면 저 멀리 집에서 빛나는 호롱불이 보이고, 소쩍새가 울면 곁에서 함께 우는 것만 같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외로움을 느꼈다. 집에도 가고 싶고 큰스님의 호통도 싫어 막무가내로 절에서 뛰쳐나오기를 여러 번, 그는 4년 만에 결국 행자 생활을 그만두고 말았다. 함께 입산해 그 길로 출가했다던 동생은 바로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이다. 그와 절, 그와 부처님과의 인연은 깊고도 깊었다.
열여섯 나이에 절에서 뛰쳐나왔으니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가난이 싫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하며 서울로 올라가 궂은일 마다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었지만,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 밑에서 한식韓式 건축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기술이 참 좋았어. 뭐든지 한번 보면 만들어 내셨지. 그런데 아버지의 제자는 될 수 없는 게 자식이더라고. 그게 잘 안 돼.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한 자도 안 배웠어.”
한참 혈기왕성한 시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의 말을 잘 듣지는 않았지만 재능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리고 1955년, 당시 수덕사 아래에 대목장으로 터를 닦고 있었던 故김중희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고건축에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자기 밥줄 뺏긴다고 직접 일을 가르쳐주지 않아 어깨너머로 배우고 밤늦게 익히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빠른 학습 능력 덕분에 선배들의 시기와 질투로 방해를 숱하게 받기도 했다. 허나 무엇도 그를 꺾을 수는 없었다. 방해를 받으면 더 꼿꼿하게 맞서 싸우기를 수차례, 그렇게 10년 만인 1965년 전남 순천 한산사 대웅전을 도목수로 보수하게 됐다. 10년만의 독립은 건축계에서 이례적으로도 빠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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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다해 집을 짓는 것, 그게 바로 진짜 목수다
한옥은 같은 도면을 가지고도 도목수都木手의 성격과 손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완성된다. 짓는 사람의 성격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전흥수 대목장의 집은 곧고 굵직하며 꾸밈없이 시원시원한 대장부 같다.
그의 거침없는 기개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숨김없는 성격은 “어떤 일을 맡겨도 정확하게 한다.”는 평가를 낳았다. 좋은 평판들로 일이 끊이지 않았고 창덕궁, 흥인지문, 평창 월정사, 보은 법주사, 예산 수덕사, 남한산성 등 이름난 문화재와 고찰들이 그의 손을 거쳐 고쳐지거나 새로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그의 손에서 빚어져 탄생한 건물만해도 200채가 넘는다. 우직하게 자신의 분야에서 꾸준히 활동을 펼친 결과 1983년 문화재 기능인 제608호에 등록됐고, 2000년에는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이 됐다. 대목장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중 인류무형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사실 나는 대목장 안하려고 했어. 남들은 왜 안하려고 하냐고 그 명예를 왜 안 받느냐고 했었지만, 그냥 주어진 대로 하는 것인데 명예가 다 무어야. 그런 거 싫어서 안한다고 몇 번 거절했었는데 결국 하게 됐지. 되고 나서도 다를 거 없어. ‘내가 잘한다, 나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은 안해. 요즘 일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사람들 자꾸 더 선정해서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도와줘야지.”
대목장이 돼도 별 다를 것이 없다는 그는 집을 짓는 과정 하나하나를 전부 수행처럼 여긴다. 마치 스님이 절에서 정진하듯이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좋아하는 술도 집을 지을 때는 마시지 않는다. 집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기에,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안하면 모두가 불안해지고 그 때문에 집도 불안해져. 마음이 불안한 이유는 그런 이유를 만들 행동을 했기 때문인 거야.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지 않아. 예를 들어 목재를 A급을 쓴다고 하고 B급을 썼다고 해봐. 얼마나 불안할 거야. 좋은 나무를 쓰려면 비싼 견적을 넣으면 되는 거야. 그 사이에 장난질치며 빼먹지 말고.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으니까.”
집을 지을 때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도 마찬가지다. 불안할 행동을 만들지 않으면 불안할 일이 없다는 그에게 인생의 최고 역작이라 생각하는 건물이 무엇인지 물었다. 
“세상에 내놓으면 모두 다 내 자식인데 최고가 어디 있어. 화장실 하나를 지어도 최선을 다해서 지어야 해. 어떤 집을 어렵게 지었느냐를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무엇이 가장 좋다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네. 매 집을 짤 때마다 마음을 다하는 것. 그게 바로 진짜 목수야.”


 

 

| 한국고건축박물관, 한국의 전통 건축물을 재현하다
가난이 싫어 돈을 벌어도 고향으로는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던 다짐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사람은 늙어도 산천초목은 그대로 있다고 하지 않던가. 기억 속 아련하게 자리 잡은 고향이 그리워졌다. 결국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옛 고향집과 주변의 집터들을 매입해 한국고건축박물관을 짓기 시작했다. 
오늘날 사라지고 있는 많은 문화유산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서 반백년 목수 인생의 기록과 함께, 사회 환원의 일념으로 우리나라의 건축 역사와 아름다움을 한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었다. 주변 지인들은 하나같이 말렸다. 그 돈이면 남은 여생 더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돈을 써가며 박물관을 짓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어떤 결정이라도 하고나면 후회해본 적이 없는 그다. 
박물관 건물을 짓고, 수많은 문화재들을 똑같이 축소복원시켜 박물관에 소장했다. 단순히 겉모습만 축소해 놓은 것이 아니라 축소한 자재조각들을 건축기법 그대로 짜맞춰 놓은 것이어서 일반 관람객뿐만 아니라 전통 건축을 배우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도 박물관을 많이 찾는다. 특히 전흥수 대목장이 만들어 놓은 꼬마 숭례문이 화마로 소실된 숭례문의 복구 자료로 활용된 사실은 수많은 매스컴을 통해서도 익히 알려졌다. 
“나는 이 박물관 자식들한테 물려주지 않을 거야. 애당초 지을 때부터 그랬어. 피붙이에게 줘야겠다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어. 어느 학교나 문화시설에 기증하고 가야지.”
전 재산을 쏟아 부은 박물관을 기증하겠다는 것도 모자라, 그는 힘닿는 대로 전수관을 지어 후학양성에 힘쓰고 싶다고 했다. 나무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좋은 집을 짓고 싶은 사람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전수관을 만들어 젊은 후학들이 공부하며 우리의 전통 건축을 보존하는 일에 오랫동안 힘써주길 소망한다.
“대목장은 목수가 하는 일 모든 것을 책임지는 사람이야. 책임을 질 줄 모르면 대목이 아니지. 어떻게 보면 목수라는 길 위에서 나는 성공한 사람인지도 몰라. 어린 시절, 없이 살아서 가난이 무엇인지도 알고, 비록 뛰쳐나오긴 했지만 출가도 해보았고. 다행히 물려받은 재능으로 집 짓는 일을 배워 문화재 복원에 박물관까지 지었으니 이만하면 보람되게 산 거지. 그런데 늘 한 가지 걱정은 있어.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가장 어려운 법인데, 어떻게 하면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고 갈 수 있을까 하는 게 고민이지. 그래도 목표가 있으니까 끝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게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해.”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살아가는 보람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는 전흥수 대목장. 목표를 향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래서 전흥수 대목장의 발걸음 또한 아름다운가 보다.




한국고건축박물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에 자리한 한국고건축박물관은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과 건축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1998년 10월에 개관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 탑, 불상 등 17종의 축소모형 100여 점과 국보급 문화재의 축소모형이 전시돼 있습니다. 국보 1호인 숭례문,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금산사 미륵전 등의 모형을 볼 수 있으며, 건축에 사용되는 연장들도 함께 전시돼있습니다. 야외 전시관에는 팔각정과 강릉의 객사문을 원형 그대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Tel. 041-337-5877
http://www.ktam.or.kr/


꼬마 숭례문 위 잡상
숭례문의 잡상雜像, 즉 어처구니는 9개입니다.
잡상은 홀수로 배치한다고 하는데요, 꼬마 숭례문 위에도 잡상이 쪼르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잡상의 구성원은 『서유기』의 등장인물들인데 목조건축이 가장 무서워하는 ‘화마’를 막기 위한 주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처마 위 앙증맞은 잡상을 발견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것입니다.

수덕사
한국고건축박물관에서 차를 타고 5분 정도를 가면 천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덕숭산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덕사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입니다.
경내에는 대웅전(국보 제49호),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03호), 7층석탑, 황하루 등 수많은 주요문화재가 있으니 가족과 함께 다녀오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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