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욕망’이란?

욕망은 ‘자유’의 또 다른 이름

2014-08-12     불광출판사

욕망은 ‘근대적 인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고대 종교에서 바라본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헤브라이즘적 수사이다.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의 욕망과 그 결과는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문제의식이 되었다. 한편, 보리수 아래서 수행자 고타마가 넘어야했던 마지막 관문 또한 욕망의 문제였다. 마라Mara의 유혹으로 상징되는 욕망을 제압(?)하고서야 사문 싯다르타는 비로소 ‘깨달은 자’가 될 수 있었다. (중략)
‘욕망을 넘어선’ 지점에서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강조하느냐, ‘욕망에 넘어간’ 실낙원의 현실에서 인간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느냐의 차이만큼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와 역사는 크게 다르고, 그 욕망을 ‘악evil’의 문제로 실체화 하느냐, 아니면 인간의 ‘심리적 경향’의 문제로 보느냐의 차이는 간과할 수 없이 큰 것은 분명하지만 욕망을 인간의 근원적 문제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종교가 공유하고 있는 기반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 졸고, “다시 챙겨야할 ‘욕망’이라는 화두”, 
  권두언 『불교평론』(2005, 가을) 중에서

| 명상은 욕망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행
21세기를 살아가는 불교인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번쯤은 가져보았을 것이다. “불교는 욕망의 완전한 소멸을 통해 열반에 이른다고 한다. 욕망이 없는 삶이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또 우리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생물학적 욕망 또한 소멸해야하는 욕망인가, 그리고 모든 욕망은 부정적인가?” 등등의 매우 상식적인 질문을 이어가기도 한다.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질문에 관련된 불교교리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질문이 던지고 있는 ‘인간학’적 의미를 조망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불교전통에 따르면 이 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구분의 기준은 ‘욕망’의 유무와 그 정도에 따른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하위에 속하는 욕계欲界, kāma dhātu가 바로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영역이다. 이 영역을 욕계라고 부르는 것은 욕계의 존재들(인간, 동물 등)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위의 추동력이 되는 것이 바로 욕망이기 때문이다. 불교전통이 인간 존재를 욕계에 위치시키고 있다는 것은 곧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homo desideratum)’로 파악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불교 전통은 욕망을 인간이 처한 가장 문제적 상황의 근원으로 본다. 인간의 실존적 고苦와 윤회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악행惡行의 원인 또한 욕망이 직간접으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수행이란 곧 욕망을 닦아 없애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을 불교에서는 그 작동의 양태에 따라 갈애, 번뇌, 수면 등 매우 다양한 명칭들로 발전시켜 왔을 만큼 욕망은 불교 교리와 수행의 핵심적 주제라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수행이란 곧 욕망의 통제와 제거를 의미하였다. 수행의 정점인 열반이란 곧 모든 ‘욕망의 불’이 꺼진 상태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명상은 욕망을 제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선정禪定은 모든 거친 욕망을 잠재울 수 있었으며 선정에서의 지혜(혹은 통찰)는 잠복상태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욕망에 대한 ‘자유’인가
대승불교는 욕망의 문제를 달리 이해하기 시작한다. 욕망은 단순히 제거해야할 어떤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는 욕망을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조건에 대한 자기반응 즉 연기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 무실체성을 깨달아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 된다. 그런 가운데 욕망의 무실체성을 더욱 더 확장하여 욕망을 삶과 수행을 위한 근원적이며 긍정적인 에너지로 생각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한 대승 경전에서는 “보살은 애욕愛慾의 가운데서 태어난다”고 선언한다. 이후 출가의 금욕 전통에 익숙하지 않은 동아시아 불교에서 욕망의 문제는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욕망의 무실체성은 때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desir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자유(freedom of desire)’를 의미하게 되어 ‘파계와 깨달음’ 그리고 ‘마음의 자유와 행위의 자유’ 등의 문제에 대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깊이 고민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관점에서 욕망의 문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근대 시기 욕망을 금기시하고 마음의 정화淨化, purification of mind를 위해 욕망은 절제되고 통제되어야한다는 것은 동서양 주류 종교전통의 일반적 입장이었다. 어떤 종류의 욕망은 ‘죄악시’ 되기도 하였다. 초기 인도불교의 출가전통은 ‘절제’의 수준을 넘어 완전한 ‘절멸’만이 완전한 깨달음 혹은 열반이라고 하는 지복至福, bliss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종교의 세속화와 함께 ‘개인’의 등장은 욕망에 관한 종래의 관점을 전복시켜버렸다. 욕망은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고 개인적 성취를 위한 에너지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 욕망은 계층, 성별, 인종 모든 구분과 차이를 넘어서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한 특징 혹은 특권이 된 것이다. 이제 욕망은 ‘억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성취’해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 여기에는 한편으로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개인 고유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 창조적 에너지이기도 하였다.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욕망은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된 것이다. 
오늘날 근대문명이 가져다 준 ‘욕망하는 인간(homo desideratum)’의 모습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만큼 불교는 여기에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더구나 근대 이후 심리학의 발달은 ‘욕망’이란 이름으로 얘기되는 인간의 다양한 심리 상태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과연 인간의 몸과 마음이 ‘원하는 모든 내용과 방식’을 ‘욕망’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런 점에서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구분하고 있는 욕망의 세 층위는 불교에서의 욕망의 문제를 새롭게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준다. 라캉은 욕망을 그 층위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necessity필요 
생물학적으로 개체의 영속과 보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욕망. (예: 식욕, 수면욕 등)
demand요구
생물학적 요구 외에 타인으로부터의 관심이나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desire욕망
무의식에 있는 삶의 충동, 의지로서의 욕망. (예 : id, libido)
위의 세 가지 욕망의 층위 가운데서 불교에서 없애야 한다거나 문제시한 욕망은 어떤 욕망일까? 우선 ‘필요’, ‘요구’ 등 앞의 두 가지와 마지막의 ‘desire욕망’의 근원적인 차이는 대상으로부터 채울 수 있는 욕망이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앞의 두 가지 욕망은 일종의 ‘결핍’ 상태로서 대상에 의해 채워질 수 있는 욕망임에 비해 마지막의 ‘desire욕망’는 대상에 의해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욕망’을 의미한다. 바로 이 근원적인 욕망이 불교전통에서 문제 삼고자 했던, 윤회와 고苦의 원인이 되는 바로 그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앞의 두 가지 욕망을 불교에서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필요necessity’에 속하는 식욕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과연 얼마만큼 먹는 것이 ‘필요necessity’한 만큼의 ‘욕망’일까? 수면욕 또한 마찬가지이다. 얼마만큼 자는 것이 필요한 수면일까? 그리고 ‘필요’ 이상의 과도한 혹은 불필요한 수면과 식욕은 그럼 어디에 속한 욕망일까?
연장선상에서 한 가지 더 고찰해봐야 할 것은 성욕의 문제이다. 이 성욕의 문제는 어찌 보면 가장 ‘근대적 문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람들은 욕망 특히 성욕을 건강한 욕망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더해 여러 생물학적인 이유로써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성욕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문화/문명에 따른 관점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선 전근대 서양의 기독교 전통만 보더라도 성욕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 입장이었다. 불교는, 특히 인도 수행전통에서는 이를 전적으로 없애야 될 어떤 것들로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성욕을 인간의 완전한 자유(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해탈’)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발적 금욕’의 전통을 전근대적인, 인간성에 대한 ‘억압’의 기제로만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편견’일 수 있다. 우리는 ‘성욕’과 ‘자유’의 문제를 상충하는 인간의 문제로 여겼던 금욕의 전통에 한번쯤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로선 ‘성욕’과 ‘완전한 자유의 가능성’(혹은 초월성)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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