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그늘] 산목련 그늘에서 / 이영

보라수 그늘

2007-06-21     이영

훈훈한 남풍 한 자락이 산비탈을 훑고 지나갔다. 어디선지 향긋한 꽃내음이 진동했다.
「야! 이 흐뜨러질 듯한 향기.」
나는 단번에 취해 버렸다. 발걸음은 어느새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산목련이었다. 갓 피어난 꽃은 난형의 잎이 보듬고 있었다. 함치르르 윤이 흐르는 은백색 꽃임. 코 속을 아리아리하게 만드는 짙은 향기. 그 꽃잎 속에서 문득 한 소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남의 걸 탐내면 못쓰는 거야.』
깡통한 치마에 낡은 「블라우스」를 걸친 소녀는, 말없이 내 뒤를 따라 오기만 했다.
『숨긴 곳이 어디지?』
『…….』
눈물이 솟는지 소녀는 훌쩍거리기까지 했다.
『괜찮아, 네가 정직하게 말한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니까.』
『…….』
소녀는 대답 대신 봄바람에 살갗이 튼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어디쯤이냐?』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내처 산길을 오르며 물었다. 그러나, 그는 묵묵부답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소녀의 짝이 새로 사온 색연필을 갑째로 도난당한 일, 이번에도 십중팔구 소녀의 짓이 틀림없다는 급우들의 시선, 하찮은 일에도 목줄기에 벌건 핏대 세우기를 좋아하는 소녀의 짝 어머니에 대한 심적 부담감, 휴식 시간에 소녀가 당황한 얼굴로 동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는 어느 아이의 귀뜸. 나의 설득에 결국은 고백해버린 소녀.
『왜? 이 근방이니?』
산목련 꽃그늘 밑에서 발걸음을 멈춘 소녀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쭈그리고 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나무 밑을 파기 시작했다. 울음을 삼키느라 몇 번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의 그런 동작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너무나 잔인한 질책을 가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다시는 안 그럴께요.』
딴청을 부리고 서 있는 나에게 소녀가 색연필갑을 내밀었다. 떨고 있는 그의 황토 묻은 두 손은 차라리 가난의 누더기처럼 보였다.
낳은 후 첫이레를 넘기지 못하고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등졌다. 그 바람에 아버지의 동냥젖으로 자랐다고 했다. 안식이요. 위안이며 영원한 고향인 어머니의 품을 모른 채 자라난 것이었다. 그는 늘 모성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애정 결핍증 환자나 다름없었다.
이따금 발생하는 도난 사건에는 꼭 소녀가 개입되었다. 그는 그 비뚤어진 행동거지로 그의 갈증 난 목을 축이려 했다.
가장 환경 또한 아늑하지 못한 편이어서 그는 그늘에서 자주 울곤 했었다. 수「딜라피아」처럼 그녀를 입속에 품고 있던 칠순 부친의 운명은 소녀에겐 날벼락같은 충격이었다. 그 후로 소녀는 집을 훅 뛰쳐나가고 말았다.
「아직 날개짓이 서투른 한 마리의 어린 새.」
나는 가련한 소녀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황토 투성이던 그녀의 두 손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이제 한 자락 비만 더 내려준다면 동산은 햇잎 냄새로 싱그러우리. 취나물 새싹이 포실포실한 황조를 비집고서 고개를 내밀겠지. 꿩, 꾸엉, 꾀꼴, 꾀꼴. 퉁명스러운 꿩드릐 울음 사이로 황금빛 꾀꼬리의 낭낭한 노랫소리가 엇짜여 퍼지겠지. 나는 심호흡을 했다. 산목련의 향기가 가슴을 파고 들었다. 게딱지같이 내려다보이는 집들은 쪽빛 강물을 이고 있었다. 문득 동네 고샅을 달려오는 집배원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소식이 있겠지.」
나는 기다려지는 소녀의 소식에 가슴을 설레였다.
나는 허둥지둥 산길을 내렸다. 소녀의 찬란한 봄은 언제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