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힘에 대한 믿음과 희망

농민작가 이종구

2014-02-10     불광출판사

대지의 손-삽 | 113x75x15cm | 한지부조에 채색 삽 | 2005
 

속-농자천하지대본-연혁 | 170x110cm |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 1984
 
과거 농민들에게 땅은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땅은 생활의 터전이자 영원한 고향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농촌은 거의 해체되었다. 이제 땅은 경제 논리에 밀려 대형마트에 판매대에 놓이는 야채와 과일을 대량생산하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는 농촌의 무너진 현실을 잊었고 수확의 기쁨을 잃었다. 이종구 작가의 작품에는 농촌의 현실과 고단한 삶이 기록되어 있다.
 
| 쌀 부대종이에 고향 사람들을 그리다
이종구 작가는 충남 서산 오지리에서 나고 자랐다. 오지리는 1970년대 말에 전기가 들어온 ‘깡촌 중에 깡촌’이었다. 그는 일 년 내내 손톱에서 까만 흙이 빠지지 않는 아버지의 거친 손을 보고 자랐다. 집안일을 도울 나이가 되면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꼴을 베고 콩을 삶아 소에게 먹였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주변 마을어른들 모두 농사밖에 모르는 농부였다. 지금도 그의 동생과 친구들은 오지리에 남아 농사를 짓고 있다. 아마 그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역시 농부가 되었을 것이다. 오지리는 그의 영원한 고향이자 작품세계의 뿌리가 되었다.
“농촌이 붕괴된 것은 농부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사회의 중심이 급격하게 옮겨 간 것 때문이죠. 오지리 사람들은 농부의 전형입니다. 저는 자라면서 농촌이 붕괴되고 해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제게 농촌의 현실에 집중하고 리얼리즘적 시각에서 오지리 사람들을 그리는 작업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1980년대 그는 농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와 오지리 사람들을 그림으로써 농촌사회와 그들에게서 삶의 가치를 빼앗은 권력과 폭력을 고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단한 삶을 캠퍼스에 담을 수가 없어 쌀을 담는 부대종이와 비닐부대를 화폭으로 삼아 초상화를 그렸다. 부대종이와 비닐부대는 농촌의 경제적 상징물이다. 부대종이 위에 그린 오지리 사람들의 초상은 이질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그의 리얼리즘적인 시각과 비판의식을 잘 보여줄 뿐만이 아니라 농촌의 현실과 농부의 삶에 담긴 슬픔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검은 대지-월출 | 97x162cm | 한지에 아크릴릭 | 2008
 

볍씨 | 지름 61cm | 밥상에 아크릴릭 | 1994
 
농촌의 현실을 다룬 그의 리얼리즘적인 예술은 민중예술로 분류되었다. 당시 예술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화 위주의 예술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이종구 작가처럼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민중예술이었다. 당시 시대 분위기는 민중예술을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폭력적으로 억압했다. 전시회조차 열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해서 전시회를 연다고 해도 득달같이 나타난 전경들이 전시회 입구를 가로막고 사람들의 출입을 일일이 감시했다. 하지만 그는 리얼리즘적인 예술관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농촌이 해체된 1990년대 이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땅의 정신과 얼굴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오지리 사람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농촌의 현실을 고발했다면 1990년대 이후에는 농촌의 현실 이면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추적했다. 사계절에 따라 변하는 농토의 이미지와 아버지의 초상을 결합한 <대지>(1997) 연작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농사의 의미는 단순히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노동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 크게 본다면 농사는 사계절의 순환에 대한 인간의 순응이다. <대지> 연작은 농부의 슬픈 현실과 잃어버린 농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들-늦가을> <아버지의 낫>(1992) <유산-아버지>(1995) 등은 농기구에 담긴 노동의 흔적과 역사를 담았다. 반면 <종자>(1996) 등의 작품에는 대지에 다시 씨앗이 뿌려지기를 바라는 그의 희망과 더불어 생명 순환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 오지리를 넘어 국토로
2000년대에 들어서 그의 작품은 다시 오지리로 돌아간다. <다시 오지리>(2003) 연작에서 그는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의 자리를 이어받아 농사를 짓고 있는 그의 친구들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농촌공동체가 무너진 이후에는 사실 제가 고발할 것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생명과 인간의 가치와 자연의 순환, 노동의 의미를 다루고자 노력했죠. <다시 오지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 친구들이거나 제 또래들입니다. <다시 오지리>는 여전히 오지리를 지키며 농부로 살아가는 친구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전작들에 비해 되도록 밝고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또 다른 소재는 바로 국토였다. 그는 직접 국토 곳곳을 답사하며 전통과 민족의 의미를 찾았다. 농촌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아닌 우리 민족의 삶과 의미를 거시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그에게 국토는 ‘오지리 사람들’이 모여 사는 커다란 공간이다.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2002)에는 우리나라 산세 전체가 한 화폭에 담겨 있다.
“산과 산 사이에 오지리 사람들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생각합니다. 민족과 민중의 삶은 국토에 스며있죠. 우리나라의 산과 국토를 그려 우리나라의 역사와 농민의 삶 전체를 조망하려고 했습니다. 압록강과 백두산까지 국토 곳곳에는 오지리나 대추리 사람들 같은 이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민중의 삶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고자 했죠.”
그는 이 시기에도 농촌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놓지 않았다. 오지리의 사계절 위를 길게 그림자를 끌고 날아가는 미군의 델타 항공기를 그린 <풍경-봄, 여름, 가을>(2009) 연작은 자본주의에 의해 무너진 우리나라 농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개심사 | 46x38cm | 캔버스에아크릴릭 | 2008
 
| 잠들어 있는 미륵보살을 보다
이종구 작가의 아내는 독실한 불자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농촌의 현실과 리얼리즘 예술에 집중하면서 불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국토를 답사하는 중에 수몰된 문화재, 석탑, 사찰 건축, 불교미술 등을 둘러보며 한국불교의 종교적 문화적 의미를 되새겼다. 특히 부여군 주암리에 있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20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은행나무는 백제 시대부터 천 년을 살아왔다. 그는 직감적으로 미륵보살이 잠들어 있다고 상상했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56억 7천만 년을 보낸 후 인간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 <잠자는 부처>(2007)는 그렇게 그려졌다.
또한 그는 전국의 사찰과 암자를 찾아다녔다. ‘간월암’과 같은 인상 깊은 사찰과 암자는 그의 예술 소재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는 불교에 관심을 두게 됐다. 불국사와 수덕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해 ‘탈계脫界’라는 법명도 받았다. 최근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그가 강의하는 안성 중앙대학교 캠퍼스 근처에 위치한 청룡사에 올라 예불도 올린다.
“주암리의 천 년된 은행나무를 보고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 은행나무는 백제의 흥망성쇠를 모두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제는 사라졌지만 중생들을 제도해줄 미륵보살이 그 아래 잠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에는 불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지금은 전국 여러 사찰과 암자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지금은 아내처럼 독실하지는 않지만 불교가 좋아요.”
도시에서 나고 자라 미니멀리즘이나 추상적인 작품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종구 작가의 작품들은 생경하다. 그의 작품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농민과 농촌의 현실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다. 방금 밭에서 일하다 온 것 같은 인물들은 무너져가는 농촌의 표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인물들의 얼굴 가득한 주름과 갈라진 손등은 당시 농촌의 현실을 막연하게나마 떠오르게 한다. 죽은 할아버지의 젊었을 때 사진처럼 낯설면서 애잔하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가 잊은 과거의 기록이자 잃어버린 가치에 대한 회상이다.
“예술은 현실을 고발하고 다루는 것이라고 저는 아직도 믿습니다. 그것은 예술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그려왔고 또 앞으로 그려갈 세계는 오직 땅의 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에 바탕을 둘 것입니다. 제 작업이 1980년대의 농촌의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면 제 제자와 후배들은 지금 우리 시대와 대중문화를 그려주었으면 합니다.”
 

이종구
1955년 서산 오지리에서 태어나 평생 농촌의 현실과 문제를 다룬 그는 ‘땅의 작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를 ‘2005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했다. 다양한 개인전과 기획전을 통해 리얼리즘적인 예술관을 보여주었다. 현재 중앙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