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 집착하는 삶

2014-02-12     불광출판사
숫자에 집착하는 삶




지홍 스님
월간 「불광」 발행인 및 불광사 회주. 1970년 범어사에서 광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석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하였으며, 1991년 광명 금강정사를 창건하였다. 조계종 포교부장, 조계사 주지, 파라미타 청소년협회 회장, 제11·12·13·14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현재 제15대 중앙종회의원,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본부장, 지구촌공생회 이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대표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사회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다.

탐욕을 벗어나려면
자기 자신의 욕심을 깨달아야 하고
분노를 벗어나려면
진리에 눈을 떠야 한다.
사견에서 벗어나려면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고,
세상일에 매달리지 않으려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함경』)

| 지나친 욕심에 각박해지는 우리 사회
오늘은 ‘숫자에 집착하는 삶’이라는 주제로 우리들의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든 경전이 우리 삶에 중요한 말씀들을 담고 있지만 『아함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현실적인 표현으로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탐욕이 많은 사람은 번뇌가 많습니다. 탐욕에서 벗어나려면 탐욕의 근본이 욕심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욕심이 과하면 탐욕이 되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고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욕심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화가 났을 때는 어리석음이나 탐욕이 근본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탐욕이 채워지지 않으면 불만족이 생기고 불만족이 과하면 그것이 고통이 되어 화가 나게 됩니다. 화, 그러니까 허망한 ‘진심嗔心’은 진리에 눈을 뜰 때만이 ‘진심’의 허망함을 알게 되고 허망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견邪見’은 그릇된 견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신경을 쓰고 집착하면 더 고통스럽고 괴로워지는 우리들의 가치의식이나 시각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려면 열심히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해야만 사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아함경』의 이야기입니다.
출가자는 세간의 일에 마음을 두지 말고 일심으로 삼매에 들어 정진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에 신경 쓰다보면 번뇌 망상이 생기니까 세상일에 집착을 끊으려면 수행이라고 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재가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만 다른 일에 집착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보람, 기쁨, 행복, 평화를 느끼지 못하면 번뇌 망상이 생기고 다른 일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가치와 기쁨,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허망한 탐욕에서 벗어나야 하고, 사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에서 벗어나려면 진리에 눈을 떠야 하고 욕심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또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 『아함경』의 내용은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삶의 모습을 숫자로 평가하는 것이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요즘에는 아이큐가 몇이나 되어야 천재소리를 듣습니까? 140? 150? 사람들은 아이큐가 얼마나 높은가를 따지며 그 숫자에 대해서 집착을 합니다. 또 학생 때는 성적이 얼마나 높은가, 시험 점수를 얼마나 받았는가 하는 것이 행복을 계량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더 많은 연봉을 필요로 합니다. 자동차를 타도 배기량이 큰 차를 선호합니다. 집도 평수가 넓은 것을 요구하고 직급도 높아야 하고 호봉도 높아야 합니다. 크고 높은 숫자를 얻기 위해서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높은 숫자만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높은 숫자를 싫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늘어나는 몸무게나 나이에 신경 쓰면서 세월에 비례해 숫자가 더해지는 것을 한탄하기도 합니다. 이런 숫자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불만족스럽습니다. 내가 바라던 숫자가 채워질수록 개인의 만족감은 증가합니다. 그러나 바라지 않았던 숫자가 증가하면 불만이 늘어갑니다. 하지만 이 만족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이 겉모습에만 치중한 것은 아닌지 성찰해 봐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목표를 정하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목표가 지나치면 욕심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숫자에 집착하며 살수록 우리의 삶은 각박해져만 갑니다. 내가 원하는 그 숫자에 도달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내 삶이 불만족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주변 사람과의 비교가 더해지면 상대적 박탈감까지 느끼게 됩니다.

| 탐욕을 버리면 모두가 살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몇 개의 숫자에 좌우되어 결정될 것이 아닙니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쓴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결론은 소유적 삶은 고통을 발생시키고 존재적 삶은 고통을 제거해주고 평화로운 삶을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소유적 삶이란 숫자, 그러니까 양적으로 많이 소유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만족과 편안함을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해야만 합니다. 소유의 과정에서는 상대가 누구든 용서가 없습니다. 형제끼리 대립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빼앗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삶에는 반드시 약육강식의 법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소유적 삶이 만연한 소유적 사회는 계속해서 불평 등으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존재적 삶이란 뭘까요? 부처님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우리는 인연관계에 의해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인연관계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연기적 관계라고 합니다. 인연의 다른 말이 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도 인연입니다. 우리는 자연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한 부분만 파괴돼도 전체가 영향을 받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없어져도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동일한 생명과도 같이 하나의 관계성 속에 얽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동일한 생명과도 같은 이런 관계는 존재적 삶을 통해 유지됩니다. 소유를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통해 유지됩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내 삶이 당신을 위한 삶이고, 당신의 삶이 나를 위한 삶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자비를 주고받아야 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평화의 세상이 조성될 수 있고, 행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인간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배제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해서는 모두가 행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설사 잠깐의 행복을 느끼더라도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를 쓸수록 괴로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대부분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욕망을 놓아버리면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에 따른 고통도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선문염송』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한 바라문이 두 손에 아름다운 꽃을 들고 부처님을 찾아와 공양을 올렸다. 그때 부처님께서 바라문을 향해 말씀하셨다. “버려라.” 그러자 바라문은 왼손에 들고 있던 꽃을 버렸다. 부처님은 다시 바라문에게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바라문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꽃을 버렸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시 한 번 바라문을 향해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바라문이 고개를 조아리며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두 손에 든 것을 모두 버렸는데 또 무엇을 버리라고 하십니까?”

부처님은 바라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나는 꽃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네 몸 속의 티끌과 탐욕과 번뇌의 뿌리를 버리라고 한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버린다고 해서 모든 집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수행을 통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욕망을 나를 변화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의 마음으로 최소한의 것도 충족되지 않은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는 자비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숫자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