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길? 나의 길

무심無心이 안심安心이다

2014-02-11     불광출판사
나만의 길? 나의 길




왕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가 총명하였다. 존자가 그들의 지혜를 시험하고자 보주寶珠로써 물었다. “이 구슬에 미칠 보배가 있겠습니까?” 첫째와 둘째의 대답은 같았다. “이 구슬은 칠보七寶 가운데서도 가장 존귀합니다. 큰스님의 도력이 아니면 이를 지닐 요량이 없습니다.” 막내의 대답은 달랐다. “구슬은 스스로 구슬이 아니며, 마음이 구슬이라 해줘야 구슬이 됩니다. 구슬은 스스로 빛나지 못하며 마음의 빛을 만나야 비로소 빛이 납니다. 더구나 세간에서 빛난다고 지껄이는 것이니, 귀히 여길 게 못 됩니다. 마음의 보배가 진짜 보배입니다.” 존자가 변재에 놀라 다시 물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 가운데 무엇이 형상이 없는 것입니까(無相)?”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不起).” “무엇이 가장 높습니까?” “나입네 너입네(人我) 따지고 재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큽니까?” “법성法性입니다.” 존자는 셋째가 자신의 후계자임을 알았으나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일단 묻어두었다.
-『전등록』 제2권 ‘반야다라’편

무심無心이 안심安心이다

1 -
반야다라가 보리달마의 내공을 처음으로 접하는 장면이다. 짐작하다시피, 막내가 달마다. 일반적으로 『아미타경』에서 언급한 금·은·청옥·수정·진주·마노·호박을 칠보七寶로 쳐준다. 극락을 최대한 영화로운 공간으로 미화할 목적에, 내세지향적인 종파가 애용하던 은유다. 마노, 호박? 낯설다면 삼대가 놀고먹을 수 있는 재산쯤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반야다라가 내놓은 구슬의 값어치는 칠보 가운데서도 으뜸, 인간의 욕심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가의 재물인 셈이다. 두 형들의 반응은 명품과 사치에 익숙한 신분에 걸맞다. 이른바 ‘물건’을 알아볼 줄 알고, ‘큰스님의 도력…’ 운운하며 입에 침을 바를 줄도 안다. 세간의 시선과 잣대엔 속수무책이겠지만, 정치는 곧잘 할 사내들이다.
막내는 그들과 심리적 이복異腹에 가깝다. 비주얼에 심드렁하며, 언변에도 기름기가 없다. 무엇보다 심지법계心地法界, 마음이 세상의 모든 것이란 통찰로 형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보석이 아무리 영롱하다손, 마음이 봐주고 추켜세워야만 비로소 때깔이 돋보이는 법이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내용이 없으며, 마음에 기대어야만 기를 펼 수 있는 헛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눈부시지만, 가짜. 더구나 보석을 갈구하거나 자랑하는 마음은, 편들고 줄 대고 뻥튀기고 구워삶는 마음과 한통속이다. 저잣거리가 열광하는 광명을 얻으려면 응당 돈이 들고 반드시 차별을 낳는다. 반면 마음의 빛은 공짜이며, 불황을 타지 않는다.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누구나 가지고 있다.

2 -
반야다라가 보리달마를 간택한 결정적 이유는 세상만사가 마음놀음이란 자각 때문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해묵은 관념론이나 섣부른 환원주의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분명한 현실이다. 어디에도 없지만, 언제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마음. 녀석이 쏟아내는 온갖 그림들이 세계이고 고통이며, 자비이고 치욕이다. 또한 마음은 살아있는 것들에만 기생할 수 있다.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부처와 중생 사이에 하등의 차이가 없으며,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는 게 조사선祖師禪의 일관된 주장이다. ‘일상이 곧 신비’이며 ‘삶이 곧 기적’이라는 법문의 근간이 되는 생각이다. 이런 맥락에서 깨달음은 성취나 도달이 아니라 직관이고 인식이다.
직관의 실천은 달관이다. 달마의 위대성은 마음놀음의 폐해를 흔연히 떨쳐버릴 수 있는 용기에서 드러난다. 훗날 부왕父王이 죽자 나라의 모든 백성이 슬피 울거나 우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오직 달마만이 태연자약했다. 다만 선정禪定에 들었고, 7일 만에 깨어나자 출가를 희망했다. 집권의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한 자리엔, 역적으로 몰릴 빌미만 남았다. 반야다라는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때’가 비로소 왔다고 판단한 듯싶다. 아버지 그것도 임금인 아버지를 헛것으로 여기는 자가, 세속의 단맛을 기웃거리거나 일신의 영달에 눈이 뒤집히진 않을 테니까. 구족계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내리고, 평생을 곁에 두었다. 기득권을 내던져버리고 맨땅의 자유인으로 회귀하는 순간이다.

3 -
이름도 ‘보리다라’에서 ‘보리달마’로 바꿔줬는데, 즉흥적인 개명은 아닌 듯하다. 달마의 지적知的 됨됨이가 총기聰氣나 탁견을 넘어 진리 그 자체(Dharma, 達磨)임을 인증한 사례이거나 그러길 바라는 권고로 보인다. ‘다라(Dhara, 多羅)’는 산스크리트어로 ‘보존’ 혹은 ‘소유’라는 뜻이다. 법성法性을 담지擔持하곤 있으나 아직 육화肉化하진 못한 인격. 자아와 대상 사이의 균열이 잔존하는 상태이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네가 뭔데?’ ‘세상 참 더럽다!’ 따위의 망념이 남아있는 상태다. 형들의 이름도 목정다라이고 공덕다라다. 안목이 있다고(目淨) 또는 선행을 베푼다고(功德), 깨달음을 완성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암시로도 들린다.
괴로움은 질량이 없으며, 괴롭다는 생각만큼만 괴롭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을 때 마음도 아무렇지 않다. 결국 자아라는 녀석이 마음의 시작이자 문제의 근본이다. ‘나’라고 하는 관념이 버겁고 볼썽사나운 까닭은 그것이 기어이 남을 불러들이고, ‘남들의 눈에 비친 나’, ‘남들의 눈에 들어야 하는 나’, ‘남들보다 못난 나’, ‘남들보다 잘난 나’ 등 속절없는 번민을 유발하는 탓이다. 모든 타인은 지옥이라지만, 내가 만든 지옥이다. 나의 꿈을 이루려면 필경 남들의 놀이터에서 웃고 떠들고 망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만의 길이란 애초부터 나의 발목을 잡을 길이다. 더욱이 ‘내 것’이 바로 ‘나’라고 가르치는 현란하고 끈적끈적한 도시 안에서, 나는 필연적으로 궁색하고 목마르다. 인아人我의 산엔 벼랑이 가득하다.

4 -
보리달마의 『안심법문安心法門』은 요즘의 언어로 ‘힐링’이다. 모나고 뿔난 마음을 다독이는 해법으로 무심을 제안했다. 쓸데없이 마음을 쓰지 않으면 마음은 저절로 편안해진다는 이야기인데, 관건은 자아의 중지다. “자기를 보기 때문에 도를 얻지 못한다.”며 “지혜로운 사람은 대상에 맡기고(任物) 자기에게 맡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옳음이란 나의 옳음일 뿐이지 그 자체로 옳은 것이 아니”라며 “사물을 만나되 견해를 일으키지 않으면 도에 통달한 것”이라고도 했다. ‘이뤄야 할 것’을 고민하거나 ‘있어야 할 것’을 따지지 말고, 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요지다. 궁극적으로, 그래야만 해맑은 마음으로 화끈하게 세상을 비웃을 수 있다!
헛것에 취하지 않으려면 마음을 잠가야 하며, 마음을 잠그려면 자아부터 닫는 게 순서다. 나를 내세우고 떠벌이는 한, 나는 필경 남에게 연연하거나 종속되거나 끌려 다니거나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 동시에 ‘나’라는 미련이 없을 때, 나는 더없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대목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산은 산일뿐이며, 삶은 누구에게나 죽음의 반쪽일 뿐이다. 재산이 땅을 뒤덮고 권세가 하늘을 찔러도, 사람의 일상은 하나같이 앉거나 눕고 먹고 마시는 일이 중심이다. 태생적으로 거기서 거기인 신세들이니, 너무 기죽을 것도 너무 애쓸 것도 없다. 아무리 거대하고 찬란한 ‘있음’이라도 한계와 약점을 지니며, 간혹 뒤춤에 폭력을 감추고 있다. 완벽한 형태의 ‘있음’이란 결국 ‘없음’이다.

5 -
고려 말의 백운경한白雲景閑 선사는 보리달마의 훌륭한 계승자다. 그는 무심가無心歌에서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버리되 마음은 비우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비우되 경계를 버리지 않는다.”고 정리했다. 경계가 삶이라는 현상이라면, 마음은 삶에 대한 해석이다. 육체로 살아있는 한 경계에 부딪혀야 하는 게 인생이다. 때로는 별것도 아닌 것들에게서 별꼴을 다 당한다. 핵심은 이러한 마음에 휘둘리는 순간, 나 역시 별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해 갖은 별꼴을 저지른다는 점이다. 일언이폐지하면 ‘놀아주되, 놀아나지는 말라’는 게 무심의 골간. 마음이 먹다버린 찌꺼기에 미쳐 날뛰거나 슬금슬금 다가가지 않는 것. 입 다물고 지내는 날들에, 군데군데 끼워둔 다짐이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지만 ‘내가 있다’는 생각부터가 아무래도 화근이다. 내가 없으므로 내가 만든 감옥에 갇힐 필요가 없다. 아울러 내가 없으므로 남들과 같아져야 할 의무도 없다. 변해야 할 내가 있다는 생각도, 변하지 말아야 할 내가 있다는 생각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데서 불거져 나온 헛것이다. 진짜 걸을 만한 길을 찾는다면, 무심히 그냥 가는 길. 나라는 굴레이든 너라는 갈등이든, 여태껏 아무의 길도 되어본 적 없는. 내내 시무룩하다가도 문득 설레다가도, 다리가 아프다가도 남의 다리를 긁어주기도 하는 지금 서 있는 길. “범부와 성인이 함께 건너갈 순 없겠지만, 초연하면 조사祖師라 부르리라.” 안심법문의 마지막 구절이다.

장영섭
집필노동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불교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눈부시지만, 가짜』, 『길 위의 절』, 『공부하지 마라』, 『그냥, 살라』, 『떠나면 그만인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