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자비의 마음으로 전하는 위로와 용기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이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

2014-09-01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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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던 날 밤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한 할아버지가 바티칸 성당의 발코니에 서서 다음과 같은 첫 인사를 세상을 향해 건넸다. “보나세라Bounasera!” 우리말로 옮기면 “좋은 밤입니다!” 또는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은 일상의 평범한 이탈리아 인사말에 불과하지만, 그 속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 나눔과 소통이라는 소중한 가치
요즘은 가족끼리 한 식탁에 모여 앉아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드문 현상이 됐다. 자녀들은 학교나 학원에서 경쟁하듯 바삐 식사를 하고, 아빠는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자연스레 말벗이 없게 된 엄마는 텔레비전 앞에서 홀로 식사를 한다. 혼자서 음식을 먹으며 육체적 허기를 채우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정신적 허기를 채우는 것이다. 이런 우리들을 향하여 한국을 찾는 교황이 인사를 건넨다. “사랑하는 한국 국민 여러분! 좋은 밤입니다. 그런데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십니까?”라고. 
실제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식사를 제때 그리고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안의 삼독三毒에 빠져 가족과 이웃 간의 나눔과 소통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망각해버린 것이다. 교황의 꾸짖음처럼 “투자한 돈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마치 큰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걱정하지만, 수백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데도 그것은 아무 일도 아닌 듯” 살아간다. 삶의 가치를 망각한 채 욕망의 바다를 무작정 항해하던 우리 사회는 어느 날 ‘세월호 침몰’이라는 참담한 사건에 마주선다. 
‘배’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대변되는 불교의 배는 중생으로 하여금 미혹의 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세계로, 차안으로부터 피안으로, 윤회로부터 열반으로, 예토로부터 정토로, 현상의 세계로부터 실재의 세계로, 유정의 경계로부터 붓다의 경계로 건너가도록 도와준다. 『금강경』은 이 배를 뗏목에 비유하여 설한다. 가톨릭에서 배는 노아의 방주가 대표적인데, 이 배는 신약으로 넘어와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를 상징하게 된다. 죄와 유혹이 넘실거리며 파도치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 하느님 나라, 즉 인간의 본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배를 타야만 안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배’가 이웃 종교와의 화합과 사랑을 실천하기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경고처럼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리하여 자기를 비우고 내어놓기는커녕 성장신화에 급급한 나머지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자기만을 채우려 하다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침몰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교황은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가 되자고 거듭 촉구한 것일 게다. 왜냐하면, “종교가 폐쇄적이면 부패하게 되고, 누군가 그 문을 열었을 때 악취가 풍길 것”은 자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상징으로서 ‘배’는 각 종교의 가르침과 공동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배는 또한 우리 자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8세기 인도의 학승인 샨티데바가 『입보리행론Bodhicaryāvatāra』에서 노래한 바처럼 우리 각자는 보리심을 일으켜 절망과 비참의 강을 건너고자 하는 이웃에게 ‘배’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각자는 이웃이 탈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비우기보다는 더 많이 채우려고만 하고, 나누기보다는 더 높이 쌓아두려고만 하는 우리네 삶은 세월호 대참사를 통해 보듯이 언젠가는 침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위기이다. 이런 즈음에 한국을 찾는 교황이 우리 사회 전반을 향하여 화두를 던진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손을 가난한 이웃들을 보듬을 수 있게끔 내어줌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가족, 이웃과 더불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십니까?”

| 가난과 겸손한 삶의 울림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에 동참해줄 것을 전 세계에 호소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호’를 향해서도 이 사건을 계기로 윤리적·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촉구했다. 교황의 기도와 호소가 진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교황이 들려주는 그 자신의 삶의 이야기가 맑고 향기롭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은 언어를 초월한 삶 그 자체이다. 교황이 남긴 몇몇 어록 때문에, 그리고 현대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때문에 세계가 감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겸손하고 가난한 삶이 세상에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교황은 가난과 겸손, 그리고 사랑의 길을 걷고자 늘 깨어 기도한다. 예수에 이어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을 교황은 아르헨티나 시절부터 살아온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01년 추기경에 선출된 직후에도 로마행 비행기를 타는 대신 국가부도 위기에 몰린 아르헨티나 빈민을 위하여 비행기 값을 자선단체에 기부했고, 고급 관저에서 머물기보다는 허름한 아파트에 살면서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자주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했으며, 요양시설을 찾아가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과 노숙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축복해주었다. 그래서 교황은 성직자들을 향해 고급 승용차를 탈 때마다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해달라고 당부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당부에는 ‘권위’가 녹아들어 있다. 이 권위는 가난과 겸손한 삶을 통하여 자연스레 생기는 미덕이다. 반면, ‘권위주의’는 강제와 폭력을 동반한 악덕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을 방문한 이슬람 국가의 왕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을 때, 몇몇 권위주의적 가톨릭 신자들은 못마땅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황의 권위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의 권위 있는 행동은 깊은 울림으로 많은 이들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 한 마음으로 소망하는 맑고 향기로운 평화
과거와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은 ‘이냐시오 영성’을 이해할 때 더욱 더 가깝게 다가온다. 교황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예수회원으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한 이냐시오 성인(1491~1556)의 영성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냐시오 영성은 불교의 요중선搖中禪에 비견될 수 있는 ‘활동 중의 관상’에 그 참모습이 담겨 있는데, 이것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젊은 시절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의 관구장으로서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과 실패라는 삶의 진창에서 쓰러지지 않고, 그 진창에서 한 송이 연꽃으로 다시 피어난다. 자신의 실수 안에서 자비로운 하느님을 발견하고, 지혜로운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의 실수를 봄으로써 오늘의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혜의 눈과 자비의 마음을 지닌 채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그는 삶의 진창에서 핀 연꽃처럼 맑고 미묘한 향기를 풍기며 세상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 그리고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가톨릭만의 교황이 아니라 모든 이의 위로자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 것일 게다. 
이런 교황이 한국을 찾아온다. 섬김받기보다는 섬기기를 좋아하고, 찾아오기보다는 찾아가기를 좋아하는 교황의 방문에 즈음하여 지난 6월 한자리에 모인 한국의 7대 종단 지도자들은 환영의 메시지를 발표하며 이번 방문을 계기로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이 평화는 삶의 진창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자 하는 한국의 종교들이 한마음으로 소망하는 맑고 향기로운 평화일 것이다. 이 향기로운 평화가 한반도 곳곳에 퍼져 많은 이들이 오늘 이 시간 이 세상에서 울고 있는 이웃과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눌 때, 다시 말해 자기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과 소통할 때, 그 밤이야말로 진정 ‘좋은 밤(보나세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즈음 또 한분의 종교 지도자가 떠오른다. 한국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면서도 초대받지 못하는 달라이 라마!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앞두고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평화의 바람’에 달라이 라마가 몰고 올 ‘자비의 바람’까지 어우러진다면, 오랫동안 ‘사랑의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반도에 평화와 자비, 그리고 나눔과 소통의 단비가 내리는 ‘참 좋은 날’이 되지 않을까!


이영석
예수회 신부. 미국 버클리 예수회 신학대학을 졸업 후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인도불교를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현리 인성교육원 개원을 앞두고 마지막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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