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나만의 길

2014-03-21     원영 스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오로지 일념으로 역할에 더 충실한 셈이다.
 
 
| 커리어 비구니의 삶과 수행
 
요샛말로 하자면, 21세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커리어 비구니’가 나일지도 모른다. 강의와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으며, 매일 아침이면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송도 함께 진행한다. 수많은 불자들이 내 목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법음을 듣고, 자신의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하루를 열어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여 기쁘다. 글 쓰고 강의하고 방송하는 일들이 전부 수행의 일환이라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수행승’이라 일컬을 만하기 때문이다.
 
한편, 내 주위의 도반 스님들은 대부분 선방에서 정진한다. 하안거·동안거를 지켜가며 마음 공부에 여념이 없다. 오로지 깨달음을 향한 일념으로 열심히들 정진하고 있으니 한국불교의 미래가 이들에게 달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점점 소원해지고 있다. 바깥활동을 많이 하는 나와 좌선만을 주장하는 그들은 서로 살아가는 모양새가 다르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해제철이 되어 만나보면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나마 도반이기에 적당한 선에서 예의를 갖추고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해준다. 나아가 수행 이외의 소소한 이야기들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며 끈끈한 정을 이어간다. 수행법은 각자 달라도 우리에게는 힘든 시절을 함께 보냈다고 하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상대에 대한 이해와 포용 또한 훨씬 수월하다.
 
절의 주지를 살거나 염불 및 의식만을 집전하며 살아가고 있는 도반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의 활동영역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살아가고 있겠거니 믿어준다. 현대 한국불교 현장에서 머리 깎고 수행승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과의 약속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래야 흔들림 없이 나름대로의 수행과 원력으로 오늘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이후 45년간 쉼 없이 북인도 일대를 다니시며 사람들을 교화하셨다. 서쪽으로는 수라세나국에서 동쪽으로는 앙가국에 이르기까지 무려 2천km에 해당하는 거리를 걷고 또 걸으셨다. 그 사이 수많은 불제자를 이끌어 메마른 삶에 감로수와도 같은 진리의 말씀을 전해 주셨고, 교단은 북인도 최대의 종교로 성장했다. 그리고 오직 수행에만 몰두하는 출가자의 삶을 세상 사람들이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자리매김을 확고히 해주신 덕에 지금도 우리 같은 출가자들이 살아갈 만한 게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수행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부분일 것이다. 알다시피 수행 가운데 대표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좌선수행’이다. 좌선수행은 고대 인도사회에서부터 이미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수행 방식의 하나였다. 일찍부터 있었던 탓에 이것이 어쩌면 정통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좌선수행법은 오랜 역사를 거쳐 때로는 ‘위빠사나’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묵조선’, ‘간화선’이라는 이름으로 저 나름대로의 정통성을 외치며 후대로 전승되어왔다. 나도 불교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한때 선원에 있었다. 그곳에서 안거를 보내고, 절실하게 화두를 들며 좌선수행 한답시고 애쓰며 살았다. 그때는 그것밖에 몰랐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승가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여타의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우리는 보통 좌선수행을 ‘수행’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써 부를 때가 많다. 또한 그것을 최상의 수행으로서 높이 평가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수행의 한 방법일 뿐이지, 좌선만이 수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염불수행도 수행이요, 절수행도 수행이며, 사경수행도 수행이다. 더욱이 나처럼 내가 배우고 익힌 불교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노력하는 것 또한 수행이라고 나는 당당히 말한다. 특히나 내게 있어선 시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나만의 수행이 불교학 연구와 강의이다. 더불어 방송과 글쓰기가 세상을 향한 최고의 회향방법이라 말함직하다.
 
물론 달마선사에게서 법을 구하기 위해 팔을 잘라 내놓았다는 선종의 2조이신 혜가 스님처럼 몸 바쳐 구도하는 열정은 내게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간혹 소신燒身 공양으로 손가락을 바친 스님들을 보면서 ‘어디서 저런 열정과 구도의 힘이 나올까?’라며 그분들의 신심을 부러워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소아小我를 버리고 희생할 양이라면, 기왕에 자신의 구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이 한 몸 내놓는다면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지금은 더 강하게 든다.
 
| 나는 모두와 함께 하리라
 
예전에 ‘서편제’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에 보면, 판소리를 팽개치고 번화한 세상 속으로 도망간 동호 때문에 불안해진 양아버지 유봉이 나쁜 약재를 조제해 딸 송화의 눈을 멀게 해서 곁에 잡아둔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봉은 “좋은 소리를 하려면 소리를 하는 사람의 가슴에 말 못할 한을 심어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극약처방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데…. ‘그깟 소리가 뭐라고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눈을 멀게 한단 말인가’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영화는 비극적 전개과정을 통해 드디어 우리의 한恨을 소리에 담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의 중도관’을 생각해보자. 부처님의 수행에는 극단적 수행방법에 대한 거부가 명확하게 담겨있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욕망에 따라 쾌락에 탐닉하는 것으로, 열악하고 야비하며 범부가 행하는 것이며 덧없고 이익이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에 탐닉하는 것으로, 괴롭고 이익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에 가까이 가지 않고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이 되고 지혜가 되어 열반으로 이끈다.
- 『상응부경전』 중에서
 
고행시절, 부처님은 수식관數息觀 명상과 함께 단식斷食을 했다. 죽기 살기로 자신의 육체를 괴롭혀가며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무려 6년 동안이나 이러한 고행은 계속되었다. 결국 이러한 고행이 해탈하는 데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아시고, 부처님은 이것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는 고행에 의해 극도로 쇠약해지고 지저분해진 몸을 강물에 깨끗이 씻은 뒤, 수자타가 준 우유죽을 먹고 심신을 회복한다. 여기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자신만의 수행방법을 생각해낸다. 이것이 바로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다.
 
최고의 소리를 얻기 위해 장애를 주고 한을 품게 한다는 것은 일견 일리는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기에는 반감이 적지 않다. 불교수행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 있다고 본다. 자신의 해탈만을 움켜쥐기 위해 행하는 극단적 고행은 때때로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행자의 지나친 풍요로움 또한 그냥 보고 지나치기엔 힘든 구석이 있다. 윤동주 시인이 ‘서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수행자의 삶은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수행자도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맹자가 말한 “하늘과 사람에 대해서 부끄럼이 없는 마음”도 마찬가지일 터, 수행자 또한 흙먼지 뒤집어쓰고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이기에 그런 것이다.
 
수행, 여기엔 각자가 생각하는 나만의 길이 있다. 하는 일이 세속과 출가의 경계선쯤 서있는 나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부처님 당시의 출가제자들이 했던 수행방법과 지금의 출가자들이 행하는 수행방법이 다르다 해도 나만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테다. 공통점이 있다면 고금을 막론하고 행해져온 불교수행 모두가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이라는 점일 것이다. 어둠으로부터 밝은 곳으로 나오는 수행, 나는 오늘도 모두와 함께 하리라 다짐한다.
 
 
원영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아사리(계율과 불교윤리 분야). 운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선원 안거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2008년 「대승계와 남산율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승계의 세계』, 『계율, 꽃과 가시』 등이 있다. 현재 BBS불교방송 ‘아침풍경’을 진행하고 있으며, 중앙승가대학교 외래교수로서 강의와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