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한담

연기론적 정치학

2007-06-20     관리자

사회과학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회현상을 역구하는 학문이다. 사회현상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은 다수의 독자적인 개별 학문으로 구분되지만, 독자적인 이름으로 어떠한 현상이나 영역을 그 주된 연구대상으로 하든 간에 사회과학의 존재 이유와 그 목표는 인간과 삶의 현장에서 제기 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사회과학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들을 불교적으로 표현한다면 그 것은 고(苦)라고 할수 있다. 인간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 즉 고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수단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것이 종교라고 한다면 정치는 가장 광범위하고도 포괄적인 수단이라고 할수 있다.

종교와 정치는 그 외양적 내지 현실적인 담당 영역이나 문제해결의 방식 그리고 역할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 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진다. 인간이 직면하는 고는 크게 보아 내면적이고 개인적이며 인간자체의 속성과 유래되는 근본 고와 남과 더불어 사는 삶에서 파생되는 사회고라는 두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 두 측면의 고(苦)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부처님은 근본 고의 제거에 역점을 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고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불교와 정치는 공통적인 영역을 공유함과 동시에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범주에 속하는 대개의 학문들은 인간, 세계 그리고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것이 연구의 출발점이 되며, 정치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정치철학은 사회와 국가의 구성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것이며, 가장 행복한 삶인가?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국가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며, 그러한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기위해서 정치자에게는 어떤 자질이 필요하고, 구성원들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등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연구자의 사욕과 관계없이 공정하게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연구자는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 세계 그리고 현실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갖지 않을수 없다 . 그러나 지금 까지 이분야에 제시된 모든 관점들은 대상의 본질적 구조를 파악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표피적 양상들을 본질이라고 착각한 것이거나, 연구자 자신들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부인할지라도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 환경에서 연유된 편견이나 혹종의 가설에 기초된 것들이었다.

엄격히 말해서 부처님은 불교라는 종교나 특정한 가설에 기초된 도그마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법(dhamma), 즉 진리와 그것을 체함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쳤다.  부처님 자신의 출세여부와 관계없이 진리로서 존재하는 이 법은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제거한 사실적 관찰, 즉 존재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총체적 통찰에 의해서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에 의해서 발견된 연기법이라고 불리우는 이 법은 세상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양식과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에 의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잠시도 정지함이 없이 변해가고 있으며(諸行無常), 그 변화에는 인간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에 나라고 할만한 불변의 고정된 실체가 없다(諸法無我)고 가르쳤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동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욕망과 집착과 바램에  따라 고착된 범주의 형상, 즉 특정한 시간과 한정된 특정한 상태로서만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실과 인식 사이에는 괴리가 생길 수 밖에 없으며 여기서 괴로움이 일어나 생은 고라는 것이다(一切皆苦). 

따라서 제행무상은 사실에 일치되는 진리의 세계관이며, 제법무아는 모든 편견과 아집을 떨쳐버리고 조작의 과정을 거부하는 말 그대로의 실증주의적인 전대미문의 인간관이며, 일체개고는 모든 가식. 위장. 위선 그리고 왜곡의 베일이 제거된 가장 적나라한 현실 인식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호와 관계없이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는 불가피하게 상호간에 고통을 주지않고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원칙과 질서가 요구된다.  이 원칙과 질서를 수립하고 지키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 혹은 국가가 수행해야 할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궁극적인 기능이다. 

그러나 올바른 인간 인식과 이에 상응하는 개인의 내면적인 질서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 한, 결코 올바른 질서 수립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공동체들은 임시 방편이나 잘못된 원칙과 질서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연기론적 관점에서 부처님이 제시한 공존원칙 내지 공존질서의 최소한의 내용이 오계(五戒)이다. 국가는 그 구성원들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고, 국가의 일차적인 임무는 구성의 생명을 지키는 안전질서와 생존질서의 확립으로 오계의 정신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어 생명이 경시되는 사회, 피땀 흘린 노동의 대가로 모든 재산이 도둑과 착취에 의해 망실되는 사회, 최소한의 공동체인 가정에 믿음이 없고 진실하지 못한 사회, 구성원들이 건전하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 이런 사회에 물리적 강제력의 사용 이외 어떤 질서의 수립이 가능하겠는가? 

오계는 그것을 지킴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최소한 인간답게 만들어 가고, 동시에 남을 최소한 인간답게 대접하는 도덕률이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상호간에 고통을 주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오계는 사람다운 사람과 훌륭한 시민을 한 개인속에 통합시키는 불교와 정치의 공동 기반이 될 수 있다. 

구성원들의 도덕성이 붕괴된 사회는여러가지 정치적 난맥상들이 노출되고, 지도층의 도덕성이 상실된 국가는 바로 존망의 기로에 서게된다. 이러한 논지의 타당성을 오늘날의 우리사회가 극명하게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부동산 투기, 증시폭락, 물가와 전세값의 폭등, 빈번한 자살 및 꼬리를 무는 살해 사건들, 감사 비리 사건, 고위공직자들의 부패 등으로 야기된 총체적 난국은 바로 공존 질서의 파괴와 국가 기능에 관계되는 정치적 문제이면서도 그 기저에는 도덕성의 붕괴라는 종교적 문제가 깔려 있다. 

인간 및 사회에 고통이 존재하는한,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종류를 불문하고 부처님과 불교인들이 외면해도 괜찮은 것은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고의 해결방법으로 일관되어 있다. 근본 고의 해결 방법이 좁은 의미의 종교적 가르침이라면, 사회 고의 해결방법은 정치적 가르침이고, 이들은 연기적 인식과 중도적 실천이라는 하나의 근본원리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정치적 가르침은 모든 종류의 고로부터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위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종교 영역의 확장이며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을 다루는 정치를 종교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통로이다.  이것은 현대의 대표적인 파행적이고 분열적 시각인 관념론과 유물론, 주관과 객관, 가치와 사실의 대립을 통합하는 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