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밭心田을 어떻게 갈고 닦을 것인가

2014-02-11     불광출판사
마음밭心田을 어떻게 갈고 닦을 것인가




허주 스님
대구 은적사 주지. 1975년 성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통도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뒤 비구계를 수지했다. 현재 대구・경북지역의 풍경소리 대표와 조계종 대구・경북 전법단 단장 소임을 맡고 있다.

통도사 학인시절 감로당甘露當 벽에 걸려있던 누런 달력이 생각납니다. 매일 매일 손으로 갈아 끼워야 했던 그 달력은 ‘무진월력無盡月曆’이라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세월이 간다(無始無終).”는 말인데, 당연히 시작된 적이 없으니 끝나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 겁의 세월이 흘러도 옛날이 아니고(歷千刧而不古), 만년에 나아가도 영원히 지금 현재 이 순간일 뿐(旦萬歲而長今)”이라는 옛사람의 말이 새삼스러울 뿐입니다. 생각건대, 과거란 이미 지나가버린 현재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일 뿐,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열심히 살라는 말씀입니다.

| 실패와 좌절이 없는 인생은 위험하다
어려운 시대라고 합니다. 삶의 의미를 되돌아볼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는 무한 속도경쟁, 성과경쟁 속에서 우리들의 마음은 점점 더 메말라가고 더불어 환경도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연환경도 인간의 마음이 이기적으로 타락한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가치 충돌들을 살펴보면 계층과 세대 간의 문제를 떠나서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마다 화를 내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화를 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격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입니다. 옳고 그름의 잣대보다는 다름을 이해하고 공통분모를 찾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환경과 무수한 인간관계를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관계로 만날 수 있다면 이처럼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현실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좋은 인연을 만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부처님과 예수님 같은 성자들도 아주 가까이서 사사건건 괴롭히고 음해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빼앗으려 했던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긴 항로에 있어서 실패와 좌절과 시행착오가 없는 인생은 얼마나 위험한 인생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대승기신론 해동소』에 보면 원효 스님께서 “인간의 마음은 좁기로 말하면 바늘구멍보다 좁고, 넓기로 말하면 이 우주 전체를 싸고도 남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흔히 질병만 전염되는 것으로 믿지요. 만약 정신도 바이러스같이 전염성이 강하다고 하면 의아하겠지요. 그러나 개인의 마음상태도 주변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정신적인 감염 현상을 가져옵니다. 슬픈 얼굴의 사람 옆에 있으면 왠지 같이 슬퍼지고, 외롭고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곁에서는 덩달아 쓸쓸해지기도 합니다. 가장의 어깨가 쳐져 있으면 가족 전체 분위기가 침울하고, 화가 나있으면 가족 전체가 비상이겠지요. 마음상태는 주변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건강에도 크나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균형을 잃은 마음의 상태는 몸에 질병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가족과 주위에 많은 우환을 안겨줍니다.

| 자기 변혁과 인격 전환을 가져오는 길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웃들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소통하고 살아갑니다. 인간은 연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반야심경』을 보면 관자재보살이 괴로움을 여의고 열반을 성취하게 된 요체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을 깨달은 데 있습니다. 오온이 무엇이냐 하면 곧 몸과 마음이요, 정신과 물질입니다. 이 몸과 마음, 정신과 물질 모두 공하다는 뜻입니다.
‘왜 공空인가’ 하면 인연소생因緣所生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연소생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는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상대성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이 ‘나’라는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불러오는 이기주의는 자신이 어떤 법칙 아래 존재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사고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요인, 이기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온갖 존재의 법칙, 즉 연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구제나 구원의 논리가 없다면 뜨거운 햇살 아래 비옷을 입은 것처럼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온갖 모순과 갈등 속에 내던져진 존재입니다. 내가 원해서 이곳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업의 결과에 따라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랜 수행의 결과가 원생源生이라면 중생들이 지은 업의 결과는 업생業生입니다.
유한한 육체 속에 무한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으니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고苦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최우선의 과제였습니다.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그것은 욕망, 즉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를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구원이란 말 대신에 구제와 해탈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건져준다’는 의미와 ‘벗어난다’는 두 가지 의미로 설명됩니다. 건져준다는 것은 내가 손을 뻗어 도움을 주는 것이고, 벗어난다는 것은 나를 부자유스럽게 했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제의 의미는 건짐과 벗어남의 양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철저한 자각을 통해 자기 변혁과 인격 전환을 가져오는 길이 곧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 육체는 벗어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소중한 진리를 담는 그릇입니다. 고통덩어리, 번뇌덩어리인 동시에 도를 담는 그릇입니다(載道之器). 그래서 중국의 영가 스님은 “환화공신幻化空身이 법신法身”이라고 하였습니다. 허깨비 같은 이 몸뚱이가 곧 법신이란 말씀입니다. 번뇌덩어리, 고통덩어리인 이 몸을 통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도 없다는 말씀이지요. 

| 불교인의 실천덕목
철저한 자각을 통해 향상된 인격을 갖추는 것, 정견正見을 갖추는 것, 그래서 눈을 뜨는 것(開眼)이 불교인의 실천덕목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마음밭(心田)은 어떻게 갈고 닦느냐에 따라, 쓸모 있는 땅이 되기도 하고 쓸모없는 땅이 되기도 합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은 좋은 생각까지 비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은 놓아버리고 올바른 생각은 놓지 않고 참구하는 것이 삼매입니다. 생각 없이 멍청히 앉아있는 것은 삼매가 아닙니다. 선禪은 잘못된 생각을 비우고 하나의 생각을 올곧게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흔히 말하길 쓰레기를 줍고 청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버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집착심을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그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경계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처음부터 욕심을 줄이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현명하게 판단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고 번뇌로 물들이는 집착심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마음현상입니다. 지나친 욕심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화의 원인이 되며, 그 성내는 마음은 편견으로 얼룩져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매일 잠깐이라도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지 조용히 관조하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당장은 목숨까지 걸 일도 시간이 지나면 이슬 같고 물거품 같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마음의 작용을 원인과 결과로 나누어 조용히 반조返照하는 시간을 반복하다보면 그 시간이 행복한 시간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부디 행복한 삶, 행복한 인생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