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목탁이 내지르는 사자후獅子吼가 외롭다

마지막 수제 목탁 장인 김종성

2014-02-11     불광출판사
살구나무 목탁이 내지르는 사자후獅子吼가 외롭다

마지막 수제 목탁 장인 김종성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
지난 세기를 지나며
수많은 유・무형 문화재들을 잃어버렸다.
그 중에는 몰라서 지키지 못한 것들도 있고,
알면서도 지키지 못한 것들도 있다.
불교계도 마찬가지다.
지난 시간 동안 많은 전통이 사라져갔고,
지금도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 여기,
또 하나의 옛 것이 사라질 기로에 놓였다.

수제 목탁이다.




| 수백 년 된 흙집에서 손으로 깎는 목탁
사실 시중의 목탁과 뭐가 크게 다를까 싶었다. 처음 수제 목탁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래서 가볍게 떠난 길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노인은 걸걸한 사투리로 “할 얘기가 참 많십니더. 일단 내려와서 들어보지예.”라고 했다. 더 긴 이야기도 없었다. 수제 목탁을 만드는 마지막 장인 김종성 씨(67)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가 사는 곳은 경남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다. 읍내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간 산골짜기 중의 산골짜기. 지금이야 포장도로가 뚫려 있지만, 예전 같으면 찾아가기도 힘들 오지였다. 집 대문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흙집이다. 그것도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낡은. 그 집의 방 한 칸이 오롯이 목탁을 만드는 방이었다.
“이 집이 10대를 이어서 산 집입니더.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집이라 카데예. 워낙 없이 살다보니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건 꿈도 못 꾸고, 아직도 이래 살고 있는기라예.”
지붕을 비롯한 몇몇 곳을 손봤을 뿐, 집의 뼈대부터 흙벽까지 예전 모습 그대로다. 김종성 씨는 아버지에게 이 집과 함께 목탁 만드는 기술을 물려받은 셈이다.
“예전에는 손으로 목탁 만드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참 많았는데, 지금은 저밖에 없어예. 왜 그런가 하모, 밥벌이는 안 되는데 공은 억수로 드는기라. 그러다 보이 전부 떠나 그만뒀지예.”
남들도 힘들어 두 손 든 일이 그라고 왜 힘들지 않았겠는가. 그 역시 몇 번씩 그만 두려 했다. 하지만 배운 게 이 일이고 식구들 목구멍에 풀칠은 해야 했다. 쌀을 살 돈이 없어 산에서 뜯은 쑥에 밀가루를 얹어 쪄낸 쑥버무리로 끼니를 때우기가 일쑤였다. 그것마저 허겁지겁 집어먹는 6남매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기를 수차례. 이젠 목탁 일이 부인할 수 없는 업이 됐다.

그림3

좋은 목탁은 사자울음소리를 낸다고 했다.
김종성 씨가 만든 목탁은
끝까지 옹골차게 치고 나가는 소리가 난다.

| 십리 밖까지 퍼지는 사자울음소리
그의 목탁은 주로 살구나무의 뿌리로 만들어진다. 보통 300~400년 이상 묵은 것만 쓴다. 수령이 몇 십 년에 불과한 나무에서는 영근 소리가 나지 않는 까닭이다. 보통은 한 뿌리로 50~60개의 목탁을 만든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사용하지 않는 고논(봇물이 맨 먼저 들어오는 물꼬가 있는 논)의 진흙 속에 뿌리를 묻어 놓고 3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곤 도끼로 나무를 잘라 가마솥에 굵은 소금과 함께 넣어 삶은 뒤 3개월을 말린다. 나무의 진을 빼야 하기 때문이란다.
목탁을 깎는 과정도 순탄치 않다. 겉모양을 다듬고 양발로 나무를 붙잡은 채 물고기 모양으로 아가미와 눈, 꼬리를 만든다. 소리는 목탁의 눈에 골칼을 넣어 속을 파면서 잡는다. 한 칼만 잘못 들어가도 목탁에선 바가지 긁는 소리가 난다. 그래서 칼을 먹이는 한 번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다 만들어진 목탁은 숯칠을 한 후 응달에 말리면서 들기름을 7번 덧칠한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부식을 막고 벌레 먹는 일도 없어진다. 그렇게 완성된 목탁에는 ‘성공成空’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다. ‘성공’은 그의 목탁소리를 인정해준 성철 스님이 내려준 그의 법명. 김종성 씨가 손수 만들었다는 표식이다.
좋은 소리를 위해 그는 무던히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직접 만든 목탁을 짊어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월하 스님이나 성철 스님 같은 분들에게 조언을 청했다. 모두 처음에는 쉽게 만나주지 않았다. 어렵게 얻은 조언은 “좋은 목탁은 사자울음소리를 낸다.”는 한 마디였다. 얼마나 오랜 시간 사자울음소리를 찾아 헤매었을까. 재료를 다듬다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런 아픔을 이겨내며 찾아낸 소리는 비로소 큰스님들에게 극찬을 받을 수 있었다.





목탁 하나를 만드는 데 3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신심이 없으면 견디기 힘들다. 그만큼 지난하고 고된 작업 끝에 수제 목탁이 완성된다.

“내가 소리 잡는다꼬 목탁을 때리마 십리 밖에서 나물 캐던 아낙들도 그 소리가 들린다카데예. 산을 내리오면서 ‘저~ 멀리까정 잘 들리네’ 하고 지나갑니더. 좋은 목탁 소리는 그런 기라.”
그 소리가 궁금했다. 직접 쳐보니 일반 목탁처럼 울리다 뭉개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옹골차게 치고 나가는 구석이 느껴졌다. 소리가 맵다. 큰스님들이 좋은 목탁 소리를 ‘사자울음소리’라고 표현한 이유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사실 지난해까지 그의 목탁 깎는 기술은 아들에게 전수되고 있었다. 서울 일류 호텔에서 요리사를 하던 둘째 아들 김학천 씨가 목탁 깎는 일을 물려받겠다며 내려와 아버지 곁을 지켰다. 하지만 목탁 깎는 기술과 함께 가난마저 대물림했던 김종성 씨는 그 가난을 다시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숱하게 말렸지만, 아들은 듣지 않았다. 그래도 뒤를 이어준다는 생각에 든든한 아들이었다.

| 욕심 없이 만들어 보시하는 마음으로 판다
그런데 그 든든했던 학천 씨가 지난해 봄,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했다. 학천 씨의 죽음으로 4남 2녀 중 아들 셋이 먼저 세상을 떠버린 셈이 됐다. 첫째는 어려서 잃었다지만, 다른 하나는 군에서 의문사를 당했다. 세 아들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아비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대를 이은 가난에 자식을 잃어버리는 불행마저 평생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현재 마지막 남은 아들은 출가로 마음을 굳힌 상태다. 다행히 학천 씨의 외동아들이자 김종성 씨의 유일한 손자인 민수가 뒤를 잇겠다고 나섰지만, 이제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이다. 그 여린 어깨가 수제 목탁의 맥을 잇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엔 아직 너무도 버겁다.
3년 반이 걸려야 비로소 완성되는 목탁인지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할 텐데, 그는 굳이 욕심을 부리고 싶은 생각조차 없다. 평균 30~50만 원. 그 긴 세월 공들여 만드는 그의 ‘작품’치고는 너무나 헐값이었다. 그나마도 없는 사람에게는 주는 대로 받는다. 공장에서 만든 목탁에 보기 좋은 조각이 돼있다는 이유로 80만 원, 100만 원에 팔리는 세상이다. 심지어 그는 직접 주문을 받아서만 목탁을 만들고 있다.
“돈이야 벌모 좋겠지. 그래도 양심은 속일 수가 없는 기라. 제가 만든 기 불교상에서 팔리모 수백만 원에도 안 나가겠능교. 그래도 그라모 안 되는 기라. 목탁은 소리로 공양 올리는 물건 아닙니꺼. 욕심부리모 안 되지예. 이기 신심이 없으모 몬해. 그래 성철 스님이 ‘성공’이라는 법명을 주실 때 스님캉 내캉 한 약속이 있심니더. 내 목탁은 욕심 없이 만들어 보시하는 마음으로 파는 물건인기라.”
김종성 씨는 현재 무형문화재 등재를 신청해둔 상태다. 수제 목탁의 맥을 조금이라도 이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심사 결과는 올해 상반기 안에 나올 예정이다. 평생 그를 괴롭혀온 가난과 불행이 이제는 끝날 수 있을까. 우리는 앞으로도 수제 목탁의 사자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의 목탁이 내지르는 사자후가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