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그늘] 아내의 생일 / 이병세

보리수 그늘

2007-06-21     이병세

 무심코 달력을 쳐다보다 23이라는 숫자에 시선이 멈추어졌다. 그 숫자 위에 별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잠시 멍해있다가 「아하, 이 날은 아내의 생일이다. 오늘이 22일 내일이다.」 아내는 출산을 위해 본가에 가 있다가 아무 통증도 없고 출산 예정일은 앞으로 며칠 후라며, 내 식사가 걱정된다고 옆에서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그 큰 몸집을 이끌고 다시 부산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생일에 가장 의미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남편일테니까 내심으로는 자기 생일을 나와 함께 갖고 싶었던 것이다.
 23일 아침, 나는 애써 생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퇴근시에 아내가 감격해 하길 바라는 작은 소망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위 동료들에게 물어보기도 쑥스럽고 해서 혼자 행복한 고민만 하고 있었다. 퇴근하면서도 별 생각없이 학교문을 나섰다. 선물 가게를 기웃거리다 주위의 꽃가게가 눈에 띄었다. 「아하, 꽃이다 꽃, 큰돈 들이지 않고 아내를 기품있게 하고 나 자신도 의기양양해 할 수 있는 좋은 것이다.」 자신있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꽃을 받아들고 기쁨을 숨기지 못한 아내를 머리 속에 그리면서 소박하면서 기품이 있다고 생각되는 백합을 다섯 송이 샀다. 발걸음도 가볍게 백합을 들고 나와 버스를 기다리면서 만원 버스에 백합이 상하면 어쩌나 하면서 불안과 흥분을 번갈아 삼키고 있었다.
 그때 마침 작년에 내가 가르쳤던 3학년 학생이 버스를 기다리다가 꽃을 든 나를 보고는 인사를 하면서 왠 꽃이냐고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그 학생과는 평소 조금 친했던터라 나는 숨기지 않고 아내의 생일 선물이라고 귓속말로 고백해버렸다. 순간 나는 자신의 어설픈 솔직함에 당혹해 하면서 귀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아 내가 다소 들떠 있었구나.」
 차는 유난히 오지 않아 나는 제법 서 있어야 했는데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집중적인 시선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날따라 모처럼 입은 검은색 양복, 흰 와이셔츠, 백합꽃이 초저녁의 어둑살과 어우러져 엮어내는 그림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아, 이건 굉장한 성공이다.」
 만원 버스 속에서 꽃을 감싸느라 꽤 고생하면서 버스 타기 전에 얻었던 설레임을 간직한 채 현관문을 열었다. 꽃을 든 나의 모습을 보는 아내의 얼굴을 큰 기쁨을 천연덕스럽게 감추고 있었다. 아내는 웬 꽃이냐고 물었다. 아니 이게 웬 일인가. 순간 나는 그냥 꽃이 좋아 사왔을 뿐이라고 능청스럽게 내뱉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스쳐갔다. 한 노년기의 남자가 아내의 생일날, 아내가 좋아하는 붉은 장미를 온갖 노력을 다해 구했으나 그 장미를 집안 구석에다 놓아두고는 아내가 웬 꽃이냐고 물었을 때는 직장의 부하 직원 아가씨가 선물로 준 것이라고 말해버렸던 이야기.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내는 기뻐했고 그날 저녁은 아내에게 그래도 꽤 자신있는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