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팔상전 <팔상도 사문유관상>

싯다르타 태자 세상을 보다!

2014-03-25     강소연
사람에게는 늙음(老) 앓음(病) 죽음(死) 있어 자기 스스로도 즐겨할 것 없겠거늘
어찌 하물며 남에 대해 물들어 집착하는 마음을 내랴.
- 『붓다차리타』 「애욕을 떠나다(離欲品)」 중에서
 
싯다르타 태자는 어릴 때부터 조금 남달랐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어릴 때의 순수한 시각을 버리고, 교육이나 개념 또는 사회적 가치에 눈 가려져 그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며 삽니다. 하지만 태자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웬만한 헛짓거리에는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특히 ‘생명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작용’ 그리고 그 ‘존재의 법칙’이란, 정말 의아하고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것인가?’
 

| ‘생로병사’의 화두에 걸리다
 
태자는 이같은 의문을 품고 자주 골똘한 사유에 빠지곤 했습니다. 이제 점차 성인이 되어가는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픈 아버지 정반왕은, 왠지 출가할 것만 같은 아들을 보고, 주의를 돌리려 안간힘을 씁니다. 청년기의 태자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질 법한 사냥·연회·아름다운 여인 등 다양한 흥밋거리를 제공하지만, 태자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태자는,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인지, 일찌감치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화두에 걸립니다. 석가모니 일대기 중에 태자 시절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대목을 보면, 아버지가 아무리 세간 일에 관심을 갖게 하려 온갖 애를 써도, 아들은 애늙은이 같은 답변만 합니다. 일단 한번 태어나면 순차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노-병-사’라는 정해진 쳇바퀴에 어차피 갇힌 운명인데, 이 허망한 몸뚱이를 믿고 도대체 무얼 탐착할 게 있냐는 겁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우환
그 고통은 참으로 두려운 것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썩기 마련이거늘
그런데도 거기서 즐거움을 좇는구나
늙음 병듦 죽음을 사유하면
그 갑자기 들이닥침 기약할 수 없으니
밤에도 낮에도 잠자기를 잊었거니
무슨 경황에 오욕五欲을 익히랴

우리가 아등바등 욕심내며 탐착하는 근거가 고작 이 믿지 못할 몸뚱이라니. 한편 아버지는 애가 탔습니다. 아버지가 볼 때 태자의 시급한 사명은 왕위를 계승하고 나라를 운영하는 일이었으나, 태자는 그런 세간의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태자 역시 애가 탔습니다. 태자에게는 절체절명의 문제, ‘생사生死’라는 화두를 풀기 전까지는 무얼 하든 무얼 먹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두 사람, 서로 참 야속했겠지요.
 
| 이 사람만 그러하냐? 모두가 다 그러하냐?
 
석가모니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폭의 그림으로 그린 <팔상도八相圖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에는, 싯다르타 태자가 이러한 화두에 걸리는 대목이 상세하게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도판01) 사문유관상은 팔상도의 제3번째 화폭으로, 법주사 팔상전에는 사문유관상과 유성출가상이 판 화면에 세트로 그려져 걸려있습니다.(도판02) 태자는 어느 날, 왕궁 밖으로 나들이를 나가게 됩니다. 궁궐의 동서남북 사방의 문[四門]으로 차례차례 나가 세상을 보게 되지요. 태자가 동쪽 문으로 나왔을 때 그는 ‘늙은 사람’을 목격하게 됩니다(도판04). 머리카락은 희고 눈은 짓무르고 코에서는 물이 흐르고 허리는 굽고 몸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숨을 헐떡입니다. 시들어가는 생명의 모습입니다.

태자: 이는 어떠한 사람이오?
시종: 노인이라 합니다.
태자: 어떤 이를 노인이라 하는가?
시종: 사람은 태어나 젖먹이·어린아이·소년을 지나면서 성숙기에 이른 다음에는 형상이 변하고 빛깔이 쇠퇴하기 시작해 소화도 안 되고 기력이 떨어져 고통이 극심하고 목숨이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이를 늙었다 합니다.
태자: 이 사람만 그러한 것이냐? 아니면 모두가 다 그러한 것이냐?
시종: 예, 모두가 마땅히 다 그렇게 됩니다.
- 『석가보釋迦譜』

다음으로 남쪽 문으로 행차할 때, 태자는 ‘병든 사람’을 봅니다.(도판05) 서쪽 문으로 나갔을 때는 ‘죽은 사람’을 운반해가는 상여를 봅니다.(도판06) “세간 사람들은 귀천에 상관없이 모두 다 마땅히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이라는 시종의 대답에 태자는 몹시 떨리고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울고 웃고 즐기고 집착하는 와중에도, 생명은 이러한 자기의 속성을 어김없이 진행해 나간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고 괴로워합니다.
 
| 존재의 한계를 넘기 위한 위대한 도전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고 합니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귀에 박히도록 들어 그 진정한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오히려 무디어져 있을 정도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 역시 ‘제행무상’이니,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은 적어도 필사적으로라도 ‘무상함’을 믿어야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위해 ‘무상’을 다시 상세하게 풀어 주셨습니다. 무상은 ‘세 가지 유위법有爲法’으로 진행됩니다. 첫째 - 생기는 것: 나서 자라서 형체를 이루며 감각 기관을 갖는 것, 둘째 - 변하는 것: 이는 빠지고 머리는 희어지고 기운은 다하여 나이는 많아 몸이 무너지는 것, 셋째 - 없어지는 것: 모든 감각 기관이 무너지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 사실 인간의 육안으로는 없어지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더 깊은 차원의 눈으로 보면 계속 변화해 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겠지요.
 
‘현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일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는 연기緣起의 법칙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생각과 번뇌 망상도 대상과 대상이 만나, 요인과 요인이 만나, 경계와 경계가 부딪혀 생겨나는 것이 자명합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성장하고 변하여 없어진다’는 기정 선고를 받은 몸입니다. 모든 생명체의 존재 법칙이 그러하니까요. 태자는 세 개의 성문으로 나가서 목격하게 된, ‘노-병-사의 고통’에 대해 본격적인 사유와 명상을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북쪽 문으로 행차했을 때,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수행하는 스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도판08, 08-1) “출가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까” 태자가 묻습니다. “출가 공덕이라는 것은 말로다 여쭐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무상하여 모든 것이 불안지상이라, 하나도 취할 것이 없습니다. 산중에서 수행하여 정각을 이뤄 일체중생의 생로병사를 해탈하고 삼계고해를 뛰어넘어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되는 미묘 법문을 무어라 형언하여 여쭈오리까”라고 스님은 말하고 공중으로 솟아올라 사라져버렸답니다. 태자는 스님이 사라진 아쉬움을 이기지 못해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어둠 속을 오래도록 방황했다 합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스님을 만난 뒤, 자신의 갈길은 이것밖에는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당시 태자의 꽃다운 나이 19세, ‘지금이야말로 내가 출가할 때다’라고 다짐했지만, 그의 출가는 10년이나 늦어지고 맙니다.(다음 호에 계속)
 
 
강소연
불교미술사학자. 홍익대학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본 교토대학에서 ‘일본소재 조선전기 왕실 불교회화’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해외에 유출된 우리 국보급 불교회화 문화재를 약 7년 간 현지 조사하여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동국대 불교학과 연구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조선일보 (주)디지틀조선일보 기자를 역임했으며, 일본 미술문화계 최고학술상 ‘국화상’ 장려상・한국 불교소장학자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