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느티나무, 당신은 구렁이

2014-03-21     명법 스님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나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할 때, 듣기 좋은 칭찬이나 비위를 맞추는 소리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지만 친구는 물론이고 부모, 배우자, 자식조차 감히 돌직구를 던지지 못한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그들로부터 솔직하고 진실한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다.그럴 때 은유는 서로 감정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나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이다.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 참가자들도 자신을 은유해보라는 과제를 받으면,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그들의 대답을 내게 이야기해주곤 한다.

 

| “당신은 말이야, 주인에게 달려드는 진돗개야.”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에 참가한 참가자 중 중년 여성 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은유를 만들어보라는 숙제를 받고서 식구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자신이 무엇과 닮았는지 물어보았다. 친한 동생과 남편, 아들에게 솔직한 답을 부탁했는데, 3일이 지난 후 친한 동생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언니는 나의 진정한 정신과 주치의야. 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으니까. 언니가 없었으면 외롭고 힘들었을 거야.”

그 대답이 진실한 것인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고마운 답장이었다.결혼해서 함께 사는 아들은 일주일 후에나 대답해주겠다고 뜸을 들였다. 그에 반해 남편이 대답하는 데에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당신은 말이야, 주인에게 달려드는 진돗개야.”

솔직한 대답이었지만, 이야기를 전하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님, 주인에게 달려들면 그게 미친 진돗개지 뭐겠어요? 립 서비스죠. 사실 제가 좀 앙앙거리긴 해요.”

그러면 그녀는 자신을 무엇에 비유했을까?

“저는 겨울바람이 거세게 부는 넓은 벌판에서 의지할 곳이 없이 혼자 서 있는 느티나무예요. 잎도 다 떨어지고 도움을 받을 곳도 없이 혼자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고 있어요. 다행히 지금은 느티나무도 건강해지고 바람도 잦아들어 편안해졌어요. 주변에 작은 나무들은 느티나무가 바람을 막아준 덕분에 예쁘게 자라고 있네요. 주위에 볼거리도 생기고 황폐하지 않아 좋아요. 그동안 많이 버거웠는데 지금은 편안해요.”

 

| 오진이 가져온 삶의 변화

다음날 그녀는 엉뚱하게도 지금의 모습이 고양이와 같다고 했다.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혼자서 뒹굴며 잘 노는 고양이라고 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도 좋다고 했다. 그에게 고양이와 느티나무가 다른 점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느티나무와 고양이는 혼자 있을 때 달라요. 느티나무로 있을 때에는 어떤 것을 결정할 때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혼자 결정해야만 했어요. 그 결과도 혼자 책임져야 했어요. 지금은 어떤 결정이나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아요. 혼자서도 잘 놀아요. 방에 필요한 것이 다 있으니까요. 혹시 필요한 것 중에 없는 게 있어도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그냥 나른하게 게으르게 이대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머지않아 그걸 못하게 될 상황이 올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직장을 다니는 며느리가 출산을 하면 손주를 맡아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려면 지금 배우고 있는 불교공부, 경기민요, 고전무용을 포기해야만 한다. 뒤늦게 배우는 것들이지만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터라 그 모든 것을 그만 두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손주를 돌보는 일은 일종의 속죄였다. 아들이 7살 때부터 군대 갈 때까지 장사를 했기 때문에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저 혼자 자란 아들을 위해 이번만큼은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일주일 후에 들려준 아들의 대답은 “묘목을 받쳐주는 버팀목”이었다. 그것도 은행나무 묘목을 받쳐주는 버팀목이었는데,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한 그녀는 아들의 대답에 무척 흐뭇해했다.

몇 주가 흐른 뒤 그녀는 자신이 암환자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암으로 두 번 입원했는데, 첫 번째는 오진이었지만 두 번째는 진짜였다. 하지만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가 더 암담하고 막막했다고 한다. 은행나무 잎이 파랄 때 입원했는데 그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할 때까지 병명을 모른 채 검사 결과만 기다리고만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내가 없어도 아이는 저 은행나무에 파란 이파리가 달린 모습을 볼까, 계절은 계속 변할까’하는 생각이 들어 밥도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만약 교통사고로 쓰러졌다면 아들에게 아무말도 못하고 죽었을 텐데 암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를 다니는 아들에게 말을 해줄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니 암이라는 사실이 너무 감사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장차 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할 때를 위해 편지 쓸 결심을 했다.나중에 오진이었음이 밝혀져서 퇴원하게 되었지만, 그 일은 그녀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래서 두 번째 암 진단을 받았을 때에는 진짜 암이었지만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모두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죽음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넓어졌다. “지구도 계속해서 돌고 남편도 아이도 그대로 산다. 뭘 더 바라? 모든 것을 놔야지.”

 

| 느티나무 옆에는 늘 구렁이가 있었네

그 후 그녀는 식구들에게 많이 너그러워졌다. 아프고 나니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자 말도 부드러워지고 친한 동생이 정신과 주치의라고 할 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성공적으로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상담 당시까지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아무도 암환자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밝고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남편에 대해서는 아직 불만이 남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병약해서 짜증이 많았던 그녀는 결혼 후 너그러운 남편 덕분에 많이 변했지만, 장사를 거들어주지 않는 남편 때문에 화도 많이 냈다. 그때는 뭐라고 퍼부어도 대꾸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가 화를 더 돋웠는데, 이제는 남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초탈하게 되었다고 했다.

남편의 대답에 적잖이 실망하는 그녀를 위해 나는 진돗개라는 은유가 나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해주었다. 진돗개가 주인을 배반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내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라고 했더니 조금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했다.

“하긴 집에서 기르는 개도 자꾸 귀찮게 하면 물지요. 그러면 우리 둘 다 진돗개일까요?”

남편에게 덤비지 않으려면 비위를 잘 맞추어 주어야 하는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아 속상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자신의 성격이 강해 그냥 넘어가지 못한 점을 인정했다. 나는 그녀에 게 남편의 은유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는 남편을 미동도 하지 않고 잠만 자는 구렁이 같다고 하면서 남편을 움직이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며칠 뒤 남편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중 우연히 뱀이 나오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마침 잘됐다’ 생각하며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이 뱀이라면 어떤 뱀일까?” “구렁이야. 남에게 내 속을 안 보여줘서.” “구렁이는 자기 부인에게도 말하지 않아?” “아내에게는 조금씩 말한 것 같아.”

놀라운 일치였다. 서로에게 무심한 듯했던 이 부부가 상대방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구렁이라는 은유가 부부의 변화를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된 것도 놀라웠다. 그 출발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잘 훈련시키면 코브라도 아나콘다도 춤을 춘다는 나의 이야기에 그동안 남편이 움직이지 않으면 구렁이 다루듯 발로 뻥 찼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앞으로 구렁이를 내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구렁이가 움직이는 상황을 만들어보겠다고 약속했다.

남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그녀는 몇 해 전의 일을 기억해냈다.

어느 해 김장을 하고 나서 자다가 앓는 소리를 한 것 같은데, 깨어보니 남편이 자신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게 걱정이 되어 남편을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남편은 자기에게 아프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투정했다고 했다. 남편으로 여기지 않아서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남편의 불만을 기억한 뒤, 그녀는 비로소 그동안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기만의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느티나무 옆에 구렁이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에 참가한 후부터 그녀는 남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단어의 구사부터 달라지고 노후에 할 일도 같이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했단다. 그동안 남편에게 요구한 것이 많았지만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남편만 변화하라고 한 것을 반성한 다음부터는, 남편을 더 조심스럽게 대하고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자신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은유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확인함으로써 이 부부에게도 대화와 소통의 기초가 마련된 셈이다.

 

명법 스님

조계종 교수아사리,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와 홍익대에서 학생들에게 미학을 가르치기도 하며, 최근에는 불교 영어도서관에서 ‘은유와 마음’ 템플스쿨을 진행 중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스미스 칼리지에서 박사후 과정을 연수했다. 저서로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미학의 역사(공저)』, 『세계불교사(공저)』 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