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행을 유발하는 현대 한국사회

범죄 증가의 원인과 불교적 해법 모색

2014-02-10     불광출판사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시민은 자유와 경제적 부를 한껏 즐긴다고 해도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2천여 년 전 인도의 중생과 다를 바 없이 욕망, 분노, 무지라는 삼독을 내뿜으며 십악(十惡)을 종종 범하는 중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생인 것은 폭행, 수뢰, 강간, 살인, 자살 관련 뉴스가 연일 보도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012년 3월 15일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발생한 형사범죄는 45만 여 건으로 지난 2000년보다 60%, 20년 전인 1990년과 비교하면 무려 250% 정도 급증했다. 살인은 2000년 964건에서 2010년 1,262건으로 좀 늘어났고, 강간은 2010년 2만 건 정도로 10년 만에 2배 이상 늘어났다. 폭행상해는 2010년 18만 여건으로 10년 전보다 360% 이상 폭증했다. 영국 경찰이 2009~2010년 10만 명당 살인과 강간 같은 강력범죄 발생률을 국가별로 분석한 자료에서 우리나라는 OECD 34국 중 살인은 6위, 강간은 11위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은 살인 33위, 강간은 34위로 안전한 편에 속한다. 한국의 자살률은 2010년을 기준으로 10만 명 당 33.5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이고, 이들 국가의 평균치의 2배가 넘는다. 위증과 무고(誣告) 역시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수백 배 많다는 통계 앞에 한국은 거짓말 공화국이 되었다.
 
| 감각적 쾌락 최다의 시대, 현대
초기불교 경전에 따르면, 2천여 년 전 인도의 중생은 십악 중의 하나 이상에 빠지곤 했다. 그 십악에는 살생, 절도, 음란, 거짓말, 이간질[兩舌], 욕설[惡口], 꾸민 말[綺語], 인색과 탐욕[慳貪], 질투, 사견(邪見)이 있다. 앞에서 말한 한국인의 형사범죄는 십악의 하나이거나 그 변형으로 보인다. 십악을 범함에 있어서 나이의 차이는 있겠으나, 정치적인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없어 보인다.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계율, 명상과 지혜로 이뤄진 자기 교육을 통해 서 열반에 도달하면 삼독(三毒)과 십악은 사라진다고 보았다. 붓다는 폭력의 여러 원인 중에서 감각적 쾌락(까마)을 강조했다. 감각적 쾌락에서 오는 폭력에는 살인, 가택 침입, 약탈, 도둑질, 매복 공격, 여성에 대한 폭행이 있고, 폭력의 수단에는 주먹, 몽둥이, 칼, 화살 등이 언급된다. 이에 왕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형벌을 가했다. 오늘날의 시민 중생은 붓다 시절의 중생보다 감각적인 자극을 훨씬 더 많이 받고 거기에서 더 큰 쾌락을 얻으려고 한다.
붓다는 제자 아난다와 나눈 한 대화에서, 폭력의 출발점을 감정(또는 느낌, 受)에서 찾기도 했다. 감정에서 애타는 목마름[渴愛]으로, 여기에서 추구로, 추구에서 다시 획득, 판별, 욕망, 탐착, 소유, 인색, 수호를 거쳐서 무기를 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유와 폭력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다면, 소유와 경쟁을 기본 원리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폭력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감정은 주로 대상과의 접촉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불교 경전에는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감각기관과 그 대상인 색(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촉(觸)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대한 상세한 기술과 경고가 수없이 반복된다. 시청각의 대상인 색과 소리를 ‘악마의 소굴’이라고 부른 곳도 있다. 소유 관계에서 생기는 폭력에 대해서는 서양학자들도 종종 언급한 바 있다.
현대는 감각적 쾌락에 있어서 역사상 최다의 시대로 보인다. 미디어 혁명과 인터넷 시대가 가져온 정보가 거의 무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산만하게 되었고, 문화는 선정적이고 외설적인 것으로 변했다.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의 『천박한 자들(The Shallows)』에 따르면, 이와 같이 산만한 시대는 중세 이래 지난 550년 동안 우리의 지적 생활의 중심을 차지해 온 책조차 이제 변두리로 내몰고 있다. 카는 말한다. 사람들이 웹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다 보니, “훑어보고, 건너뛰고, 멀티태스킹을 하는 데 사용되는, 뉴론(신경세포)들 간의 연결구조인 신경회로는 확장되고 강해지는 반면, 깊고 지속적인 집중력을 가지고 읽고 깊이 사고하는 데 사용되는 신경회로는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있다.”고. 카의 관찰대로, 인터넷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이 줄어드는 경향이 생겼다고 하면, 인터넷은 언어폭력이나 물리적 폭력의 증가에 상당히 기여했을 것이고, 우리 사회의 악성 댓글은 세계 제1위의 가구 인터넷 보급률(96.8%, 2010년)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탐욕이나 증오심에 의해서 뉴런이 흥분되는 것이 사라진 상태, 바로 그것이 열반이 아닐까?
 
자기 교육 중에 가장 유효한 방법의 하나는 스스로 부과한 규율을 따르고 때때로 명상함으로써 감각적 자극을 줄이는 길이다.
 
| 우리 시대는 디스토피아?
감각적 쾌락의 추구가 폭력으로 이어진다면 가장 위험한 행위는 성행위이나 유사 성행위일 것이다. 색과 소리 등의 자극에 대해 우리의 반응이 가장 뜨거운 행위, 곧 뇌의 수많은 뉴런에 불꽃이 가장 많이 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장에서는 성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헌법은 국민에게 혼인을 통한 성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명상을 중심에 두고 보면, 명상에 비교적 가까운 것이 경청이나 독서이고, 그 다음이 말하기, 그보다 더 먼 것이 인터넷에 몰입하는 것, 가장 먼 것은 성행위일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누리꾼들이 시청각 이미지를 즐겨 받아보고, 흥분하여 뉴런에 불꽃이 많이 일면 일수록, 이는 성적 쾌락을 닮아간다. 말하기는 독서보다 화자의 공격성을 더 쉽게 자극하는 것 같다. 언론 자유의 보장과 인터넷 사용의 증가는 거짓의 유포, 욕설과 막말의 확산과 직접적인 관계가 깊다. 탐욕이나 증오심에 의해서 뉴런이 흥분되는 것이 사라진 상태, 바로 그것이 열반이 아닐까?
우리 사회에 이토록 폭력이 확산된 것은, 왕, 스승, 아버지가 일체가 되어 전통적으로 누려오던 권력이나 권위를 잃게 되면서 폭력이 분산된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뿌리를 내리면서 왕이나 독재자, 가부장에 의한 직접적, 구조적 폭력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폭력의 총량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분산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 폭력의 자리에 시민 중생 간의 폭행상해, 욕설, 막말 등이 들어서고, 가부장제라는 구조적 문화적 폭력이 줄어들면서 부부간의 폭력은 늘어나지 않았을까? 스승의 권위도 엄격한 규율도 없어진 학교에는 학생들의 폭력이 자리를 잡았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도 아니고 경쟁의 공격성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지만, 군사부일체의 종말은 폭력을 분산시키면서 일인당 국민 폭력을 증가시킨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의 시민은 자유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 아래에서 재산을 소유하고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리면서, 경쟁에 이기기 위해 자본과 기술의 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혼인, 소유, 경쟁 그리고 언론의 자유에도 폭력이 내재해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인터넷 시대는 우리의 두뇌마저 변화시키고,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을 크게 훼손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터넷 시대는 유토피아의 반대인 디스토피아(dystopia)에 가깝다. 개개인이 더 사악해졌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삼독을 뿜어낼 기회가 더 많아지고 그 수단은 아주 편리해졌다는 의미에서이다.
오늘날 한국의 시민 중생은 본능의 면에서, 경쟁적 소유를 기본 원리로 삼고 있는 사회 성격의 면에서, 그리고 감각적 쾌락을 무한 공급하는 인터넷의 성격에서, 폭력의 근절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방법에는 경쟁의 완화, 법치의 확립, 자기 교육 등이 있다. 경쟁심을 규제하기란 어렵지만, 사회 복지의 확충을 통해서 범죄나 자살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초기불교의 수범수제(隨犯隨制, 도리에 어긋나면 그에 상응하는 계율을 제정하는 것)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죄형에 따른 형법 제정 역시 불가피하다. 인간속의 ‘동물’은 말로써 성폭행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도에게 복지 정책의 도입과 법의 제정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자기를 교육함으로써 통찰력, 공감과 동정심을 키우는 것이다. 자기 교육 중에 가장 유효한 방법의 하나는 스스로 부과한 규율을 따르고 때때로 명상함으로써 감각적 자극을 줄이는 길이다.
우리 불교도들은 이 시대의 악행 앞에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악행의 다양한 모습을 확인하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욕설과 거짓말,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왜 이렇게 급증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자비행의 첫 걸음이다. 염불, 간경, 참선 그리고 돈오점수나 돈오돈수라는 수행론을 평가하는 잣대는, 깨달음의 성취 여부에서가 아니라, 이것들이 십악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방지하는가에서 찾아야 한다. 친절하고 착한 사람, 통찰력을 갖춘 사람, 그리고 올바른 사회 제도를 만드는 데 기여하지 못하는 불교는 그 존재 가치가 없다.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이자 비폭력연구소 소장이다.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철학과 현실」 편집위원과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