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입술에 걸리고

2014-08-12     불광출판사

사위는 고요하다. 포터들의 모닥불도 꺼졌다. 멀리 걍진 곰빠의 불빛들도 그들만의 시간을 거두었다. 어둠의 층이 두꺼워진 계곡과 밤에도 스스로의 조명을 완전히 소등하지 않는 설산의 자태가 여전히 신비롭다.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의 긴장감이 적당히 해제된 순한 시간, 어느 정도 익숙해진 히말라야의 시간과 공간은 이제 편안하게 나를 포옹하고 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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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와 거기가 서로 다르지 않거늘
예리함은 사라졌다. 차 한 잔을 들고 이 풍경에 동참한다. 느릿하게 배회하다 느긋하게 앉는다. 정좌正坐는 어울리지 않는다. 비스듬한 편좌徧坐가 결 고운 이 시간에 제격이다. 잠시 투명한 어둠, 멀리 강첸포 봉우리 위로 달이 떠오른다.
“아!!!” 어둠이 흔들리고 산이 출렁거린다. 그림자들 다시 서고 낯선 빛들이 풍광을 홀린다. 달빛의 기습이었다. 달은 예상했지만 이런 달빛, 그 아래 풍경은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달빛풍경을 뇌리에 담고 있는 기억들이 낯설어했다. 
한 동안 산이 되어 있었다. 말과 침묵도 사라진 의식의 무화상태. 이 풍경을 묘사할 모든 언어는 의식의 세계로 부상하기를 부끄러워했다. 달이 오를수록 언어는 더 깊이 침잠했고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한마디 비명소리라도 내뱉어야 하는데 이 절대풍경에 금이 갈까봐 도무지 나오지를 않았다. 깊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득 싯귀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외로운 달 홀로 비쳐 강산이 고요하니 
孤輪獨照江山靜
스스로 웃는 소리에 천지가 놀란다 
自笑一聲天地驚
목이 말랐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젖은 입술을 다시니 김삿갓의 시귀가 연달아 부상했다.
아침에 입석대를 오르니 
구름이 발아래서 일어나고 
朝登立石雲生足
저녁에 황천의 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리더라 
暮飮黃泉月掛脣
절대풍경은 흔들렸고 틈이 난 풍경 밖으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음은 달빛 기습에 점차 대응세를 갖추고 몸의 지원을 바랬다. 미미한 한숨과 함께 미소가 뒤따랐다. 그 정도의 지원이 전부였다. 달빛은 그대로였고 나는 풍경밖에 서 있었다. 이미 내 기억 속에 한 풍경이 더해져 있었다. 
그 풍경은 경이와 황홀한 함몰이 밑그림으로 자리했다. 그것은 순수체험이었고 히말라야를 떠돌 명분을 제공했다. 나는 당분간 히말라야의 길 위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경이로움에 놀라지 않는 마음상태를 다지고 점검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보지 못하면 거기서도 보지 못한다’는 평소 지론대로 내가 떠나온 곳과 이곳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해서 달마산 달빛에 취해 저절로 나왔던 숨찬 춤사위와 점점 볼품을 잃어가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은 슬픔이, 히말라야를 떠도는 내내 비등하게 상영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다른 무대 다른 배우지만 그 영상은 어디서나 촬영이 가능한 삶의 일반현상이라고 여기며 달빛에 새겨 배낭 깊숙이 넣었다.


| 달과 별이 이끄는 은빛설산의 시간
달 오름이 높아지면서 설산의 빛과 그늘도 많이 바뀌었다. 그늘은 점점 작아지고 산은 더욱 커간다. 한 번도 푸르러 본적이 없는 산, 그늘도 하얗다. 하얀 그늘, 다들 잠이 들고, 서성거리며 나의 시간을 좀 더 이 공간에 맡기기로 했다. 상대풍경을 즐기며 이런저런 생각과 더 놀고 싶어졌다.
이제 달과 별들이 은빛설산의 시간을 이끌고 간다. 분절된 사람의 시간은 이 공간에서는 무의미하다. 이 풍경 속에 대립은 없다. 그저 황홀한 적막, 내려놓을 것도 받아들일 것도 줄 것도 없다. 가끔 교묘한 의식의 다른 작용으로 허황된 생각들이 작동된다. 마치 경전에 언급된 세계상이 여기 펼쳐질 것만 같다. 묘고妙高, 미묘한 높이라는 뜻을 지닌 수미산 중심의 세계관이 이 높이에서는 가늠될 듯, 발아된 의식이 가없이 커진다. 의식의 확산은 우주를 작게 다룬다. 대각大覺들은 한 티끌 속에서 우주를 보았다.
사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감각기능도 어떤 변화를 겪는다. 이미 익숙해진 높이에 적응된 몸은 처음 접해보는 고도에 격렬하게 반응한다. 이른바 고산병이 그 증세다. 높이에의 강요,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몸은 이 환경에 적응되도록 강요받는다. 순응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른다. 잘 적응하면 어떤 기능은 정상화되기도 한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떠나기 전 오른손가락에 마비증세가 와서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했다. 밥도 왼손으로 먹어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떠났다. 걸으면서 어느새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나름대로 처방은 하고 다녔지만 라운딩을 마칠 즈음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감각기능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로 연결된다. 산소의 결핍과 기압의 느슨함으로 인한 신체의 변태는 의식의 해방을 일정부분 담보한다. 
길은 점수漸修의 표본이다. 한 걸음이 시작과 끝이다. 보폭이 이어지는 공간이 길이다. 여기서 도약은 무의미하다. 길은 도약을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의식은 도약을 꿈꾼다. 한 걸음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돈오頓悟가 통한다. 몸은 변한 고도만큼만 바뀐다. 의식의 고도는 다르다. 어느 순간 바라보는 히말라야가 아닌 내려다보는 히말라야로 고도가 높아져 있다. 이것은 경험의 문제가 아니다.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감각적 안목에 의한 실제적 현실의식이 아니라 종횡을 알 수 없는 자유의식의 지평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의 유희는 통제당할 필요가 없다. 지나가기 때문이다. 
바라다보면, 히말라야의 하늘은 별자리가 불분명하다. 한참을 바라봐야 별자리들이 보인다. 대기의 두께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들이 매우 촘촘하고 빛은 선명하다. 사라지는 별들도 자주 목격된다. 행성의 죽음은 순간이고 환하다. 저 거대한 행성이 소멸되는 모습은 나의 소멸과 연결된다. 별처럼 완전히 소진되어 별들의 고향인 허공이 되는 것, 그래서 한 개의 별이 아닌 뭇별의 빛길이 되어 어떤 윤회의 궤도도 다 받아들이는 것, 유성을 보며 느낌이 낮아지고 물살이 되어 바다가 되기도 한다. 측량된 고도에서 측량할 수 없는 생각들이 아직은 잠잘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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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온 곳, 다시 돌아갈 그 곳
물을 다시 한 모금, 달은 여전히 입술에 걸리어 있다. 사람소리가 들린다. 코 고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 깨고 나면 단잠인데 꿈속에서는 어떤 풍경과 조우하고 있을까? 측량할 수 없는 고도의 시야가 되어 내려다보면 히말라야는 무엇일까 상상은 집요하다. 그리고 재밌다. 지구별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흰 점 히말라야는 수미산에 터 잡은 외계에서 온 생명체들이 지구에 올 때 지침으로 삼는 장소일 수 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추론이다. 
우리는 수미산 남쪽에 자리한 생명들이고 동, 서. 북에는 다른 사바세계가 존재한다고 경전은 이야기한다. 우주는 막혀있을 수 없다. 본래 하나이고 미시적이든 거시적이든 일체존재와 뿌리를 함께한다. 우주의 열리지 않는 관문은 없다. 이 터에 자리 잡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보편적 삶의 방식에 대한 상식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해되지 않으면 경계의 바깥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외계인이다.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가 외계인처럼 보일 수 있다. 경계는 동종의 생각과 방식의 집합에 의해서 생겨난다. 내부에서 보면 동의의 집합이고 외부에서 보면 동의하지 않은 집합의 사이에 경계는 존재한다. 같은 고도에서도 수많은 경계가 그어지고 지워진다. 경계는 욕망의 흐름과 그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모두는 누군가에게는 외계인이다. 
낮은 고도에서 사는 사람들의 욕망은 많은 부분 여기서는 자라지 못한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고 온기는 체온이 전부인 이 고도에 그들의 조상들은 왜 자리를 잡았을까. 죽을 때 한 번 하늘을 본다는 야크처럼 평생을 오로지 설산만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품고 키울까. 설산이 앞산인데 그들의 하늘은 어디까지일까.
생각은 끝이 없고 입술에 달도 사라졌다. 이제 누워야겠다. 평면의 시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랑탕 계곡을 거슬러 올라 해발 4,000미터가 넘는 여기서 망상의 고도가 너무 높았다. 꿈속에서의 주 무대는 아직은 히말라야가 아니다. 떠나온 곳, 다시 돌아갈 그 곳에서의 삶이 꿈의 주 무대다. 간밤에는 어떤 꿈을 꾸었나. 분명 히말라야는 아니다. 히말라야에 대한 기억들이 쌓이면 무대가 가끔은 바뀔 것이다. 한 번쯤은 히말라야를 꿈속에서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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