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첫 한국식 사찰 원광사가 준공되기까지

유럽의 첫 한국식 사찰이 준공되기까지

2014-02-11     청안 스님
 

| 큰 힘이 되어 준 설정 스님의 방문
 
운 좋게도 불사계획에 평범한 건물은 없었다. 그리고 정신적인 목표가 있었기에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첫 번째 도움의 손길이 2006년에 한국에서 온 큰스님의 방문이었다. 그해 11월, 우리는 상량식을 봉행했다.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과 한국 및 서구권 국가들에서 일부러 찾아와준 사형 스님들이 그 자리에 함께 해줬기에 정말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날 상량식은 정상이 아니었다. 보통은 건물의 골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면 상량식을 봉행한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기초공사조차 시작하지 못한 상태였다. 골조의 마지막이 돼주어야 할 마룻대가 공사의 첫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어준 셈이다. 본격적인 공사가 들어갈 2007년 봄을 기다리면서 엉성한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의 첫 번째 골조가 될 마룻대를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상량식으로 미래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을 얻었다. 그 의식이 없었다면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원광사의 첫 90일 안거는 2008년에 있었다. 본래 새로운 법당에서 할 계획이었지만 지난 호에서 밝혔던 이유로 2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벽돌로 지은 작은 방에서 15명이 함께 첫 안거를 들어갔다. 산적한 외부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안거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 기간은 모든 것이 새로웠기에 미래를 대비한 충전의 시간이 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겨울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 여름이 올 때까지, 기운을 청정하게 다듬으면서 힘을 키우고 비축해갔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사찰 불사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찾아 사람을 만나고, 때론 선 수행을 가르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불사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사람들은 원광사 불사 과정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운이 나쁜 경우’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그 사람들의 눈에서 ‘굳이 왜 그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시련이나 불행은 고귀한 일을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내 생각을 증명하면서, 앞으로의 종합적인 전망을 보여주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신이 열세에 놓였거나
심히 의기소침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은 물러서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위해.
게다가 이뤄야 할 목적이
아직도 저 앞에 있다면
당신은 살아남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스스로를 추슬러야 한다.
당신의 손해는 받아들이되,
패배는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패배는 포기했을 때 하는 것이다.
파괴와 손해는 불가피하다.
당신이 강해지고 변화했을 때
물러날 곳도 생기고,
자신만의 진정한 기반을 찾을 수 있다.
 
| 한국에서 한옥을 배워가다
 
숭산 스님은 우리가 불사를 진행할 부지를 찾아낸 후 불과 두 달 만에 돌아가셨다. 부지를 양도받기를 기다리던 때부터 2005년까지 나는 스님에게 그 어떤 좋은 소식도 전할 수가 없었다. “스님, 유럽에 우리의 새 사찰이 생겼어요!” 나는 스님에게 이 말을 들려드리고 싶었다. 스님이 너무도 그립다. 스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드리고 싶었다. 스님의 열정과 가르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숭산 스님의 제자들은 스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도 그 점을 알고 있었고, 스님이 알고 계시든 모르고 계시든 무언의 방식으로 스님을 소중하게 모셔왔다. 스님이 남긴 유산은 때로 선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고귀한 일처럼 느껴졌고, 때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는 불덩이처럼 느껴졌다.
 
2008년부터 우리는 매번 겨울 결제와 여름 기도를 들어갔는데, 이러한 수행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그 해에는 치열한 법적 공방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배로 바쁘게 살아야 했다. 그리고 변호사가 자신의 책상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우리는 절과 기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1년 동안 상황은 많은 진전을 보였고, 2009년 드디어 선방의 골조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일부 기둥과 보가 비바람에 상해 구부러지거나 뒤틀렸지만 우리는 2년 후 제대로 된 건물의 형상을 보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잊어버리려고 해도 목재들은 자꾸만 가르침을 던져줬다. 시간이란 세상에서 가장 짧은 환상이자 가장 값비싼 상품과도 같다는 깨달음이다. 미래에는 넘치도록 많은 것이 시간이지만,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게 시간이란 녀석이었다.
 
하반기 들어 선방을 재건할 모든 준비가 끝나있었다. 아주 힘든 겨울이었다. 우리 목수들이 한국에서 한옥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불사가 중단되고 있던 2007년, 목수들은 그 시간동안 한국에서 좀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인 경험을 쌓고 싶어 했다. 그래서 2008년 그들 중 3명이 한국에 와서 불사가 진행 중인 많은 사찰을 둘러봤다. 그곳에서 그들은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진짜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경북 청도의 한옥스쿨을 찾아간 것이다.
 
변 교장님과 박 부장님은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가장 친절한 한국인들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귀중한 노하우를 나눠주었고, 이틀에 걸쳐 수 시간의 동영상을 찍도록 해주었다. 수십 장의 설계도와 질의응답이 날아다닌 끝에 설계도의 대부분이 그곳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 헝가리 팀은 한옥스쿨에서 공부를 잘 해둔 덕에 최근 헝가리에서 1년에 하나의 건축물에만 수여한다는 ‘올해의 지붕’에 선정됐다. 물론 그들이 선정될 수 있도록 해준 건축물은 ‘원광사’다. 그런데 상의 세부명칭이 문제가 됐다. 우리 목수들에게 수여할 적절한 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의 지붕’에 새로운 분야를 신설해 상을 수여했다. 그 상의 이름은 ‘황금 도끼 상’이다.
 
| 마침내 이뤄낸 원광사 불사
 
불사 측면에서는 큰 진전이 있었지만, 2010년 말 지방 정부와의 협상에서는 점점 밀리고 있었다. 중요한 오해가 반복되면서 협상이 결렬돼 버렸다. 건물의 건립과 내부 인테리어가 틀을 잡아가던 그때, 당국의 제지가 시작됐다. 우리는 그들의 처지뿐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상황까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2010년 1월 말경 건물을 완공하고 거의 4년 동안 사용해왔던 임시 법당을 옮겼다.
 
법당 준공식에는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 향천사 주지 법정 스님, 그리고 화계사 주지 수암 스님이 참석해 주었다. 또 전 세계에서 한국불교 수행자들이 와주었다. 하지만 터무니없게도 준공식 며칠 전 새 법당에 대한 철거 명령이 내려졌다.
 
이번에는 우리도 준비가 돼있었다. 웃으면서 법당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준비했다. 변호사는 관계당국에 관련 서류들을 전달했고, 천천히 하지만 고통스럽게 반전을 위한 소송절차에 들어갔다. 그 후로 다행히 아직까지는 소송이 진척되지 않고 있다. 법원은 우리 건에 대한 중재에 들어가기 전에 지방 정부의 규례에 해결해야 할 법적 이슈가 있다고 판단했다. 평정심 속에 희망을 품고 감사한 마음으로, 태풍 전야의 고요와 같은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이곳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만들어가야 할 시간이 왔다.
 
원광사가 정식으로 문을 열자 새로운 목소리들과 새로운 도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11년, 사찰에 관련된 일과 함께 내 자신의 미래에 대한 결심을 했다. 헝가리 승단의 동의를 받아 우리는 이듬해인 2012년, 원광사를 수덕사의 말사로 등록시키기로 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방장스님이 원광사에 와주셨을 때부터, 이미 우리는 스님을 원광사의 큰어른으로 모시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2011년 말 향천사에서 동안거에 들어갔고 봄이 되자 원광사의 말사 등록이 시작됐다. 그해 여름,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한국어 공부를 위해 동국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등록서류가 도착했다. 나는 사중 회의가 열리기 전에 이미 수덕사 측으로부터 말사 등록에 대한 소식을 받을 수 있었다. 원광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청안 스님
헝가리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인 1991년 숭산 스님을 만났고 1993년 미국 프로비던스에 참가해 이듬해 28세의 나이로 출가했다. 이후 한국의 화계사, 해인사 등지에서 수행했다. 1999년 지도법사 인가를 받고 2000년 고국으로 돌아가 헝가리 관음선원 주지를 맡았으며 부다페스트에 선원을 세워 대중을 지도하며 정진했다. 이후 유럽 각국에서 불교와 선 수행법을 알리고 있다. 현재 헝가리에 유럽 최초의 한국식 사찰인 ‘원광사’를 짓고 주지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