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시오, 달마

시험의 그늘

2014-06-02     불광출판사

| 옳음이 아니라 이김이 정답? 
‘공부를 잘 한다’는 말은 사실 어폐다. 공부는 질적 기술이 아니라 양적 노력의 범주에 속한 개념이다. 그러니 많이 할 순 있어도 잘 할 순 없는 노릇. 엄밀히 따지면 ‘시험을 잘 본다’는 뜻이다. 시험과 공부를 동의어로 여기는 관행은, 시험공부 이외의 공부는 공부가 아니거나 공부일 필요가 없다는 집단무의식을 반영한다. 마음공부엔 물질적 대가가 따르지 않으며, 대저 유복한 집에서 자란 아이는 인생공부를 면제받기 쉽다.   
학생이 스스로 문제를 내서 푸는 시험은 장난이거나 범죄다. 시험의 주체는 학교나 기업, 관가나 정부이며 이를 통칭하면 ‘갑甲’이다. 이른바 ‘주관식’ 답안조차 결국엔 ‘그분’들의 눈에 들어야 좋은 점수를 얻는다. 시험의 명분은 학습능력의 측정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걸러내고 차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노령화가 지속되면 앞으로는 경비원을 뽑을 때에도 영어시험을 보게 될 것이다. 경쟁이 없는 사회는 인간이 모두 죽어야 하는 사회다.    
그래도 어려서의 시험은, 종이 위에서 치르는 시험은 명쾌하다. 어쨌든 정답과 오답이 분명하니까. 반면 나이 들어서의 시험은, 생업의 현장에서 치르는 시험은 정답과 오답이 수시로 바뀐다. 옳음이 아니라 이김이 정답이다. 이놈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저놈이 칼을 갈고 있다는 걸 깜빡하게 된다. 눈앞에 시험지가 놓인 것도 아닌데, 자꾸만 시험에 든다. 뻔뻔하고 비열한 것도 능력이란 걸 절감한다. 

| 6조는 5조가 아니라 7조가 정한다 
법거량法擧量은 말 그대로 깨달음의 무게를 재는 일이다. 하루는 선종의 5조 홍인弘忍이 제자들을 불러놓고 마음을 설명하라는 숙제를 냈다. 수제자였던 신수神秀는 “부처의 마음은 깨끗한 거울과 같으니 매일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며 매우 ‘정답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이에 하판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혜능慧能은 게송을 듣고 “마음이란 것 자체가 헛것인데 거울이 웬 말이냐”며 한방 먹였다. 이른바 돈점頓漸 논쟁의 출발이다. 
홍인은 혜능의 손을 들어줬다. 일자무식임에도 『금강경』의 핵심을 단박에 깨친 혜능을, 평소 예의주시하고 있던 터였다. 문제는 법거량에서 승리하면 상장이나 꽃다발 정도가 아니라 문중 전체가 상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밑바닥의 행자에서 졸지에 교단의 우두머리로 등극한 혜능은, 선배들의 질투로 16년 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여하튼 6조를 약속받았고, 훗날 중국불교의 최고 선지식으로 등극했다.
혜능이 신수를 제압한 사연은 혜능의 제자였던 신회神會의 조작이란 설이 있다. 신회는 당초 신수의 문하였으나 그가 인정해주지 않자 혜능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신수에 대한 비판으로 평생을 보냈다.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승적을 대량으로 팔아 국가 재정을 메워준 인물이기도 하다. 황제의 환심을 얻어 종정宗正에 오르려는 꼼수였다. 어느 스님은 “6조는 5조가 아니라 7조가 되고 싶은 자가 정한다”고 꼬집었다. 
법거량은 마음의 이치를 드러내기 전에 먼저 스승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일이다. 필연적으로 객관성에 금이 간다. 더구나 문중의 승계라는 엄청난 보상이 걸린 대화일 경우, 숱한 뒷말과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취지는 철학적일지 몰라도 내막은 정치적으로 흐를 공산이 크다. 요컨대 가장 편안한 대화는 서로에게서 바라는 것이 없는 대화다. 그것이 아무리 신성하고 오묘한 주제일지라도, 무언가를 ‘재는’ 대화는 끝내 시험이다. 험난하고 음험하다. 

| 나의 골수를 빼어가도 좋다
달마: 떠날 때가 되었다. 다들 그간 얻은 바를 말해보라.  
도부: 제가 보기에는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문자를 버리지도 않음으로써 도道를 삼는 것입니다.
달마: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총지: 아난이 아촉불국(극락)을 보았을 때에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달마: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 사대四大가 본래 공하고 오온五蘊이 따로 있지 않으니, 따로 얻을 법이란 없습니다.
달마: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혜가: (아무 말 없이 단지 절을 하고는 그 자리에 섰다.)
달마: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 
서기 536년은 보리달마가 중국에 머문 지 9년이 되는 해이고, 독살을 당한 해이자, 부활해서 다시 인도로 돌아간 해다. 디데이가 다가오자 달마는 후계자 물색에 나섰다. 문도들 가운데 도부道副, 총지總持, 도육道育 그리고 혜가慧可를 불러 면접을 치렀다. 총지는 비구니였다는데, 그만큼 따르는 무리가 많아졌음을 시사한다. 짐작하다시피 가죽・살・뼈・골수라는 구분은 미세하나마 격차를 의미하며, 1등을 차지한 혜가는 2조祖가 되었다.  
물론 나머지 대답들도 본령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도부의 진술은 선종의 종지인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정리된다. 극락을 기대하지 않는 만큼 지옥을 두려워 않겠다는 게 총지의 다짐이다. 도육의 내공도 육신의 굴레를 초월해 있다. 그럼에도 조금씩 등급을 나눈 처사는, 사뭇 아리송하고 부당하다. 표현의 차이일 뿐 지혜의 높낮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일찌감치 혜가를 상속자로 낙점해둔 상태에서 부리는 생떼일 수도 있다.
한편으론 다들 문자를 안 쓰겠다면서 슬며시 문자를 쓰고 있는 점은 자못 비위가 거슬린다. 이겨야 한다는 의지가 보이고, 잘 보이고 싶다는 냄새가 난다. 무심無心을 논하는 마음은, 이미 무심이 아닐 것이다. 반면 혜가의 행동은 순전히 하직인사인 듯싶다. 잘 가시오 달마, 당신에겐 당신의 길이 내게는 나의 길이. 역사적 명예가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혜가만이 자신을 꾸미거나 뽐내지 않았다. 시험에 응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으로 남음으로써, 비로소 달마가 되었다.   

| 오직 모르니, 그저 할 밖에
깨달은 이후에도 수행을 해야 하느냐(점, 漸) 하지 않아도 되느냐(돈, 頓)는 말다툼은 지금껏 유효하고 때론 시끄럽다. 깨달음은 분명 있고 깨달음을 잃거나 잊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점수漸修라면, 깨달음이란 것 자체가 망상이며 공부는 괜한 노역이란 게 돈수頓修다. 무엇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주저된다. 다만 수행의 단계를 설정한 점수가 끝내 ‘점수點數’에 연연케 하는 일이라면, 돈수는 일견 무책임하나 자유롭다. 
혜능이 정말 생사를 초탈했다면, 도망칠 생각 따윈 품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목숨을 부지해야겠다는 마음이 기起했고, 뒷날을 도모해야겠다는 마음이 동했다. 그래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은 속담 이전에 잠언이다. 몸에 묶인 마음은 기어이 몸을 위해 일한다. 하늘을 본다지만 하늘을 보는 마음을 보는 것이요, 마음이 없다는 인식도 마음이다. 거울이 아닌 마음은 닦아야 할 까닭이 없지만, 또한 헛것만은 아니어서 평생을 절름거린다.  
“오로지 알 수 없음을 안다면, 이게 바로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다(但知不會 是卽見性, 단지불회 시즉견성).” 대표적인 점수론자로 알려진 지눌知訥이 『수심결修心訣』에 남긴 경구다. 그 역시 마음을 닦는 자가 마음을 쉬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걸 통감했다. 삶을 안다고 해서 살림이 수월해지진 않는다. 인생은 얼핏 나아가는 것 같지만 떠밀리는 것이다. ‘나’를 이기겠다고 땀을 빼고 자해를 해봐야, ‘나’는 더욱 독해지는 법이다. 오직 모르니, 그저 할 밖에.
살아있는 것들은 끝내 살아서, 자기의 몸만큼 아프고 마음만큼 괴롭다. 이것이 살아있는 것들에게 주어진, 유일하고도 정직한 깨달음이다. 대부분 몸뚱어리만으론 창피하니까 좋은 옷을 걸치고 브랜드를 따진다. 자기 자신만으론 버틸 용기가 없으니까 기도를 하고 학벌을 딴다. 그럴듯함이 아니라 그러함에 족하고, 그냥 있음에 변명이나 사족을 붙이지 않을 수 있다면. 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장영섭 
집필노동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불교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눈부시지만, 가짜』, 『길 위의 절』, 『공부하지 마라』, 『그냥, 살라』, 『떠나면 그만인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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