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살아 온 수행자의 삶

부산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

2014-09-01     불광출판사

 


아스팔트마저 녹일 듯 뜨거웠던 7월, 서울 안국동의 한옥을 찾았다. 이곳은 안국선원의 신도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마련한 수행처. 수행자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서 지난 20년 간 안국선원을 이끌며 간화선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온 수불 스님을 만났다. 수불 스님은 현재 범어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부산지역 불교의 활성화와 간화선 대중화를 위해 발로 뛰고 있는 스님은 시종일관 미소를 입에 머금고 말을 건넸다. 그가 살아온 지난날과 현재의 활동, 그리고 미래의 계획까지. 그의 거침없는 삶은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온 한 수행자의 이야기, 바로 그것이었다. 뜨거운 7월의 태양보다도 더 뜨거웠던 스님의 열정, 그 이야기들을 들어본다.

| 신도들과의 신뢰가 만들어낸 안국선원 신화
: 스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신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어떻게 출가를 하셨고 그 이후로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는 1975년에 범어사로 출가했어요. 은사가 지명 스님이신데, 당시에 내원암에 계셨어요. 이후로 강원 졸업하고 선방에 다니다가 잠깐 나갔는데, 노스님께 붙들려 왔지요. 그리고는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내원암에서 암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능가 노스님을 시봉하며 지냈지요. 그동안에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스님은 범어사 주지이시기 이전에 안국선원을 개원해 간화선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신 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안국선원은 어떻게 열게 되셨나요?
안국선원은 1989년 10월에 부산에 개원한 금정포교당이 전신이에요. 당시 은사스님께서 저에게 안국사를 맡기고 가셔서 안국사도 같이 운영해야 했지요. 그때 서울에서 신도들이 참 많이 왔어요. 그런데 매번 서울에서 신도들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내가 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서울에 자리를 알아보고 선원을 낸 겁니다. 서울에 선원을 개원한 건 1996년이에요. 처음에는 서초동에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2년을 지내다가 내수동으로 이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의 자리로 온 거예요. 그때가 2001년이었습니다. 

: 한 곳을 잘 운영하는 것도 힘든데, 짧은 시간에 서울과 부산 두 곳을 한국의 대표선원으로 일궈내셨습니다.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도들과의 신뢰가 쌓여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사에 대한 화주를 안 받았어요. 오히려 범어사에 들어가서는 화주책으로 화주를 많이 받았죠. 안국선원을 운영하면서는 신도들이 자기들의 공간을 잘 만들 수 있도록 독려하면서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으도록 유도하기만 했습니다.
포교당을 열고 세상에 나와서는 아주 큰 소득을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내 가치관에 따라 신도들을 대했는데 안 통하더군요. 그래서 3개월 동안 포교당 문을 닫고 원인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랬더니 허물은 신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있더군요. 내가 옳다는 말만 주입식으로 하니 신도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예요. 원인을 바로 보고 고치니까 신도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신도들이 수행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점차 내 입장들도 이해해주는 모양새가 만들어졌어요. 그 즈음부터는 우리 절에 다니던 신도분들도 다 잘 됐어요. 그러면서 저 스스로도 발전하게 됐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죠. 


 
 


| 범어사의 총림 지정 후 찾아온 변화들
: 늘 간화선을 우선으로 하시는 것이 스님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보입니다. 다른 사찰들의 경우 간화선을 대중들에게 가르치는 경우는 많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공이나 기도, 제사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다만 법회가 끝난 후에 했습니다. 늘 수행을 중점으로 뒀지요. 처음에는 1대 1로 수행지도를 하기도 했는데 신도들이 많아지니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에 저 분들이 변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에 골몰했습니다. 간화선이 좋다고만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좋은 것은 맛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성공한 셈이지요.
제일 중요한 핵심은 알맹이입니다. 알맹이는 좀 민감한 부분인데, 화두와 공안의 문제입니다. 조사선에서는 공안이 화두고 화두가 공안이라고 봐요. 그게 정형화되어 있죠. 의심해서 깨달음에 들어가도록 했어요. 그런데 저는 공안에서 비롯된 의심이 화두라고 봤습니다. 즉, 공안과 화두를 별개로 보는 것이죠. 이런 입장을 간화선에 대입해보고 『몽산법어』를 풀어봤어요. 그러니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던 부분들이 확연하게 풀리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아직 많이 민감한 문제고 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대상일 겁니다.

: 통일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부모가 두 분 다 북쪽 분들입니다. 피난 중에 통영에서 저를 낳으셨죠. 정작 출생신고는 대전으로 이사 가서 했어요. 그런데 본적은 서울입니다. 그럼 제 정체성은 과연 뭘까요? 저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요? 나 같은 불행한 일을 겪는 사람이 다시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통일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고, 범어사를 맡을 때도 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민 끝에 소임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남북문제를 전담하는 ‘민족공동체추진본부’에서 하는 활동들에 관심이 참 많습니다.

: 범어사 주지 소임을 받으시고 가장 역점을 두신 것은 무엇인가요?
범어사를 수행도량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절은 그래야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총림(강원, 율원, 선원을 모두 갖춘 사찰) 신청을 받을 때 무조건 신청한 겁니다. 총림은 범어사의 30년 숙원사업이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범어사 교무를 볼 때 이미 총림을 만들자고 재결의까지 했음에도 재정이 빈약해 이룰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 따지면 일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총림을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였는데, 막상 총림이 되고 보니 전에 없었던 자부심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부산지역의 불교가 격이 달라졌습니다. 관공서에서 불교계를 대하는 입장도 달라졌지요. 물론 그만큼의 부담도 많이 느낍니다. 잘 해야 하니까요.

| 수행자가 수행자다울 때 재가자도 따라간다
: ‘조계종 불교연합회’ 창립에도 큰 기여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역할을 하신 건가요?
‘조계종 불교연합회’는 범어사 주지로 가기 전에 총무원장 스님과 어른 스님들의 허락을 구해서 만든 겁니다. 범어사는 부산지역에서 중심이 되는 가장 큰 사찰입니다. 그래서 조계종 스님들이 범어사를 도와야 한다는 겁니다. 서로 경쟁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늘 상호 보완할 수 있는 틀이 필요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서로 공조하고 협조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든 거죠.
이런 틀이 만들어지면 부산 불교계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산 시장이 불교계의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구를 부르겠습니까? 부산 불교연합회의 회장을 부르지 않겠습니까? 실제로도 그런 일들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현재 연합회 운영은 잘 되고 있습니다. 부산지역의 불교계가 안정돼 있다고 봐도 됩니다. 모두가 회장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큰 성과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 성과들이 쌓이면서 부산지역의 관공서들과도 신뢰를 많이 쌓았습니다.
제가 범어사 주지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세계기독교대회’입니다. 이 행사가 부산에서 열릴 예정이었는데, 개최 이후에 그 영향력이 만만치 않으리라고 봤습니다. 그럼에도 불교계는 이 행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불교계가 이 문제에 오픈마인드로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환영한다, 잘 왔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부산과 시민들이 주인이 되어 기독교계를 포용해서 대회가 진행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한반도평화대회’를 열었지요. 정전 60주년을 맞아 부산불교계가 힘을 모아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인데, 이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난 후 불교계 내부의 산발돼 있던 입장들이 잘 조화를 이루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회를 둘러싸고 오해도 참 많이 받았죠. 항간에는 이 대회를 이용해서 총무원장 선거에 나가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애시 당초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저는 두 마리 토끼는 못 잡습니다. 오해를 받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인과에 따라 잘못이 있다면 그에 응당한 결과를 받을 것이고, 잘못이 없다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바람직한 재가자의 상은 무엇일까요? 안국선원 신도들은 모범적인 신행생활로 유명한데, 다른 사찰과 어떤 부분이 다른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조계종의 정체성은 법회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소의경전인 금강경에 입각해서 법문하는 형식이죠. 그 속에서 삼귀의를 다짐하고 계도 받습니다. 참회의식을 하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을 성숙시켜 사홍서원으로 회향하는 틀이 바로 법회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정체성이 올바르게 지켜지고 있는지, 그렇다면 조계종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나는 불자로서 불자답게 살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수행자들이 수행자답게 살아야지요. 출가나 재가나 공히 한 방향으로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불교의 올바른 가치관에 눈 뜰 수 있도록 부처님이 말씀하신 깊은 핵심과 그 의의를 잘 봐야 할 것입니다. 앞서 가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잘 펼쳐주고 뒤에 오는 사람들이 잘 따라가는 그런 세상이 돼야 한다고 봅니다.

: 세월호 사건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사건의 여파는 꽤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슬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이 왜 일어나게 된 것인지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재발하더라도 빨리 추스를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슬픔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슬픔을 잘 승화해서 또 다른 차원으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딛고 건강한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정신적으로 성숙해져야 할지, 어떻게 서로를 다독이면서 슬픔에서 벗어나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불교계에서도 무엇을 할지,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지 주의 깊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한국불교를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종교적 차원이든 문화적 차원이든 수행과 불교를 한국 발전의 원동력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올바른 역사관을 바탕에 두고 불교가 가진 수행의 힘을 세계인들에게 나눠주어야지요. 동국대학교에서 열렸던 ‘국제 간화선 학술대회’ 같은 것이 이런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이런 일에는 부딪혀서 결과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수불 스님
1975년 범어사에서 지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7년 범어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78년 범어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부터 10여 년 간 제방 선원에서 수행했다. 1989년 부산에 안국선원을 개원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에도 안국선원을 만들어 간화선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현재 조계종 제14교구본사 범어사 주지이며 안국선원 이사장, 부산불교연합회 회장, 동국대 국제선센터 센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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