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고프기 때문에 먹을 것을 찾는다

맛집·먹방 전성시대

2014-05-27     불광출판사

요즘처럼 사람들이 음식에 열광하는 시대가 있었을까? 물론 음식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이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음식에 집착해왔다. 호랑이가 잡아간다고 해도 울음을 멈추지 않던 아이가 곶감을 주니 언제 그랬냐는 듯 ‘뚝’ 하고 울음을 멈췄다는 전래동화만 보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맛있는 음식에 열광하는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



| 예능 방송을 점령한 ‘맛’의 향연
동양에선 가장 끊기 힘든 두 개의 욕망으로 ‘식색食色’을 꼽았었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언제나 식욕과 색욕을 다스리기 위해 고심해왔고, 그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동서양 수도자들을 모두 시험에 빠뜨릴 정도로 음식이 강렬한 유혹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음식에만 열광한 것은 아니었다.
방송은 대중의 관심을 즉각적으로 반영한다. 시청률을 통해 대중의 관심이 바로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방송 경영진은 시청률 추이를 보며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쪽으로 개편을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방송을 보면 대중이 무엇을 선호하는지 알 수 있는데, 과거 방송에선 음식 관련 프로그램이 요즘처럼 전면적이진 않았다. 주로 저녁식사 시간대에 하는 <6시 내 고향>, <VJ특공대> 류의 프로그램들에서 식재료나 맛집 탐방을 다뤘었고 아침시간대의 요리프로그램에서 요리법 정도를 다룬 것이 다였다.
요즘은 음식이 예능을 점령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음식 소재 방송이 활발해졌다. <아빠 어디 가>에선 아빠와 아이들이 전국 각지를 돌며 현지 식재료로 밥을 만들어 먹거나 각자 팀을 나눠 현지 맛집에서 식사하는 모습이 방영된다. <진짜 사나이>에선 각 지역의 군부대를 다니며 군대음식을 체험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군대리아’가 재발견되고 해군 대함정 식당의 푸짐한 식사가 화제로 떠올랐다. <1박 2일>에선 전국을 돌아다니며 특산물을 맛보기도 하는데, 최근엔 호남지역의 낙지집, 한정식집, 삼합집 등 맛집 여러 곳을 한꺼번에 소개해 시청률이 상승하기도 했다. 한때 전체 예능 시청률 1위까지 올랐던 <패밀리가 떴다>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현지 식재료로 밥을 해먹는 프로그램이었다. <정글의 법칙>은 범위를 더 넓혀 지구촌 오지를 다니며 현지 식재료를 소개해준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추성훈의 가족을 통해 일본의 음식들을 소개해준다. 전통적인 토크쇼였던 <해피투게더>도 요즘엔 야간매점이라는 음식코너로 지탱된다.
종편과 케이블TV에서도 음식은 최고의 방송 소재로 떠올랐다. 착한 식당을 찾아준다는 <이영돈PD의 먹거리 X파일>은 치솟는 인기로 해당 방송사의 대표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곳에서 착한 식당으로 선정되면 전국의 식객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자 다른 종편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맛집을 소개해주는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있다. 음식에 대해 알려주는 요리연구가, 식품전문가 등도 종편 토크쇼 패널로 각광받는다. 요리 전문 케이블 채널을 통해선 요리사들이 스타급 방송인으로 격상됐다. 과거엔 음식 만드는 사람을 평범하게 요리사라고 불렀지만, 요즘엔 ‘셰프’라는 외국어로 부르면서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 해외도 주목한 한국의 ‘먹방’ 열기
이렇게 음식에 대한 열망이 폭증하다보니 ‘먹방’이라는 신조어가 순식간에 일반화되며 음식 맛있게 먹는 사람의 인기도 치솟았다. 하정우가 빵, 탕수육 등을 먹는 장면을 통해 먹방 스타로 떠올랐고 윤민수의 아들 윤후는 먹방으로 인터넷을 평정했다. 최근엔 추성훈의 딸 추사랑이 먹방계의 ‘끝판왕’으로 새롭게 등장해 가공할 먹성을 자랑하고 있다. 음식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던지, 최근엔 먹방이 이런 정규 방송의 영역을 넘어서 일반인들의 인터넷 방송에서도 뜨거운 인기를 누릴 정도다. 생소한 일반인이 컴퓨터 앞에서 음식 먹는 장면을 계속 내보내는데 거기에 대중이 호응하는 것이다. 한국의 이례적인 먹방 열기를 얼마 전엔 해외 언론들까지 보도했었다.
음식은 인터넷 문화의 가장 핵심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수많은 네티즌이 음식 혹은 맛집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거나, 전문적이지 않더라도 맛집 체험담을 일상적으로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의 가장 대표적인 용도가 맛집의 메뉴 촬영이 되었을 정도다. 이렇게 사람들이 음식과 맛집에 열광적인 호응을 보내다보니 유명 맛집 블로거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서, 한 맛집 블로거의 혹평으로 업소가 폐업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새롭게 등장한 스마트폰에서도 음식은 중요한 소재로 자리 잡아서, 맛집이나 음식 관련 정보를 제공해주는 애플리케이션(앱)이 잇따라 등장했다. 맛집 지도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
한국인이 이렇게까지 음식, 혹은 맛집에 열광한 적은 없었다. 21세기 들어 나타난 이례적인 현상인데,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풍요일 것이다. 과거엔 양이 중요했지만 이젠 질을 따져 골라먹을 정도로 풍요로워졌다. 또 식재료와 음식점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것도 한 이유다. 불신이 크다보니 정보를 자꾸 외부에서 찾게 된 것이다. 나홀로 가구가 많아져 외식 가능성이 커진 것도 맛집 열풍에 영향을 미쳤다. 웰빙 열풍도 중요한 원인이다. 내 한 몸 잘 챙기려다보니 자연스럽게 무엇을 어디에서 먹느냐에 대한 관심도 커진 것이다. 자동차 대중화와 여행의 일반화도 맛집 기행 열풍의 배경이 됐다.
그런데 과거 1980년대엔 젊은이들이 설사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도 맛집을 찾아다니고 맛있는 음식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골몰하지 않았다. 음식은 그저 삶의 공간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가운데 적당히 찾아먹으면 되는 것이었지, 음식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되진 않았다는 의미다. 그때 젊은이들에겐 시대정의라든가, 근본적 삶의 의미 같은 거창한 가치들이 더 중요했다. 그러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그런 가치들의 중요성이 붕괴한 대신 ‘개인’이 떠올랐다. 또 과거엔 금욕이 당연했지만 이젠 욕망이 전면에 나섰다. 그러자 개인의 사적 욕망인 식욕이 우리 삶의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이다. 요즘엔 개인의 욕망을 넘어설 만한 정신적 가치가 거의 붕괴된 상태다. 그런 가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욕망에 탐닉한다.


| 배를 채울 것인가, 마음을 채울 것인가
요즘은 불안의 시대이기도 하다. 과거 대학생활은 낭만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낭만이 사라진 지 오래다. 청소년기를 보내는 학교도 극한 경쟁으로 척박해졌다. 황폐하게 학교를 마치고 사회로 나오면 본격적인 생존경쟁이 시작된다. 미래의 안정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벼랑 끝 사회. 공동체가 해체되어 기댈 만한 사람도 없다. 한국인은 지금 힘들고 외롭다. 한 마디로 마음에 허기가 진 것이다. 마음이 고프기 때문에 먹을 것을 찾는다. 남이 먹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얻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잠시나마 시름을 잊는다. 음식은 1차원적인 욕망으로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에 불안한 심리를 잊는 데에 음식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폭식하다가 비만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음식에 열광하고 맛집을 찾아다닌다고 해서 진정으로 불안이 사라질까? 저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의미를 찾고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에겐 음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음식과 같은 본능적인 자극은 그것을 즐기는 순간엔 쾌락을 주며 삶의 시름을 잊게 하지만, 그런 쾌락의 자극에 빠지는 사이에 인생의 의미를 성찰할 마음의 힘이 약해진다. 마음의 힘이 약해지면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다시 쾌락의 자극을 찾는 악순환에 빠진다. 그런 의미에서 음식에 열광하는 지금의 분위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 현인들이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식색을 경계했던 것엔 다 이유가 있다.
몇 가지 실질적인 문제도 있다. 맛집 열풍으로 등장한 맛집 블로거의 세계가 점점 혼탁해진다고 한다. 음식점과 결탁해 믿을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신종 권력으로 군림한다는 지적이다. 방송사의 맛집 소개 코너도 신뢰성에 심각한 의심을 받아왔다. 음식 열풍으로 방송계가 맛집, 먹방에 집중하면서 프로그램들이 획일화되는 것도 문제다. 또, 맛있는 음식이 오히려 몸에 해로울 수 있다는 것도 함정이다. 맛집으로 꼽히는 상당수 음식점에서 나트륨을 과다 사용한다는 고발이 있었다. 설사 맛집 열풍이 투명하고 신뢰성 있게 전개된다고 해도 그렇다. 음식에 열광하면서 사는 삶은 얼마나 공허한가? 배를 채우는 데 골몰할 시간에 마음을 채우는 것이 훨씬 충만한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 웹진 ‘서프라이즈’와 ‘노하우21’의 대표필진과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사회의 관심거리 등에 대해 날카롭게 바라보는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TV로 읽는 대인배 윤리학』, 『중국의 역사와 문화』,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TV쇼크』 등이 있다. 스타 블로거로서 2,800만 명 이상이 방문한 개인 블로그에 문화, 시사, 교육 등 다양한 주제로 칼럼을 꾸준히 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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