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종처럼 울림이 있는 삶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원광식

2014-02-12     불광출판사
옛 종처럼 울림이 있는 삶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원광식




1974년 사부대중 500명과 함께
범어사 범종 불사 원만회향을
기원하는 법회에서,
삭발염의하고 기도하는
원광식 주철장.

고즈넉한 산사의 범종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아련해진다. 은은하고도 청아한 깊은 울림이 긴 여운을 남긴다. 한국 종은 신라 이후 세계 최고의 종소리를 만들어냈다. 조선 중엽 이후 전통주조법의 맥이 끊겼지만, 다시 현대에 복원되어 종의 명가를 이어가고 있다. 바로 이 사람, 원광식(71) 주철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자는 물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그가 만든 범종 소리를 듣게 된다. 매년 12월 31일 자정에 33번 울리는 보신각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평생 만든 종은 7,000여 개에 이르며, 우리나라 종의 70%는 그의 손을 거쳐 빚어진 것이다.




상원사 동종(국보 제 36호) 복제 작품

| 세상을 잃을 것인가, 가질 것인가
원광식 선생과 종의 인연은 남다를 게 없다. 22살이던 1963년 군 제대 후 할 일을 찾다, 마침 8촌 형 원국진 씨가 운영하던 성종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 연배의 8촌 형은 자식이 없어서인지, 내심 그를 후계자로 점찍은 듯 일을 혹독하게 시켰다. 종을 잘 만들더라도 연장 정리를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일을 대할 때 작품을 만든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과 연장을 소중히 다룰 것을 늘 되풀이하고 강조했다. 그러한 가르침이 자양분이 되어 종 만드는 솜씨는 더욱 탄탄해졌다. 기술적으로도 발전을 거듭해 학교 종과 교회 종만 만들다가 범종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금고

그렇게 일로써 인정받고 가정도 꾸려 일상의 행복을 꾸려가던 어느 날, 인생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는 사고가 터진다. 종을 만들다 끓는 쇳물이 한 쪽 눈에 튀어 실명하게 된 것이다. 결혼하고 석 달 후의 일이었다. 1969년, 28살에 찾아온 견딜 수 없는 시련이었다. 세상을 모두 잃은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끝을 모르는 1년여의 방황 끝에 그는 다시 일어났다. 수덕사에서 범종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수덕사로 향했다.
“수덕사 갈 땐 그야말로 비장한 각오를 가슴에 품고 갔어요. 종을 만들다 한 쪽 눈을 잃었으니, 내 인생 전부를 종 만드는 일에 바쳐보자고 다짐했지요. 수덕사에서 살며 대웅전 옆에 천막을 치고 종 만드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여러 어려움 끝에 4년 만에 완성을 했는데, 정말이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환희심을 느꼈지요.”
수덕사를 내려올 당시엔 이미 스승인 8촌 형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는 성종사를 인수하며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전통 기법을 복원해 옛 신라의 종을 재현해보겠다는 원력이었다. 그 원력이 밑바탕이 되어, 현재 성종사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글로벌 범종 제작 회사로 우뚝 섰다.

| 좋은 종은 눈이 아닌 열정과 원력으로 만든다
원광식 선생은 범종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이장무, 황수영 교수 등 관련학자들과 ‘한국범종연구회’와 ‘범종학회’를 설립해 과학적인 방법으로 소리의 원리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전통 기법은 어느 문헌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찰과 박물관 종들을 샅샅이 살피고, 비법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애썼지만 어디에도 기록의 흔적은 없었다. 결국 혼자의 힘으로 해내야 했다.





보신각종

충북천년대종

직접 만들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수없이 많은 종들이 만들다 깨어져나갔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응하고, 쓴맛이 다하면 단맛이 온다고 했던가. 드디어 신라 범종의 비밀을 하나하나 벗겨가며 전통 범종 제작 방식인 밀랍주조공법 재현에 성공하게 된다. 활석을 이용해 밀랍을 감싸, 1,000도의 쇳물을 견디는 거푸집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 일제가 약탈해간 신라 운수사 범종을 시작으로 상원사종, 선림원종 등 20여 개의 신라・고려 범종이 전통주조방식으로 재현되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중요무형무화재 제112호 주철장으로 지정되었다. 2005년엔 새로운 밀랍주조공법을 개발해, 현존하는 최고의 범종 제작 기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가 신라 범종을 재현하게 된 건, 눈 한 쪽을 종에 바친 후 천직으로 여겼기 때문인 것 같아요. 거짓말하며 대충 할 수가 없는 거죠. 좋은 종을 만들려고 노력하다보니, 한 계단씩 기술적으로 올라가는 게 눈에 보여요. 그러면 또 투자를 안 할 수 없는 거죠. 수중에 돈만 들어오면 기술개발비로 모두 쓰다보니,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종은 눈이 아닌 열정으로 만든다’는 작은 깨달음이 그를 세계 최고 명장의 위치에 오르게 했다. 평생 원칙으로 삼아온 ‘배부르고 등 따시면 오만해져 일을 못한다’는 신념이 지금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를 진천 공장에서 만난 날은, 1년에 한 번 공개하는 ‘전통종 밀랍주조공법’ 시연이 있던 날이었다. 일흔이 넘는 고령의 나이에도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장인의 아름다운 열정이 느껴진다.




낙산사 동종 복원 후 모습

안성 청룡사 동종 복제 작품

| “생각을 해도 종 생각, 꿈을 꿔도 종 꿈”
원광식 선생은 종박물관(2005년)과 주철장 전수교육관(2012년)을 개관함으로써, 이미 개인적인 모든 꿈을 이뤘다. 다만 한 가지 남은 일이 있다면 제자・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국내에서 밥그릇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세계로 눈을 돌리자는 것이다. 성종사는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일본, 대만, 홍콩, 태국, 베트남 등 불교권 국가에 범종을 수출하고 있다. 오는 12월에는 대만 불광산사로 25톤의 대형 범종이 제작되어 들어간다.
“나는 평생 종 만드는 일만 하고 살았어요. 지금도 어디를 가고 싶어도, 작업 현장이 궁금해서 발이 안 떨어져요. 그만큼 아직도 일이 즐겁고 재밌어요. 생각을 해도 종 생각, 꿈을 꿔도 종 꿈을 꿉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절대 돈을 좇지 말고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쏟으라는 거예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인데, 한번 실추된 명예나 신뢰는 추슬러지지 않거든요. 현재 세계시장에 발을 들여놨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모두 해서 안정권에 들어가면, 그땐 후배들 걱정 안 하고 은퇴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와 불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처음 수덕사에서 4년간 종을 만들며 불교와 인연을 맺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며 살아왔다. 범어사에 종을 만들기 위해 1년간 들어가 살 때는 삭발하고 수계도 받았다. 오며가며 큰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며, 자신도 욕심을 버리고 살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한 마음으로 종을 만드니 좋은 작품이 나오고, 스님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일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지금은 수덕사, 범어사, 백양사, 금산사, 쌍계사, 낙산사 등 국내 주요 사찰은 물론 전국 수많은 사찰에서 그가 만든 종이 아침저녁으로 울려퍼지며 듣는 이의 마음을 맑히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종소리는 옛 종에서 나는 고요한 울림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종을 많이 쳐, 종의 입자가 파괴되어야 심금을 울리는 깊은 소리가 나온다. 그에게서도 오래된 종에서 나는 고요한 소리가 울리는 듯하다. 우리는 어떤 직업으로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는가. 천직을 갖고 살아온 명장의 가르침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청동 위에 개금 채색한 작품

원광식
194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1963년 8촌 형인 원국진 씨가 운영하는 성종사에 입사하며 범종계에 입문했다. 1973년부터 성종사를 이끌며 세계 최대 범종 제작 회사로 성장시켰다. 1976년 한국범종연구회를 발족했으며, 1997년 전통 범종 제작기법인 밀랍주조공법을 독자적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2000년 대한민국 명장, 2001년 중요무형문화재 112호 주철장으로 지정됐다. 2005년에는 대형 범종 제작에 적합한 새로운 밀랍주조공법을 개발해 특허까지 얻었다. 2005년 종 박물관, 2012년 주철장 교육전시관을 개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