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구품연대의 상품상생 극락세계에 왕생하는가

호국지장사 <극락구품도>

2014-05-27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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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구품도>
조선후기 1893년, 비단에 채색,
165.5×171cm, 서울유형문화재.
황홀한 극락의 풍경을 묘사하였다.
아미타삼존불(아미타불-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왕림해 계신다. 극락의
푸른 연못에는 죽은 영혼이 왕생하고
있다.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호국지장사.
본래 사찰명은 화장사였으나,
국립묘지 현충원이 들어서고부터
호국지장사로 개칭하였다.





아미타부처님 어디에 계신가
이 생각을 가슴에 붙여 놓고 잊지 말라
생각하다 생각이 다하여 
생각이 없는 곳에 이르면
육근의 문에서 항상 찬연한 빛이 나오리라
阿彌陀佛在何方 着得心頭切莫忘
念到念窮無念處 六門常放紫金光 
- 나옹 스님

서울 동작구의 호국지장사는 특이하게도 국립묘지 안에 자리하고 있다.(도판 02) 호국지장사에 가려면, 우선 국립현충원의 입구 검문소를 지나야 하고 또 드넓은 묘역에 안치된 수천수만 기의 묘비석을 가로질러야 한다. 좌우로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마치 바둑판처럼 가로세로 줄 맞추어, 끝없이 펼쳐지는 묘비석의 장렬한 행렬. 무려 18만 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호국영령들을 내려다보며 호국지장사는 서있다. 아무래도 이곳 사찰 스님들은 ‘영혼천도’의 최고 전문가가 아니면 안 될 듯하다.


| 잘 보존된 <극락구품도>, 그리고 영가천도
서울 시내에 이런 청정지역이 있다니 놀랍다. 사찰 약수터의 수질검사표를 보니 ‘적합’ 판정을 받았다. 물이 살아있다. 서울 시내 약수터 중, 마시기에 안전 판정을 받은 곳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경내의 나무에는 까치가 집을 세 채나 지었다. 까치와 산비둘기가 사찰 마당을 제 집처럼 태연스레 활보한다. 도심 한가운데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골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받아 자연 그대로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종무실장 자희심 보살이 설명을 덧붙인다. “호국지장사가 현충원 전용 사찰인 줄 아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본래 사찰이 먼저 있었고, 후에 나라에서 이 일대를 국립묘지로 정한 것이지요. 특히 영가천도가 영험하기로 유명해서 연중 제사가 끊임이 없어요.”
호국지장사에 소장된 <극락구품도>는 보기 드물게 보존이 잘 되어 있다.(도판 01) 섬세한 디테일과 영롱한 색채가 고스란히 살아있다.(도판 03) 주지 도호 스님이 그 비결을 밝힌다. “원래 법당에 모셔졌었는데 습도가 높은 것 같아 옮겨주었지요. 불화에게 쾌적한 환경으로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이렇게 ‘작품의 입장’에서 작품을 생각해주는 스님을 뵙기는 사실 쉽지 않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이 당연한 말씀이 참 비범하게 들렸다. 그 이유는 수년간 작품 조사를 다니면서, 불교미술품들이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 다양한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아예 무관심한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문화재적 가치 특히 금전적 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고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곳이 많아졌다. 그래서 혹시나 도난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또는 보물이나 문화재 지정에만 급급한 경우도 있다. 또 창고에 마냥 꽁꽁 싸두기도 하고, 무관심 속에 곰팡이가 핀 채로 방치되기도 한다. 
일본에 유출된 우리 작품을 약 7년간 현지조사하면서(비록 그들이 약탈해간 것이지만), 도시건 시골이건 어떤 사찰을 가든 항상 ‘작품의 안위’ 먼저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에 놀랐다. 그들은 먼저 작품 조사를 신청한 사람이 작품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또 학술적 문화적 가치를 밝히는 데 합당한 자격을 갖췄는지 판단한다. 그리고 작품 조사를 허락할 경우, 그 과정은 무조건 ‘작품의 입장’에서 작품 상태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조사하는 연구자는 작품 조사에 요구되는 예의와 모든 주의사항들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하기에 매우 조심스럽다. 관습적으로 정착된 그들의 문화가 마냥 부럽기만 했다. 
한때 국내에서 사찰 유물 소유권 문제로 국립기관과 사찰 사이에 소송까지 오고 가는 것을 보고,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한 아이를 두고 가짜 엄마는 아이를 반으로 잘라 나누자는 데 찬성했고, 진짜 엄마는 그렇게 할 것이면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했다. 사찰 유물을 어떻게 보호 보존할 것인가. 그 근본적인 해답은 아주 간단할 수 있다. 나의 입장·사찰의 입장·기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의 입장 즉 ‘어떻게 하면 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거창한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지금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섬세한 ‘관심’이 필요하다. 


| 마음마음에 간절함이 사무치면
사리불아,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부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 이름을 깊이 새겨 하루, 이틀 혹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혹은 이레를 두고, 한결같이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불러 외우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 아미타부처님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마중 나오시니라. 그 사람 마음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되느니라.
- 『불설아미타경』
“7일 동안 오롯하게 한결같이 집중하여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아미타경』에는 쓰여 있다. 염불선이나 간화선 모두 집중 수행 기간을 보통 7일 단위로 잡고 있다. 많은 역대 선사들도 목숨 걸고 정진하면 7일 안에 깨칠 수 있다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염불삼매에 들 때까지 염불을 놓지 않고 집중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죽을 둥 살 둥 하는 경계가 와서 간절함이 사무치지 않으면, 집중력은 흩어지고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십상이다. 죽음도 불사할 만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애절하다면, 7일간도 필요 없다. 
『관무량수경』에는 하품하생의 가장 밑바닥 근기의 사람이라도 마음만 모아 일심으로 부른다면, 채 10번도 부르기 전에 훨훨 타는 지옥불이 극락의 청정수로 변해버린다고 나온다. 보조 국사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진여염불의 공이 사무치면 나날이 때때로 어디에나 아미타불의 청정미묘한 진체가 불현듯 그 앞에 나타나고, 임종할 때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성중들이 마중하여 구품연대의 상품상생 극락세계에 왕생한다.”
바로 이러한 ‘진여염불의 공이 사무치면’ 나타나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극락구품도>이다. 작품에는 가장 하단에 거대한 붉은 원으로 ‘일원상一圓相’을 표현하고 있다.(도판 04) 깨달음을 체험할 때 만나게 되는 궁극의 표상인 것이다. 불성, 법성, 본래면목, 마음자리, 바탕자리, 여래장 등 다양하게 불리는 절대 진리의 모습은 ‘○’, 일원상(또는 여의주)으로 표현된다. 심우도의 열 장면 중에도 ‘소와 내가 모두 없어지는 궁극의 깨달음’의 순간에는 커다란 원 하나가 덩그마니 그려져 있다. 동화사와 표충사에도 본 작품과 형식이 같은 조선후기의 19세기 작품이 현재까지 유존하고 있는데, 모두 작품 하단에 거대한 일원상을 금색 또는 붉은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원상 양 옆으로는 아름다운 보살님들이 벽련대반 위에 ‘영혼’을 실어 나르고 있다. 영혼 역시 둥근 구슬(여의주)로 표현하였다.(도판 04, 08) 그 위로는 푸른 연못이 있고 그곳에는 무수한 연꽃이 피어난다. 연꽃에는 새로운 영혼이 탄생하는 ‘연화화생蓮花化生’ 장면이 펼쳐진다.(도판 06) 작품의 좌우 칠보전과 보광전에 계신 부처님들은 손에서 구원의 빛을 내어, 연꽃에 다시 태어나는 영혼들을 구제하고 있다.(도판05) 극락의 연못 위로 작품의 가장 상단에는 아미타삼존불이 왕림해 계신다. 작품을 보는 순간, 신자들은 하단의 일원상을 만나고 바로 극락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 호국영령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청화 큰스님은 화두나 염불이나 공부가 진척을 보지 못하는 이유를 ‘상속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수행이 ‘계속’ 되지 않기에 결정적인 확신을 못 갖게 되는 것이다. 태고보우 스님이 공부의 길을 밝혀주신다. “진실한 염불을 할 때는 밤낮으로 행주좌와에 아미타불 명호를 심두心頭나 안전眼前에 붙여 두어라. 마음에 그 자리를 애써 놓지 않고 상속적으로 생각생각에 조금도 어두워지지 않게 오래오래 공을 이루면 문득 찰나 동안에 범부심이 끊어진다.” 번뇌망상이 미처 안 떨어질 때는 애써 화두를 들고 염불을 하려 하겠지만, 한 번 떨어져나가면 이제는 어느 경우에나 본래 면목자리가 떠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호국지장사의 역사는 통일신라 말 도선 국사가 창건한 갈궁사로부터 비롯되었다. 달마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한강이 휘돌아나가는 명당자리다. 이후 1577년 선조의 생조모인 창빈 안씨 묘의 원찰로 지정되어 화장사로 불렸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립묘지가 들어서자 수많은 호국영령을 위해 기도하는 호국지장사가 되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영혼들이 자의든 타의든 입대하여 결국 모두 나라를 위해 죽었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요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젊은이들이 많은데, 한번 이 현충원에 와서 돌아보았으면 해요.”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처럼, 일반 공원화되어 ‘삶과 죽음이 공생하는 장’이 되기를 기원하는 도호 스님. 젊은 영혼들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발원 정진한다. 호국지장사를 뒤로하고 나오면서 다시 지나오는 끝없는 묘비석의 물결, 들어올 때와 달리 마음이 아려온다.(도판 09) 

 
 


강소연
불교미술사학자. 홍익대학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본 교토대학에서 ‘일본소재 조선전기 왕실 불교회화’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해외에 유출된 우리 국보급 불교회화 문화재를 약 7년 간 현지 조사하여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동국대 불교학과 연구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조선일보 (주)디지틀조선일보 기자를 역임했으며, 일본 미술문화계 최고학술상 ‘국화상’ 장려상・한국 불교소장학자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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