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비慈悲에는 비悲가 들어있는가

2014-02-10     불광출판사
오늘도 귀가 길에 발길이 아파트 옆 작은 수풀로 향한다. “츳츳츳츳….” 혀로 입천장을 차며 소리를 내본다. 밤이라 캄캄해 잘 보이지 않지만 부스럭 하며 약간 큰 노란 고양이와 까만 턱시도의 작은 고양이가 나타난다. 노란 고양이는 앞다리를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 자다가 깬 것 같기도 하다. 까만 새끼 고양이는 “애애~” 하며 귀여운 소리까지 낸다.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고양이가 “야옹”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소리를 낸다는 것을. 심지어 우리 집 고양이는 우리 집사람에게 “엄마!” 하며 끝을 올리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정말이다!
 
| 우리 사회 도처에서 토끼가 죽어가고 있다
‘오늘 하루 종일 태풍으로 강한 바람이 불었고 비까지 내린 끝이라 먹을 것을 먹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얼른 집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먹이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와 함께 약간의 먹이를 챙겨 다시 내려온다. 플라스틱 그릇 세 개에 먹이를 나눠준다. 어디선가 가장 경계심 강한 잿빛 고양이도 나타난다.
고양이들은 영역본능이 있기에 자연에서 이렇게 여러 마리가 같이 사는 경우는 많지 않을 텐데, 이들 세 마리 고양이는 우리 동 아파트 옆 풀숲 근처를 영역으로 해서 함께 살고 있다. 처음에는 인간으로 보면 사춘기 정도에 들어선 듯한 중간 크기의 노란 고양이와 잿빛 고양이 두 마리가 와서 살았는데, 얼마 전부터 먹이를 줄 때 어디선가 새끼 턱시도 고양이가 나타났다. 조금 큰 고양이들이 받아들여주었는지 이제는 함께 살고 있는데, 특히 노란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를 보살피는 모습이 역력하다. 먹이 주러 가거나 그냥 보러 갈 때, 때로 새끼 고양이가 귀여운 소리를 내며 풀숲 밖으로 사람 가까이 깡총거리며 나오기도 한다. 그러면 노란 고양이가 마치 야단을 치듯이 앞발로 새끼 고양이의 머리를 타다닥 때리며 경계를 시키는데 그 모습이 정말 유투브(YouTube)동영상 감이다.
어둠 속에서 고양이 세 마리가 쭈그리고 앉아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보니 문득 가여운 생각이 든다. 먹어야 되는구나! 먹어야 사는구나! 먹지 못하면 고통스러울 것이다. 먹지 못하면 살지 못할 것이다. 인간도 그러하지 않은가. 혼자 음식을 먹는 뒷모습은 경우에 따라 성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슬픈 느낌을 준다. 먹지 못하면 괴롭고 죽게 되는 것은 엄연한 실존적 현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야 하고, 싫은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하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병에 걸려 고통 받고, 늙게 되어 아름다움과 기운도 잃게 되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이 세상도 언젠가는 떠나야 하지 않는가.
요즘 신문을 보기가 겁이 날 정도로 연일 흉포한 사건들이 보도된다. 성적 욕구 등 자신의 욕구에 눈이 멀어 살인을 하고 심지어 특정한 목적도 없이 ‘묻지마’ 살인까지 한다. 아이들의 교실에서도 왕따와 크고 작은 폭력이 만연하고 있고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지는 안타까운 자살 뉴스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성인들은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여러 가지 심리적 또는 신체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8년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혼율은 평가방식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10년, 20년 전과 비교하면 크게 증가하였다.
예전에는 잠수함에 산소를 측정하는 기계 장치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아서,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언제 물 위로 올라와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잠수함에 토끼를 태웠다고 한다. 산소가 모자라게 되면 사람보다 토끼가 먼저 호흡곤란으로 죽게 되는데 그때 산소공급을 위해 물 위로 올라왔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 도처에서 토끼가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름대로 대책마련에 부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형제도의 집행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둥 화학적 거세를 해야 한다는 둥 여러 의견이 나오고, 상담전문교사를 확충한다거나 이혼숙려기간제도를 도입하는 등 여러 방안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원인은 갈수록 극으로 치닫는 현대사회의 경쟁적 구조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져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무한 경쟁의 시대이고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해도, 요즘 사회만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심각한 적이 또 있었을까? 지나친 경쟁으로 타인에 대해 적의를 갖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며 채찍질로 다그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평화와 행복을 경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사회의 구조적인 개선을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해야겠지만, 치열한 경쟁구조가 일거에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가 구조적으로 변화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우리의 사정이 매우 절박한 바가 있다. 그래서 먼저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필요한 일은 드센 경쟁구조 속에서 생활하느라 우리 마음속에서 바짝바짝 말라가는 자비(慈悲)의 씨를 살려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 진정성이 담긴 자비는 언제 우러나오는가
자비의 ‘자(慈)’는 사랑의 뜻이지만 ‘비(悲)’는 슬퍼함을 뜻한다. 어찌 보면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의미가 하나의 의미 속에 들어 있는 이유는 진정한 사랑은 진정한 슬픔을 내포하고 진정한 슬픔은 진정한 사랑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실존적 고통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이러한 실존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 때, 나나 나 아닌 존재나 모두 피할 수 없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을 때, 또 평화와 행복을 바란다는 것을 깊이 헤아릴 수 있을 때,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 대해 연민과 사랑이 함께 녹아있는 자비가 피어날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모든 존재의 실존적 현실에 대해 진정한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모든 존재의 실존적 현실에 진정한 슬픔을 느낀다면, 모든 존재에 대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슬픔을 담고 있고, 진정한 슬픔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고통 받고 싶어 하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노부모를 걱정하고 자식의 일로 애를 태운다. 집단 속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하고 크고 작은 일로 번민하기도 한다. 외모와 학벌 때문에 열등감도 가지고 있고, 돈 걱정도 끊이지 않는다. 몸이 아파 고통을 겪기도 한다. 또한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늙을 것이고 죽음을 맞아 이 지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나에게 미운 사람도 마찬가지고 잘난 체 하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갖는 실존적 고통에 대해 깊이 숙고하면 지하철 통로에서 스치는 사람도 따뜻하게 보인다. 또한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라면 설사 미운 사람이라고 해도 연민의 마음이 올라오며, 이러한 연민의 마음이 그 사람에 대해 사랑의 마음을 일으킨다.
오랫동안 불교에서는 자비를 함양하기 위해 자비명상을 가르쳐 오고 있다. 자신을 포함한 주변사람들, 나아가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기를 바라며 건강과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다. 단순히 건강과 행복과 평화만을 반복해서 기원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처음에 좋았던 자비명상도 자꾸 하다보면 무덤덤해지고 습관적으로만 반복하게 되어, 자칫 진정성을 담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될 수 있다. 반면에 자비명상의 대상을 떠올리며 그 존재가 갖는 실존적 현실을 깊이 관조하게 되면, 마음속에서 진정성이 담긴 자비가 우러난다. 그 대상에 대한 건강과 평화와 행복의 기원이 생생하고 따뜻하게 살아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자비명상을 실천하며 자비를 기르게 되면, 무엇보다 먼저 자비명상을 하는 그 마음에 자비가 충만하게 되어 평화와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사람들에게 좀 더 자비로운 얼굴, 말, 행동을 보이게 되니 우리 사회도 그만큼 따뜻하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김정호
덕성여자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한국건강심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대한스트레스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마음챙김 명상 멘토링』, 『조금 더 행복해지기』, 『스트레스는 나의 스승』, 역서로 『받아들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