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을 꺼내어

합천 영암사지

2014-02-11     불광출판사
 
합천 영암사지
 

 
 
얼마 전 만난 한 스님이 내가 벗어놓은 털신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수행자로군요.” 귓전에 그 말이 들린 순간 얼마나 부끄럽던지 고개를 숙인 채 얼른 털신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이후 스님의 그 말은 내 마음 깊이 박혔다. 가끔 방향을 잃고 서있을 때 스님의 말씀을 나침반처럼 꺼내어 사용한다. 그 마음을 합천 영암사 터에서 열어본다. ‘나는 수행자인가?’ 생각과 긴 침묵 속에 해는 산 뒤로 넘어갔다. 석탑과 석등 뒤로 노을이 지고 나는 또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두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이미 시간의 지우개는 석등의 많은 부분을 지워버렸지만,
그렇다고 그 위용마저 꺾어버린 것은 아니다.
자세히 뜯어봐야 알 수 있는 장인의 손길은 단단했다.
분명 찬란한 문화의 정수가 깃든 절이었을 게다.
하지만 과거의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가버리고
이제는 터만 남아 간간이 찾아오는 사람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허허벌판에 우뚝 솟은 당간지주가
지나는 사람에게 이곳이 옛 영암사 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지가 되어 줬다.
그러나 당간지주 너머 어디를 둘러봐도 과거의 시간은 흔적뿐이다.
인적 없는 이 절터에 당간지주처럼 혼자 서서 고목이 되어 본다.
금당 뒤에서 바라보니 석등 뒤로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갔다.
하늘빛마저 외롭고 슬프고 아름답다.
 
그림7 2페이지짜리
 
사람의 발길이 끊겨 밤이면 더 외로운 이 절터엔 노을마저 서둘러 자리를 뜬다.
황매산 능선 너머로 걸린 노을이 아직 붉은데, 제 집을 찾아가는 까마귀 소리만 바쁘다.
내 갈 길은 어디인가?
내 속의 나침반을 꺼내 답을 구했지만, 어느 쪽도 쉽사리 발길이 나아가질 않는다.
그 사이 무거워진 밤하늘에 낮의 흔적은 옅은 생채기를 남기며 흩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