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벚꽃 화사한 날의 차 향기

2014-06-02     불광출판사

진학眞學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꽃길이었다. 제주 왕벚나무가 때 이른 개화로 벌써 산화공덕 하듯 꽃잎 휘날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우리 일행 열 명은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제주시 연동 한라수목원 근처 선림사禪林寺를 무난히 찾아들었다. 생면부지의 스님을 이틀 사이에 두 번씩 ‘만나야 한다’는 건 기연이라면 기연이었다.   
첫 만남은 서귀포 정방폭포 위에 ‘이왈종 미술관’을 짓고 활동 중인 이왈종 화백을 뵈러 간 저녁 자리에서였다. 내가 제주도 서귀포 성산읍 신풍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지가 벌써 6년째다. 시 쓰고, 귤농사 짓는 세월이 잠깐 사이에 6년이니 이젠 제법 농부 행색이 난다. 외로울 만해지면, 제주 꽃구경이나 바다구경 핑계로 섬으로 들어온 선후배들이 신풍리 집을 찾아오신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꼴이라 사실 외롭다고 투정을 부릴 계제도 못 된다. 4월의 손님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서 학연을 맺은 선배님들 네 분과 형수님들 해서 여덟 분이었다. 30년 넘게 지란지교를 맺은 분들이라 친형제 이상이다. 나와 아내가 제일 말째다. 
다들 작가, 언론인, 교수, 편집인으로 공사다망하신 분들이라, 일정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우르르 제주행’을 결행하신 것은 ‘신풍리 안부’가 궁금하셨던 때문이었다. 나로선 과분한 사랑이다. 일행의 좌장은 화순 쌍봉사 옆에 ‘이불재’라는 택호로 집필실과 도예공방을 마련해 놓고 내외가 각각 소설 창작과 도예 창작으로 일가를 이루신 정찬주 선배님 내외이다. 이왈종 화백은 바로 정 선배님께서 모 출판사 출판부장으로 일하실 때 편집자와 삽화가로 맺은 깊은 교분이고, 진학 스님과는 『암자로 가는 길』을 집필하면서 맺어진 선연이었다. 
진학 스님이 한라산 중턱 오일륙도로를 넘어야 하는 백 리 길을 달려 서귀포항 음식거리로 오셨다. 기필코 정찬주 선배와 일행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날 저녁은 이 화백님이 사기로 한 것이었는데, 슬그머니 일어난 진학 스님이 먼저 계산을 해버렸다. 원래 호스트를 자처하신 이 화백께서 머쓱해진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우리 일행 또한 뜻밖의 대접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이런 귀한 분들 만나기 쉽지 않으니….”
이리 된 사연으로 다음날 점심 때 다시 이왈종 화백을 뵈러 가야 했다. 원래 당신께서 사기로 한 밥이니, 이리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제 저녁에 이어 오늘 점심은 제주 토속음식들로 한 상이 차려졌다. 이렇게 맛난 점심을 대접받고, 일행들이 이심전심으로 정한 다음 일정이, ‘이번엔 우리가 한라산을 넘어 연동 선림사 진학 스님의 차방을 찾아 차담을 나누자’는 것이었다. 제주를 떠나기 전 꼭 한번은 들러달라는 스님의 간곡한 부탁이 있기도 했다. 
이런 사연으로 이왈종 화백과 진학 스님을 이틀간에 두 번씩 만나야 했던 것이다. 스님이 일구는 채전을 노리고 내려오는 노루들을 물리치려 기르는 진돗개 ‘반야’가 간간이 짖는 소리만 빼고는, 선림사는 대찰의 풍모이되 고즈넉한 선종 가람의 품격이 빼어난 곳이었다. 다과를 즐기는 자리에서 진학 스님이 “산중불교를 지키는 선사가 있다면, 대중하고 호흡하며 하화중생의 접점을 찾으려 노력하는 스님들도 많아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는 말씀이 솔깃하게 와 닿는다.  
산사의 풍경소리 사이로 스님이 차분히 내시는 차향이 그윽하게 번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 깊은 정이 은은한 가운데 품격 있는 대화가 아쉬운 이 시절에, 나는 참으로 시적詩的으로 이틀 사이에 두 번씩이나 ‘만나야 하는’ 분들을 만나는 선연을 맛보았던 것이다. 얼마나 깊은 인연이었기에 이랬던 것일까? 이런 깨달음의 날에는 거리에서 옷깃을 스치는 낯모를 선남선녀들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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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제주도 신풍리에 터를 잡고 귤농사를 지으며 푸른 바닷바람에 펜을 굴려 시를 쓰는 시인.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행복이 가득한 집」, 「마리끌레르」 등의 편집장을 지냈다. 1993년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수없는 세월을 장독에 담아두고 익어지길 기다린 끝에 17년 만인 2010년 첫 시집 『하귤의 껍질을 벗기듯』을 발표했다. 이후 『지금도 짝사랑-바람 돌 신풍리…』, 산문집 『나는야 지금 사랑이 더 좋다』 등을 냈다. 현재 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학부의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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