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기복신앙을 버릴 것인가-기복신앙의 바른길

권두언

2007-06-20     광덕스님

우리 불교계에서 기복신앙에 대해선오래 전부터 말이 많은 듯싶다. 불교의 정상화, 그리고 교단적 발전을 위해서는 기복신앙에서 탈피하여야 한다고들 말한다. 불교가 잘못되어 가는 뿌리에 기복신앙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불자들 사이에서 불교의 믿음의 정도를 말하다 보면 <기복신앙 정도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런때는 대개 겸허한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왜들 이렇게 기복신앙을 타기하려 하고 떳떳치 못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지 기도하고 구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거룩한 가르침을 믿고 배운다면 마땅히 거룩하고 높은 뜻을 지니고 그를 향한 행이 따라야 할 것이다. 밝은 사회에 이바지 한다던가, 이웃을 돕는다든가, 아니면 스스로 청정행을 닦는다든가 하는 것이 있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는데 그 원인이 있는상 싶다.

대개 종교에서 기원(祈願)을 가지고 그 속에 일신의 행복을 담고 믿음을 가꾸어 간다는 것을 일양 탓할 것만은 아니라 본다.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 믿고 행하는 데에는 여러 길이 있지만, 그 안에 자기 일신의 문제는 배제된다는 논리가 선재(先在) 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 속에서 세계의 평화도 진리도 생각할 수 있으며, 세계와 진리 속에서 개인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에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오늘날 기복신앙을 타기하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 것같다.

첫째는 안이한 일신 소망을 기원하는 태도일 것이다. 수행이 따르지 않고 소망의 안이한 성취를 추구하는 심정이 문제다. 둘째는 소망의 내용이 일신위주의 것이어서 욕망추구를 위한 신앙 내용이 떳떳치 못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교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이 은헤만을 구하는 태도가 미신적이라는 것이다. 넷째는 기원을 이루게하는 원인행을 경시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자세가 문제다. 끝으로 거룩한 가르침 앞에 나와서 거룩한 원을 세워 수행하지는 이니하고 일신의 행복을 구한다는 것이 종교를 믿는다고 하기 어려운 뻔뻔스런 점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불교 신앙에 있어서는 마땅히 큰 원을 세워 정불국토의 실현이라던가,자타가 함께 불토를 이룬다던가 하는 근본 원을 바탕으로 하고,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여러 원이 있을 수 있다.그러나 그 속에 일신의 행복과 관계된 기원이 있다하여, 그것을 악이라 할 수는 없다. 오늘날 기복신앙에 대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근본적인 큰 서원이 없다단가, 기도 성취의 원리를 알지 못하는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복신앙 자체가 악이 아니라 마땅히 바르게 인도되고, 바른 기복신앙이 권장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기복신앙에 대하여 몇 가지 권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행복을 기원하는 근본자세의 문제다. 즉 궁극가치이며 필경 목표인 성불, 즉 정토실현을 근본 원으로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근본 원이 없는 일신상의 행복요건만을 구하는 것이 문제다. 둘째는 회향 정신이다. 적든, 크든 자기가 지은 모든 공덕이 일체중생의 공덕이 되어 모두 함께 성불하였으면 하는 염원이 필요하다. 셋째는 대정진이다. 염불을 하든, 독경을 하든, 보살행도를 실천하든, 순수함 마음으로 끊임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넷째는 기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생각과 생활을 밝은 믿음의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어두운 마음, 거치른 마음,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침울한 마음으로는 결코 기원을 이룰 수 없으며 기도자세의 자세가 아니다. 다섯째는 부처님의 자비, 부처님의 위덕이 현재 이미 우리 모두에게 완전하다는 믿음이다. 존재하는 것은 진리 뿐이며 대자대비 위신력 뿐인 것이다. 그 밖의 것은 있는듯 보여도 실로는 없는 것이다. 미망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끊임없이 감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끝으로 소망의 내용이 타인을 해롭게 하거나 자신의 향상을 저해하는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이와같은 자세로 기도하고 정진한다면 그 소망이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 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신의 행복을 기원해서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못된다. 기도는 결코 타락신앙이 아닌 것이다. 이와같은 기원을 통해서 자신과 함께 이웃과 사회가 밝아지며, 향상되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법을 모르고, 기도 성취의 원리를 모르는 데 있다 하겠다. 진리만이 홀로 존재하고 부처님의 대자비 위신력만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진실한 모습이며 존재의 실상이라는 점을 모르는 데 있는 것이다. 오직 진리만이 홀로이 존재하는 마당에 무엇이 대립될 자가 있으며 미워하고 다투고, 혹은 얻고 잃을 것이 있을까. 일체가 동체라는 인식에서 자비보살의 행이 나오게 되며 평화와 존중과 협동이 나오게 마련이다. 동시에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것은 진리의 위력에서 되는 것이며 마음에 있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끊임없이 진실과 평화와 우정과 활기가 넘치는 창조적 의지가 넘쳐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기도 성취의 근본원리를 생각해 볼 때, 일신의 안녕이나 조화로운 환경조건의 형성이나 자타의 공동적 향상을 도모하고자 하는 원, 말을 바꾸면 진실한 원은 모두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진리 자체가 이미 그런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리를 긍정하고, 그 장애 요인을 제거했을 때 염하는 바는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기복이며 그 성취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경전을 보아도 「이 법문을 받아지니며, 독송하며, 남을 위하여 설해주면 얻는 바 공덕이 무량하다.」 말씀이 있다.

보현행원품만 보더라도 이런 말씀이 보인다. 「이 대원을 읽고 외우면 온갖 업이 소멸되며 일체 병고 소멸하며 이 세간을 지냄에 조금도 장애가 없다. 이 사람은 인간과 천상사람이 공경하며 훌륭한 사람 몸을 받아서 보현보살의 공덕을 원만히 하고 32대 장부상이 구족할 것이며…, 이 사람이 임종할 찰나에 이 원왕만은 떠나지 아니하여 항상 앞길을 인도하여 극락세계의 왕생하고…, 멀지 않아 보리도량에 앉아 마군들은 항복받고, 정각을 성취한다.」 이와같은 부처님 말씀은 진실의 설파이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은 불자로서 당연하지 않겠는가. 참되게 믿고, 힘써 닦으며, 빛나는 과보를 누리는 것을 조금도 탓할 것이 못되는 것이다. 경전에 보이는 수행공덕론이 사실의 설파인 바에야 마땅히 그와같이 원하고, 그와같이 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살펴볼 때 오늘날 부끄러운 현상으로 여겨지는 기복신앙을 탓할 것이 아니라, 대원을 세워 바른 길을 닦아가는 입문으로 삼아서 힘써 닦아가 필경 큰 깨달음 이루도록 권장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설사 이기적 욕망으로 염불.독경하더라도 일심 염송하노라면 어느덧 망념이 사라지고 청정심이 드러나 지혜의 눈이 열리고 정진력이 증장됨에서랴. 기복신앙을 배격하기에 앞서 바르게 인도하고,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것이 넓으신 불보살님 뜻에 가까워지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거듭 바른 기복신앙, 기복수행을 권장하여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