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구성원이면서 신의 영역에 있는 중간자적 존재

동서양의 인간창조 신화

2014-06-02     불광출판사

 | 천지창조에 이은 인간창조 신화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우주 탐험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두 젊은 천재 과학자인 쇼(누미 라파스)와 할러웨이(로건 마샬 그린)는 생명의 근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판이하다. 쇼는 ‘신’을 만나길 기대하지만, 할러웨이는 이를 부정한다. 쇼는 창조설을, 할러웨이는 진화론을 믿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 해답은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아, 에일리언이 지구의 바다에 몸을 던짐으로써 DNA를 퍼뜨리는 시작 장면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은 왜 <프로메테우스>일까? 영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생명의 근원을 좇아가는 우주선의 이름이다. 그 이유는 프로메테우스가 인류를 만든 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필자는 2회에 걸쳐 동서양 신화의 천지창조에 대해 살펴봤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따르면, 천지창조 이후 짐승들이 만들어진 뒤 프로메테우스가 흙을 물로 반죽하여 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것으로 돼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불꽃을 조금 떼어다가 인간에게 주기도 했다. 그 불로 말미암아 인류는 무기를 만들어 다른 동물을 정복하고 농기구를 만들어 토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됐고, 추위를 피할 수 있게 됐다. 인류문명의 시작인 것이다. 이는 제우스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었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카우카소스 산 위의 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쇠사슬에 묶여 버렸다. 그리고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독수리가 쪼아 먹도록 하는 형벌이 내려졌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선사한다. 하나는 인류를 창조한 존재가 신이라는 사실, 다른 하나는 인류를 창조한 신은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른 동서양 신화의 경우는 어떠할까? 

| 동서양 인간창조 신화의 공통점
중국신화에는 복희伏羲와 여와女媧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둘은 남매지간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중 복희는 뇌신의 아들로서 인류에게 불씨를 가져다 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가 하면 여와는 천지창조 후 황토로 인간을 빚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프로메테우스와 마찬가지로 복희와 여와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인 것이다.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은 『성경』 구약이나, 그리스로마 신화나, 중국 신화나 동일하다. 
조금씩 기록이 다르긴 하나 복희와 여와가 하늘까지 차오르는 홍수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갈 때 조롱박 속에서 살아남는다든지, 복희의 아름다운 딸인 복비가 물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어 낙수落水의 여신이 되었다든지, 여와가 인간을 만든 뒤 무너져 내린 하늘의 구멍과 가로 세로로 갈라진 땅의 틈을 메운다든지 하는 수난을 겪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이 역시 프로메테우스와 유사한 점이다. 
다음으로 인도신화를 살펴보자. 창조의 신 브라흐마는 자신의 몸에서 사라스바티라는 여인을 만들었다. 따지자면 사라스바티는 브라흐마의 딸인 것이다. 반신반인의 존재인 아름다운 사라스바티를 보자 브라흐마는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느꼈다. 이 사실을 간파한 사라스바티는 고개를 돌려서 자신을 바라보는 브라흐마의 시선을 외면하였다. 브라흐마의 몸에서는 머리가 하나 더 생겼다. 계속해서 사라스바티가 시선을 피하자 브라흐마의 몸에서는 두 개의 머리들이 더 솟아났다. 사라스바티가 하늘로 피신해가자 브라흐마의 몸에서는 다섯 번째 머리가 솟아올랐다. 브라흐마는 사라스바티에게 말했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창조주로서의 사랑이다. 우리의 결합만이 창조를 완성할 수 있다.” 
결국 사라스바티는 하늘에서 내려왔고, 둘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면서 인류의 조상인 마누를 낳았다. 마누는 ‘마누 법전’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필자는 브라흐마가 창조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유지의 신 비슈누나 파괴의 신 시바에 비해 상대적으로 존중받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이 역시 인간을 만든 신의 숙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인도신화에도 대홍수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중국 신화에서는 복희와 여와가 대홍수에도 조롱박 속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성경』의 ‘노아의 방주’와 유사한데, 인도신화에서 대홍수 속에서 살아남는 게 마누의 가족이다. 마누와 마누의 아내 이다는 물고기를 살려준 대가로 대홍수에서 살아남게 된다. 그런데 왜 모든 신화에는 대홍수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것일까? 물은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죽음의 재앙을 부를 수 있는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생명, 죽음, 재생’이라는 물의 순환고리에서 인류는 정화의 이미지를 읽었던 게 아닐까?
동서양의 인간창조 신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창조의 신이 자신의 형상을 흙으로 빚어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창조의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다른 자연구성원과 달리 인간이 신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가 하면, 흙으로 빚어진 존재라는 것은 다른 자연구성원과 마찬가지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존재임을 시사한다. 즉, 인간은 자연의 구성원이면서 신의 영역에 있는 중간자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구성원인 까닭에 태어나서 죽는 유한성을 극복할 수 없지만, 신의 형상대로 빚어진 특별한 존재이기에 직립 보행할 수 있으며 불을 통해 문명을 만들 수 있었다. 


| 인간의 자유 의지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외계인이 지구의 바다에 몸을 던짐으로써 생명이 발화했던 것처럼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외계인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 발아의 씨앗이었다. 『법화경』 「약초유품藥草喩品」에는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가 있다.
“이 삼천대천세계에는 풀, 관목, 약초, 수목이 있다. 이들은 구름에서 방출된 빗물로부터 힘에 따라, 영역에 따라 물을 흡수한다. 동일한 구름에서 생긴 동일한 맛의 빗물에 의해 씨앗이 여러 가지 종류로 커지고, 싹이 트고, 자란다. 그와 같이 꽃과 열매를 맺고, 각각 갖가지 이름을 얻는다.”
비유에서 갖가지 풀과 나무는 중생을, 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비는 차별 없이 내리지만 그 빗물을 통해 살아가는 초목의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삼초이목의 비유를 설한 뒤 부처님은 진흙의 예를 들었다. 
“도공이 똑같은 진흙으로 용기를 만들었다. 어떤 것은 흑당黑糖의 용기가 되고, 어떤 것은 우락牛酪의 용기가, 어떤 것은 발효유와 우유의 용기, 어떤 것은 부정한 것의 용기가 된다. 진흙이 여럿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넣는 물질에 따라 여러 가지 용기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탈 것은 불승佛乘 하나뿐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각기 다른 씨앗에서 발아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진흙을 빚은 도공(조물주)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은 같은 진흙으로 빚어졌다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이런은 <프로메테우스>라는 시에서 ‘바위, 독수리, 그리고 사슬 / 자존심 강한 자들이 맛보는 모든 괴로움 / 그대가 보여준 것은 / 인간의 비참함을 죽이고 / 인간을 스스로의 정신으로 / 강화시키는 일이었다 / 그러나 그대의 의지는 / 대지와 하늘도 꺾지 못했다’라고 노래했다. 이 시편에서 알 수 있듯 프로메테우스는 부당한 수난에 대한 영웅적인 인내와 압제에 대항하는 의지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임제 선사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상기된다. 임제 선사는 『임제록』에서 무위진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붉은 살덩이로 된 몸뚱이에 지위가 없는 참사람이 하나 있다. 항상 여러분의 얼굴에 드나들고 있다.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시오.”
그런가 하면, 임제 선사는 “부처를 최고의 목표로 삼지 마라. 내가 보기에 부처는 한낱 똥 단지와 같고 보살과 아라한은 죄인의 목에 거는 형틀에 지나지 않다. 이 모두가 사람을 구속하는 물건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자유인인 까닭에 임제 스님은 자신을 옥죄는 모든 것에서 단호히 벗어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미완未完의 부처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예를 들자면, 몸을 옥죄고 있는 바위와 사슬, 그리고 독수리가 쪼아대는 아픔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미욱한 중생에 머무는 것이고, 그 구속과 고통 속에서도 자유의 의지를 드높이면 바로 부처인지도 모를 일이다. 

유응오
1972년 충남 부여 출생.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불교신문」과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됐으며, 「주간불교」와 「불교투데이」 편집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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