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오세요”

2014-05-27     불광출판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한다. 가족들과의 행복한 시간도 포기하고 건강까지 상해가면서 아등바등 일하지만, 정작 돈을 벌어 살 만하다 싶을 때가 되면 써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돈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려 돈을 벌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하지만 신기루를 좇는 사막의 여행자처럼 늘 허덕이며 영원히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 돈은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다. 


| 내면이 완전히 고갈된 어느 워커홀릭의 이야기
마음에 쌓인 많은 것들을 둘러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을 찾아왔다는 그는 워커홀릭이었다. 그는 자신을 느티나무와 시계로 표현했다. 
“나는 사람들 눈에 잘 띄는 언덕 위에 홀로 선 느티나무다. 사람들은 나의 근사한 모습을 좋아하지만 필요할 때만 왔다가 금방 떠난다.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다가도 필요할 때만 온다는 생각이 들면 외롭다. 나는 거대하고 멋진 나무지만 속은 텅 비어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가까이 올 수 있지만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나는 잠깐 왔다가 떠나가는 뜨내기가 아니라 소소한 일상사를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 정말이지 누군가가 와주면 좋겠다.
나는 밤낮 쉬지 않고 꾸역꾸역 일하는 시계이다. 20년이나 쳇바퀴를 돌며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남들이 놀 때, 남들이 잠을 잘 때, 부지런히 일했다.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쉬면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휴일도 명절도 쉬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3년 전부터 멈춰 서 있다. 배터리가 방전되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나는 잠만 잔다. 남들은 쉬지 않고 앞으로 가는데 나만 혼자 멈춰 있으니까 뒤처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예전에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았는데 요즘은 일을 하지 않아서 즐거움도 없다. 놀아본 적도 없고 같이 놀 친구도 없고 노는 방법도 몰라서 외롭고 심심하다.”
은유를 통해 본 그의 내면은 완전히 고갈되어 있었다. 수년째 공허와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예전처럼 일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면 빨리 충전해서 예전의 씩씩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두 가지 방향에서 그의 문제에 접근했다. 먼저 멈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도록 했고, 다음으로 움직임과 멈춤이 둘이 아님을 이해하도록 격려했다. 
두 번째 만난 날, 멈춰버린 시계도 하루에 두 번씩 기능을 하고 있다고 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며 믿지 못했다. 그는 끝내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시계가 멈춰 있어도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한 시간을 맞추지요.” 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움직이는 다른 물건을 찾아보았다. 시간, 물, 인생, 관계 등등. 찾아보니 책상이나 건물처럼 멈춰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더 많았다. “지구가 움직이므로 지구상의 모든 것이 움직인답니다. 우주 전체가 움직이고 있으니까 멈춰 있는 것은 하나도 없네요.” 움직이지 않는 것도 사실은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나 그는 실제로 움직이기를 원했다.


| “알고 나니까 불안하지 않아요”
이번에 그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강이 되었다. 강은 바다를 향해 가고 있다. 강가에는 높은 건물들과 나무, 자동차, 걷고 있는 사람들, 하늘, 구름이 보인다. 모두 움직이고 있다. 강물도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강가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려면 강물과 속도가 달라야 한다. 속도가 같으면 움직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강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도 느리게 움직이는 것도 모두 사라진다. 강은 사라지는 것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 다음 주, 그는 ‘주변의 움직이는 것들을 관찰하라’는 숙제를 근사하게 해 왔다. 
“나는 강물이다. 천천히 흐른다. 강기슭에는 집들이 늘어서있다.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도 보인다. 나도 한때 그랬지! 한눈팔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는데…. 운전대를 놓고 나니까 예전에 보지 못한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 모두 뭔가 하고 있다. 나는 조용히 흘러간다. 한밤이 오면 강변은 조용해지고 나는 변함없이 흐른다. 물고기, 물풀, 플랑크톤, 바람, 공기, 호흡…. 내가 호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가끔 풍랑이 일면 강바닥에서 뭔가 올라온다. 그럴 때면 너무 힘들다. 그것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이젠 직시해야겠다. 홍수가 오면 상류에서 떠밀려오는 쓰레기 때문에 힘들고 아프겠지만 그동안 생긴 맷집 때문에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 강물을 흐르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내면의 에너지라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홍수에 떠밀려갈 때 강물을 주시하도록 시켰다. “강물은 계속 흘러가고 있어요.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 강변의 사물들이 뒤로 쳐지고 빨리 갈 때는 마구 쓸려가느라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다음으로 주변을 보지 말고 강물 자체를 바라보도록 하였다. “빠르게 흘러가는 표면 아래에 예전과 같은 속도를 유지하며 변함없이 흘러가는 흐름이 보이네요. 전체를 보면 강에는 흐름이 없어요. 그런데 부분으로 잘라서 보면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하나였던 강이 여러 개로 쪼개져서 불안해요.”
쪼개져도 같은 강이니까 바다에 가면 다시 만난다고 위로하고, 다시 강 내부를 바라보도록 하였다.
“강물 표면에는 상류에서 떠내려 온 것들이 떠다니지만 강 속에는 원래부터 강에 살던 물고기와 물풀, 플랑크톤이 그대로 있어요. 강은 모든 것을 품고 있어요. 그런데 표면이 너무 빨리 흘러가면 순간적으로 관리를 못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불안해요.” “강이 어디에 있습니까?” “원래 있던 자리에 있어요.” “안을 보면 어떤가요?” “밖에서 볼 때와 달라요. 고요해요.” “어디가 안입니까?” “표면에서 봤을 때 안이죠.” “안에서 안을 보면 어떻습니까?” “안이 표면이 되고 또 다시 안이 보입니다. 그런데 불안하지 않아요.” “왜 불안하지 않죠?” 그가 말했다. “알고 나니까 불안하지 않아요. 표면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요.”


| 속이 텅 비었던 느티나무의 행복한 변화
다음 모임에 그가 만들어온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강물은 수면과 수면 아래, 밑바닥의 흐름이 다 다르다. 수많은 다름이 모여서 거대한 강이 된다. 크게 보면 하나지만 작게 보면 서로 다르다. 모이면 다시 하나의 강이 된다. 강 아래의 고요함은 표면의 흔들림 때문에 가능하다. 누가 더 빠르고 늦다고 할 것이 없다. 차이는 있게 마련이지만 다르다고 하여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크게 보면 모두 하나의 강물이니까. 아래쪽이 그런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으므로 위가 지켜보고 바라본다.”
무상無常을 허무라고 보던 그의 생각도 달라졌다. 무상은 변화를 말하며, 덧없음이 아니라 정반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로움의 씨앗에 물을 주어 느티나무를 거대하게 자라게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는 이제 속이 그득한 강이다. 어느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강이 되었다. 창밖에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비가 와요. 강은 비를 머금고 바다로 갑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바다보다 많지 않아요.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답니다. 곧 꽃을 피우고 꽃에 둘러싸여 나무도 행복해질 테니까요.”
그는 20년이나 쉬지 않고 일했다고 한다. 하지만 목표지향적인 삶은 결국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한다. 목표가 아닌 것은 모두 쓸모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에서 소중한 것들, 순간순간 경험하는 즐거움을 제거한다. 그렇게 빈틈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남는 것은 속이 텅 빈 껍질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반드시 증오로 나아간다. 도구적 이성이 목표와 삶을 분리시켜 자신을 괴롭힐 때 마음은 화를 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은유는 마음의 전체성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의 하나다. 은유는 은폐되고 왜곡된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마음의 전체성과 에너지를 회복한다. 느티나무와 시계를 통하여 그는 무의식 속에 억압된 절박한 목소리를 표현했다. 그리고 강의 은유를 통하여 그는 현상적인 분열에도 불구하고 내면에 존재하는 마음의 통일체를 보았다. 표면과 심연이 모두 하나의 강이며 고요함과 움직임이 강의 진실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경험함으로써, 그는 마음의 전체성을 회복하고 밝고 건강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다. 일도 다시 시작하고 가족과 모여 살게 되었다.
반년이 지난 후 그를 만났다. 다시 은유 스토리텔링을 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언덕 위의 느티나무 은유를 다시 말했다. 더 놀랍게도 그것은 예전의 느티나무가 아니었다. 속이 텅 빈 나무가 아니라 속이 꽉 찬 나무였다. 나무는 행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그늘 아래에서 놀다가 돌아간다. 그들이 떠나도 이젠 섭섭지 않다. 밤이 되면 홀로 남아 휴식을 즐긴다. 방해받지 않고 잠을 푹 자려고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오세요.”


명법 스님
조계종 교수아사리,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과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며 불교신행모임 ‘무빙템플’과 이야기 상담 연구단체 ‘은유와 마음’을 이끌고 있다.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뒤 운문승가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운문승가대학 회주 명성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서울대 불문과 졸업 후, 동 대학원 미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Smith College에서 박사후과정을 연수했다. 저서로 『미국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미학의 역사(공저)』,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한 권으로 보는 세계불교사(공저)』 등이 있고 다수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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