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깊은 가을하늘 같은 덖음차 즐기기

차의 보관과 음용법

2014-02-10     지허 스님

물론 덖음차가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도, 6대 다류로 이름 난 중국에서도 가장 큰 소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녹차이고 그 대부분이 덖음차이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인구도 많으며 차가 자라는 서식지와 차나무의 수종이 다양하기에 많은 종류의 차들이 있다. 그럼에도 녹차는 항상 소비율 1위를 달려왔다. 중국식 덖음차 중 구화산차(九華山茶)가 있는데 구화산은 중국 안휘성 청양현에 있는 산이며, 절경으로 이름이 높다. 청나라 유원장(劉源長)의 개옹다사(介翁茶史)에 의하면 신라의 김지장(金地藏, 김교각, 696~794) 스님이 당나라 지덕(至德) 연간(756~758)에 바다를 건너와 신라의 차를 심었다고 되어 있다. 신라의 자생차이며 신라식 덖음차였고, 일아일엽(一芽一葉)으로 세 번 정도 덖는다 하였다. 1996년 초가을 구화산 방장 인덕 화상이 중국 공산당원 두 명과 함께 선암사 주지실로 나를 찾아와 하루를 묵어간 일이 있었다. 김지장 스님의 청동좌상과 구화산차를 선물로 가져와 선암사차와 함께 번갈아 마시며 선문답을 나누고 중국불교와 한국불교에 대한 이야기로 긴 시간을 보냈다. 인덕 스님은 지금까지도 구화산에서 김지장 스님의 신라 덖음차를 그대로 만들어 전해오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 변질되기 쉬운 덖음차의 보관과 저장
좋은 차는 만들기를 잘해야 하고 그 다음 중요한 일은 차의 보관과 저장이다. 차를 잘 만들어 보관이나 저장을 잘못하면 십년공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덖음차는 생잎을 덖었기 때문에 변질되기 쉽다. 주된 변질요인은 습기와 다른 냄새이다. 덖음차는 물론 훌륭한 차이지만 우리 생활 주변에는 수많은 변질 요인들이 있다는 게 문제다. 따라서 발효차는 덖음차의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다.
찻잎은 마지막으로 덖은 후 3개월 이내에 마실 차라면 이삼 일 지난 후 차를 볶아 포장하여 사용하고, 이듬해 차가 나올 때까지 사용할 차는 마지막 덖기를 한 후 한 달 정도 밀폐된 봉지에 담아 옹기항아리에 저장하였다가 필요할 때마다 볶기를 한다. 이때 옹기는 화학 유약을 발라 번쩍거리는 옹기보단 순수옹기항아리가 변질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 항아리의 밑바닥에 두세 겹 숯을 깔고 그 위에 차 봉지를 채우고 한지를 두세 겹 싼다. 그 후 다시 항아리 입구를 한지로 덮고 항아리 입구 둘레를 고무줄로 묶는다. 이때 더 이상적인 방법은 고무줄을 묶기 전에 잘 마른 죽순껍질을 두 세 겹 덮는 것이다. 필요할 때 옹기항아리에서 꺼낸 차봉지는 곧 볶아서 개별 포장한다.
개별포장은 은박지나 금박지 봉지에 차를 담고 바깥은 지통이나 양철통, 혹은 오동나무통에 담는다. 오동나무통은 가볍다. 그리고 안과 밖으로부터 오는 습기를 차단하는 효과와 공기유통이 미세하게 이루어지는 미묘함이 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이 오동나무로 장롱을 만들어 옷을 넣어 입었고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였던 것이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한 번 개봉한 차를 빠른 시일에 마시는 것이다. 구입한 차는 찻상에 두고 사용하여 상시적으로 마시고, 남은 차의 양이 적지 않으면 직사광선과 온도변화, 습기를 피해 차이외의 다른 냄새와 섞이지 않는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차통을 둔 장소 부근에서 담배를 피거나 방향제, 살충제 등의 사용은 금해야 한다. 음식냄새를 풍기거나 화장품이 부근에 있어도 안 된다. 대개 모든 음식을 가정에서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이 일상생활 습관이지만 차는 냉장고에 넣어 보관하면 변질을 가속화 시키는 원인이 된다. 차는 냄새와 습기의 흡착성이 강하다. 잘 밀봉되지 않은 상태에서 냉장고에 넣으면 다른 음식물들과 섞여 그 맛과 향을 잃는다. 냉장실에 두느니 차라리 냉동실에 두되, 꼼꼼하게 여러 차례 밀봉해두었다가 적당량을 꺼내어 먹는다. 먹을 때도 바로 먹는 것보다 상온에 잠시 둔 후 우려마시는 것이 낫다.
덖음차의 생명한도는 약 1년이지만 2년까지도 무난하다. 아무리 우수한 조건 속에 보관과 저장을 하였더라도 1년이 지나면 서서히 눈에 보이지 않게 자체변질을 시작한다. 그것은 아무리 보관과 저장을 잘한 햅쌀도 1년이 지나면 묵은 냄새가 나고 맛이 없어지며 벌레가 생기는 것과 같다.
 
 
| 차의 향・색・미를 마음껏 만끽하는 방법
좋은 차 만드는 법은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좋은 차 마시는 법은 있다. 변질된 차가 우리 몸에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차 마시는 법이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다과정에서 생긴 결함 또는 잘못된 보관으로 인해 변질된 차를 마시고 차에 대한 실망으로 차를 멀리하게 되었다는 이들이 있다. 모처럼 얻은 차의 세계를 등지게 된 셈이다. 변질된 차에 실망하지 않고 차가 가진 최고의 향・색・미를 마음껏 만끽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차를 내는 주관자 즉 팽주(烹主)는 주전자에 잘 끓인 물을 다관에 반 이상 붓고 한 이삼 분 후, 다관이 뜨거워지면 다관의 물을 유발에 버린다. 그리고 빈 다관에 차통의 차봉지에서 차를 적당량 꺼내어 넣고 뚜껑을 닫는다. 적당량이란 엄지, 검지, 장지 세 손가락이 닿을 듯 말듯 한 그 사이로 차를 집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 양이 1인분이다. 적당량을 정한 것은 차가 물보다 적으면 싱겁고 차가 많으면 떫거나 쓴맛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1분쯤 후 다관의 뚜껑은 반쯤 열고 차의 향을 음미한다. 이때 아무 냄새가 없으면 신선하지 않은 차이고 묵은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변질되고 있는 차다. 발효차가 아닌 한 반드시 이 절차를 거쳐야 된다. 변질되지 않은 차라면 뜨거운 물에 우린 후 찻잔에 차를 따라 첫 모금은 잠시 입안에 멈췄다가 천천히 마시며 음미한다. 다식은 대개 석 잔 이후 먹는다.
제대로 된 좋은 덖음차는 맑고 깊은 가을하늘 같다. 고향마을의 뒤안길 같은 정답고 그윽한 덖음차의 향기는 꿈길을 걷는 듯 삼매경에 이르게 한다. 여기에는 한없이 깊은 고소함이 있다. 차를 상당한 오랫동안 경험한 뒤에는 좋은 차를 느낄 수 있다. 좋은 차는 마시자마자 훈훈한 차 기운이 가슴을 휘돌아 오르고 귀 부근에 가벼운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건강에도 유익해서 우리 몸속의 독소나 노폐물을 제거하고 항암, 항염 작용을 하여 각종 질병을 예방한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이야기이다.
차의 효능은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억력을 돕고 창의력을 기를 뿐 아니라 정신을 편안하게 하여 사유 영역을 깊게 한다. 그런 까닭에 오랜 역사동안 불교의 참선 수행승들은 차를 생활화해왔다. 오죽하면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이 생겼을까. 차는 좋은 잎으로 정성들여 아홉 번 열 번씩 덖고 볶아서, 덖는 횟수와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횟수가 정비례한다. 좋은 차를 두세 잔 마시고 말면 찻잎에 송구하고 차 만드는 사람이나 팽주에게 미안한 일이다. 노동(盧仝)의 ‘칠완다가(七碗茶歌)’라는 당대의 명시도 이런 좋은 차를 배경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 노동 ‘칠완다가(七碗茶歌)’
一碗喉吻潤 二兩碗破孤悶 三碗搜枯腸 惟有文字五千卷
四碗發輕汗 平生不平事 盡向毛孔散
五碗肌骨淸 六碗通仙靈 七碗喫不得也 唯覺兩腋習習淸風生
첫잔은 목구멍과 입술을 적셔주고 둘째 잔은 외로운 번민을 씻어주네 셋째 잔 마른 창자까지 미치어 생각나는 글자가 오천 권이나 되고
넷째 잔은 땀이 살짝 솟아 평소의 불만, 땀구멍을 통해 모두 사라져 버린다네
다섯째 잔에 기골이 맑아지며 여섯째 잔엔 신선의 경지에 이르니 일곱째 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양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이네
 
 
지허 스님
1941년 전남 보성 벌교 출생. 1954년 전남 선암사에서 만우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59년 선암사 강원에서 사교과와 대교과를 수료하고 해인사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선암사 주지, 태고종 중앙선원장, 제7~11대 태고종 중앙종회의원 등 태고종단의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현재 금둔사 조실로서, 야생차밭을 가꾸며 한국 전통차의 맥을 고집스럽게 이어오고 있다. 저서로 『차-아무도 말하지 않은 한국전통차의 참모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