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자기 자신과 소통하고 있습니까?

2014-04-08     불광출판사

 


얼마 전 학술행사가 있어 가보았더니 학제간의 소통이 행사의 주제였다. 사람들 사이의 소통만 아니라 학문들 사이의 소통까지 논할 정도로 이 시대의 화두가 소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소통이라는 말이 많은 것은 그만큼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되는 인간에게 소통은 어쩌면 존재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우리를 갈라놓는 벽들 때문에, 현대인뿐만 아니라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소통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 것 같다.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되는 인간에게 소통은 어쩌면 존재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우리를 갈라놓는 벽들 때문에, 현대인뿐만 아니라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소통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 것 같다.



| 늘 외로웠던 한 사람

소통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대의 멘토들은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관용과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속삭인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타인을 지향할수록 자신은 더 공허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통을 위한 노력보다 차라리 자신에 대한 앎이 소통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 참가자들로부터 은유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씀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정의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소통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소통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 참가자 중에서 소통을 간절히 원한 분이 있었다. 그는 수년째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갈망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교제 범위는 매우 제한되어 있어서 가까운 동료 외에 만나는 사람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을 만나면 쉽게 피곤해져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아무도 다가올 수 없는 벼랑에 홀로 서 있는 낙락장송으로 은유했다. 그것은 숭고하고 멋있지만, 벼랑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소나무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들이 떠난 뒤 남는 서글픔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다.

이럴 경우 해결은 매우 간단하다. 그가 평지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게 되지 않아서 문제였다. 자신이 만든 은유를 바꾸는 것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반문할 수 있지만, 사실 은유는 마음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바꾸지 못한다. 마음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은유 자체에 명령을 내리기보다 우회해서 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래서 그에게 평지로 내려오라는 간단한 주문 대신, 나는 그 은유를 잘 이해하도록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는 소나무가 크다는 것 말고 자랑할 것이 없는데도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겸손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때로 아만심이 불쑥불쑥 치밀어 오른다고 고백했다. 소나무 주변에는 바위, 나무, 풀, 다람쥐, 새, 하늘, 물 등등 모든 것이 다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그는 늘 혼자였으며 새들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오천 년 동안 그 자리에서 외롭게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최근 부쩍 사랑받고 싶다는 느낌을 느끼지만 그럴수록 긴장해서 간단한 계산조차 안 된다고 했다. 참 딱한 노릇이었다. 그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의 감탄을 받는 데 있는데, 불행하게도 그러려면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면 안 되었다. 몇 차례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절벽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그에게는 절벽에서 내려오고 싶은 마음이 반, 그대로 있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그는 저 아래에서 사람들이 신명나게 풍악놀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면에서 주체할 수 없는 회한의 감정이 올라온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더 자세히 설명해주기를 요청했다.

“회색빛 속에 혼자 있는 느낌이에요. 풍악놀이 하는 장면을 굽어보고 있으면 흐뭇한데, 사람들은 나무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네요.” 다시 자신을 돌아보라고 했더니, 반응이 조금 달라졌다. “별 느낌이 없어요. 그냥 그대로인 것 같아요. 음, 이제는 사람들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계속 질문을 하면서 그에게 자신의 상태와 감정을 더 세밀하게 관찰하도록 했다. “언제 한스러운 느낌이 듭니까?” “지금은 잘 안 떠올라요. 풍악놀이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한스럽게 느껴진 것 같아요. 이제는 한스러운 감정과 제가 분리된 것 같아요.”

자신의 감정을 자세히 바라봄으로써 그것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곧 자신과 그 감정을 분리시켜 보게 되었다. 다시 상담을 이어나갔다. “오천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특별한 것은 없었어요. 그냥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어요.” “한 가지 일은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선생님은 위치를 바꾸지 않고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을 했잖습니까?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아! 그래요, 오천년 동안 ‘살고 있었네요.’ 그냥 있어도 되는데 왜 버둥거리며 억지로 살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고, 소통할 필요도 없었군요!”




| 은유를 통한 놀라운 변화

그는 자신이 굉장히 끈기가 있고 강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믿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장점을 지적하였더니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 것을 모두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던 태도를 버리고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강함이 다른 사람에게 자만심으로 보인 것이 그동안 소통하지 못한 원인이라고 하면서, 강함과 지혜로움이 겸비되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나는 다시 소나무가 오천년 동안 경험한 것을 생각해보도록 했다. 그는 잠깐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그동안 나 자신을 보기보다 대상들을 위주로 살아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만 신경을 썼어요.” 사람들에게 관심은 있었지만 앞만 보고 가느라고 주변 경치도, 사람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인이 자기에게도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의 슬픔과 회한은 없어지지 않았다. 감정을 설명하면서 그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했다.

그 감정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나무의 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곳은 텅 비어있었다. 수맥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한 어둠이 있었다. 나뭇잎은 아직 생기가 있었지만, 뿌리는 말라비틀어지고 흙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다시 표현하라고 했더니, 충격적이게도 죽은 나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에게 다시 한 번 소나무 내부를 살펴보도록 했다. 텅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번에는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니 넓고 시원한 느낌도 들고 기분도 좋아져요. 뿌리가 회색인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이상하게도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나는 그에게 그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권했다. “많은 빛들이 있어요. 따뜻하고 편안해요. 별이 많이 있어 혼자가 아닌 것 같아요. 함께 공존하지만 서로 떨어져 있기도 해요. 하지만 함께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동안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이 가상 체험을 통해 그는 애쓰지 않고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는 사물들이 있으니까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고 하면서 그곳이 정말 편하다고 했다. 소나무 바깥으로 나오라는 내 말에 저항할 정도로 그곳에 머물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가 소나무 밖으로 나오자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직전까지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밝고 화사한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절벽이 아니라 부드러운 흙이 깔려 있는 평지였다. 간간히 나무들도 보이고 저 멀리 푸른 잔디가 땅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점점 잔디가 나무쪽으로 확장되며 땅을 덮기 시작하더니 나무 밑까지 다 덮었다. 나무는 윤기가 흘렀고 새들이 날아오고 모든 생명이 모여들었다. 밝고 평화로운 들판이 펼쳐지고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조화로웠다. 그는 “좋아요, 정말 좋아요.”를 연발했다.

그는 영상이 저절로 눈앞에 펼쳐지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어떻게 하려고 의도하거나 암시를 준 것도 아니고 심지어 눈을 감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영상이 스스로 변해간 것이다. 은유 스토리텔링을 통해 이런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은 모두 눈앞에서 영상이 자동적으로 펼쳐지는 체험을 한다. 단지 은유를 통해 상상한 것에 불과한데 그토록 놀라운 결과를 가질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온 영상이기 때문이다. 순간의 심리적 변화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후에도 지속되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그것이 마음의 표면이 아니라 깊은 무의식에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일주일이 지난 후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모임에 가면 무의식적으로 앉을 자리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며칠 전에 갔던 소모임에서는 자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생각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편안했고 모임도 즐거웠다고 말했다.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감정을 벗어남으로써 그가 그토록 원하던 소통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나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서 물었다. “아들에게 혼낼 일이 있어서 야단을 쳤는데 마음이 시멘트 바닥처럼 평온했어요. 아이는 엄마가 예전처럼 야단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는데 저는 너무 편안했어요. 그래서 이상해요.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미소로 그의 질문에 답하면서 생각했다. 혼자서도 잘 지내고 다른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 것이 진짜 소통이 아닐까?





명법 스님

조계종 교수아사리,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와 홍익대에서 학생들에게 미학을 가르치기도 하며, 최근에는 불교영어도서관에서 ‘은유와 마음’ 템플스쿨을 진행 중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스미스 칼리지에서 박사후 과정을 연수했다. 저서로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미학의 역사(공저)』, 『세계불교사(공저)』 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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