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

2014-02-12     불광출판사
부처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




작년에 어느 큰스님을 친견하는 자리였다. 어느 비구니 스님께서 큰스님 앞에서 “큰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비구니 스님은 큰스님께 깨달음의 자리, 부처자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선문답 삼아 여쭈어 본 것인데, 질문에 대한 답으로 큰스님께선 주장자로 바닥을 한 번 쿵 때리셨다. 선문답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답이 저런 식인가 했을 것이다.

| 우리는 부처자리에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우리 불자들은 조석으로 불상佛像을 향해 예불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부처님 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불상은 밖으로 나타낸 상징이지 그 비구니 스님께서 궁금해 하신 깨달음의 자리, 부처자리가 불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것이다. 그러기에 『금강경』에서도 상相으로써 부처를 보려고 하면 볼 수 없다고 했고, 선지식이신 큰스님을 앞에 두고도 ‘큰스님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수행자들이 그토록 도달하고 싶은 깨달음의 자리, 부처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그토록 도달하고 싶은, 경험하고 싶은 부처자리에서 우리는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수행자가 깨달음의 자리, 부처자리를 목표 삼아 열심히 수행하더라도 종국에 가서 깨닫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자리에 벌써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보면 세상 도처가 다 부처자리고 깨달음의 자리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주면 친절하지 않다. 간절히 궁극을 묻는 사람에게 ‘깨달음의 본성이 지금도 항상 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고, 당신은 이미 원하는 종착지에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지 않으면,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도 듣는 사람은 너무도 불친철하게 느낄 뿐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처처에 두루 존재하는 부처자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부족하지만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깨달음의 자리, 부처자리는 가장 쉬운 말로 하면 ‘앎’이다. 예를 들어 깨닫기 위해 조용히 앉아 수행을 한다고 해보자. 보통 가만히 앉아서 생각이 올라왔을 때 위빠사나를 한다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거나, 수식관을 한다면 다시 숨의 숫자를 세거나, 화두를 들고 있었다면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화두로 마음을 돌리려고 한다. 그런데 생각이 막 떠올랐을 때 우리 안에 무언가가 ‘아! 지금 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안다. 도대체 무엇이 생각이 올라왔다는 사실을 알아챘을까? ‘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아는 것은 또 다른 생각인가? 아니면 생각 이전의 뭔가 다른 놈이 알아채는 것인가?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자.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놈’은 무엇인가? 무엇이 알아채는 것인가?
흔히 생각이 올라온 것을 알아채는 것이 또 다른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번 더 자세히 살펴보라. 우리는 무언가가 있거나 없어졌을 때 항상 생각을 통해야만 아는가? 예를 들어 배가 고플 때 생각으로 ‘아! 지금 배고프다’라고 굳이 생각을 내지 않아도, 언어화하지 않아도 배고프다는 사실을 즉시 알 수 있지 않는가. 똑같은 이유에서 생각이 올라왔을 때 꼭 ‘지금 생각이 올라왔다’라고 언어화, 생각화하지 않아도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무언가가 바로 알지 않는가. 혹시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한 번 천천히 들여다보자. 생각이 떠올랐을 때 ‘지금 생각이 떠올랐구나’라는 생각 없이도, 언어의 작용이 없이도 즉시 무언가가 바로 고요한 가운데 그냥 안다. 말 없이도 즉시 안다.

| 그 아는 ‘놈’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여기까지 확인이 되었다면 그 아는 자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그곳이 바로 우리가 찾는 부처자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번 자세히 보자. 우리가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 그 아는 ‘놈’은 어떤 특별한 모양이나 형태가 있던가? 언어를 쓰지 않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도 바로 ‘아, 지금 생각이 일어났구나’ 하고 아는 그 자리, 아는 그 ‘놈’을 자세히 보라. 대개 우리는 생각을 그냥 따라가는데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를 보라. 비슷한 것 같지만 이 둘은 엄청나게 큰 차이다.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이 일어났다고 아는, 앎이 일어난 그 자리를 보라. 그 앎의 자리가 어떻게 생겼나? 어떤 일정한 모양이 있는가? 형태가 있는가? 자세히 한 번 보라.
그 다음으로 앎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에 위치하는지 찾아보라. 그 아는 ‘놈’이 어디에 있는지 보라. 물론 처음엔 흔히 잘 살펴보지도 않고 내 몸 안, 머리 안에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면 내 몸을 항상 ‘나’라고 동일시하던 무시이래의 버릇 때문에. 그런데 한번 다시 보라.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는구나’ 하고 아는 앎이 몸 안에 있는가? 아니면 구름에 가 있는가? 그 앎이 정말로 몸 안에 있다면 구름이 몸 안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안 그런가? 내 눈 앞의 벽을 보라. 그 벽이 있음을 아는 앎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가 아니면 그 앎이 내 몸 밖에서 일어나는가?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라. 그러고 나서 또 물어라. 앎의 기준에서만 봤을 때 내 안과 밖이 따로 있는가? 내 어깨가 결린 것을 아는 앎이나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아는 앎이 앎만 놓고 봤을 때 하등의 차이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그 앎이 더럽혀질 수 있는지, 물들 수 있는지 한 번 보라. 내가 예를 들어 단풍나무를 보고나서 곧 이어 휴대폰을 봤다고 해보자. 단풍나무가 있음을 아는 앎이 휴대폰을 봤을 때 휴대폰이 있음을 아는 앎의 작용을 물들일 수 있는가? 물들일 수 있다면 휴대폰을 봤을 때 그전에 봤던 단풍나무의 모습이 휴대폰 모습 위에 중첩되어 눈앞에서 어른거려야 한다. 그런데 실제는 단풍나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주 깨끗이 사라지고, 휴대폰이 있다는 앎만 딱 있다. 즉 이 앎은 허공 모양을 한 거울과도 같아서 앞에 있는 대상이 사물이든 생각이든 느낌이든 일어났다는 것을 그냥 비추어 바로 알 뿐이다. 그 대상들이 거울 자체, 앎 자체를 물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앎은 그 대상들이 마음 거울 앞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앎 자체는 본래 청정한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이 생기기 이전부터, 내가 이 몸 받기 이전부터 지금처럼 존재해온 것이다.
깨달음의 자리, 부처자리를 경험하고 싶은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아는 그 자리가 바로 수행자가 그토록 찾던 자리다. 멀리 있는 것도, 수십 년간 고행해서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무엇이 아는지,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주위를 안으로 회광반조해서 보라. 아는 자리의 모양이 따로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앎이 위치하는지 자세히 살피고 또 살펴보라. 앎 자체의 성품을 깨달을 때 그 곳에 바로 부처가 있다.

혜민 스님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 종교학 석사를 수학하던 중 출가를 결심하고 2000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그 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 공부를 하며, 연구차 북경과 오사카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현재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햄프셔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젊은 날의 깨달음: 하버드에서의 출가 그 후 10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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