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라 마음 따라] 텅 빈 것이 살아있다

2014-02-10     혜민스님

우리의 불성(佛性)은 텅 빈 채로 있다. 즉, 아무 것도 없는 채로 살아있다. 그런데 이것을 경험하지 않고 관념이나 생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마치 텅 빈 무언가가 따로 있다고 상(相)으로써 잡으려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無我)’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착각한다. 심지어는 ‘있다’, ‘살아있다’는 말에 사로잡혀 힌두교의 범아론적 가르침과 무엇이 다르냐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래서 ‘본래청정, 본래면목, 주인공’을 말하는 선불교를 포함한 대승불교 전체가 다 부처님 초기 근본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무아와 무자성을 깨닫고 난 후

그런데 그게 아니다. ‘없다’는 것은 중생들이 ‘몸, 생각, 느낌’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그 착각을 부처님께서 쳐내신 것이다.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이 홀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되어서 아주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따로 존재하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중생들이 ‘나’라고 집착하는 몸과 느낌과 생각의 관점에서 보면, 틀림없이 ‘무자성’이고 ‘무아’다.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무자성’이고 ‘무아’인 것을 깨닫고 난 후엔 어떻게 될까?

그 후의 일을 누군가가 진작 소상히 일러 주었더라면, 오랜 시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고 고생도 덜 했을 텐데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무자성이고 무아라는 것을 무언가가 살아서 안다는 사실이다. 내가 무아임으로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무언가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살아서 안다. 이것이 가장 큰 신비이다.

아무 것도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그 무엇도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분명 생각이 완전히 끊어지고 난 후에도, 무언가가 살아서 텅 빈 가운데에서 ‘무아, 무자성이구나’하는 것을 즉시 안다. ‘지금 바로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구나’,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말하듯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고로[以無所得故]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절대 관념이나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배고플 때, ‘아! 배고프구나’하는 것을 생각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 즉시 알 수 있듯, 그냥 무언가가 바로 안다. ‘나’라고 집착했던 것 그리고 무자성인 세상이 둘 다 텅 비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세상을 둘로 나눈 것은 오직 생각이었다는 것을.

| 천지가 그냥 텅 비어있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텅 빈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텅 빈 것을 아는 것은 따로 어떤 형상이나 자성을 가지고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텅 빈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앎과 텅 빔이 둘이 아니고, 텅 빈채로 있는 것이 살아서 안다. 즉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이 살아있고, 그것이 엄청난 지성(知性)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앎은 허공과 같이 텅 비었기 때문에 더럽혀질 수가 없다. 허공에다 아무리 똥칠을 해봐야 더럽혀질 수가 없는 이유와 같다. 또한 이 앎은 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 몸 안팎 따로 없이 안다. 앎의 관점에서 보면 내 어깨가 결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새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하등의 차이가 없다. 정말로 똑같은 앎이다.

즉 나무를 보면 바로 그 앎이 나무에 있다. 산을 보면 그 앎이 산에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무가 있다는 것을, 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텅 빔 그 자체다. 그리고 그 텅 빈 앎은 어느 한 곳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고 안팎을 다 투과한다. 천지가 그냥 텅 비어있고 그러기에 주와 객, 나와 세상을 동시에 포섭한다.

| 수행의 묘미

분명 여기까지 읽고 나면, 어떤 이는 또 관념으로 머리로 이해해서 나에게 따질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 ‘없다’고 하셨는데 어찌해서 ‘있다’고 하냐고. 없는 채로, 텅 빈 채로 있는 것도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반대로 텅 빈 것이라는 것을 또 다른 상으로 붙잡고 나서,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어떤 대상이나 목표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둘 다 문제이다. 생각 속에 갇혀 이해의 수준에서 바라보면, 이처럼 항상 텅 빈 마음과 그 텅 빈 마음을 경험하는 무언가가 따로 있다고 자꾸 이분화(二分化)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텅 빈 마음을 관념으로써 ‘내’가 얻으려고 하거나, 텅 빈 마음을 경험하고 나서도 ‘내’가 남아 있다고 오해한다.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오해를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후, 의식이 다시 깨어나 주・객을 포섭하는 앎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으로 상으로 자꾸 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자성, 무아임을 바로 아는 앎은 연기(緣起)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연기해서 일어났다고 하면 그 앎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 깨달음은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텅 빈 앎은 세상에 자기 혼자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텅 빈 마음이 깨어나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한다. 이것이 수행의 엄청난 묘미이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앎은, 그 텅 빈 마음은 부처도 알 수 없다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또 있다. 부처가 몸을 구중궁궐(九重宮闕) 속에 숨겼다는 도리도 여기에 있다. 이 자리를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으므로, 시자에게 빗장을 잠그라는 도리도 여기에 있다.

선불교의 ‘선(禪)’자를 파자해 보면 왼쪽에 ‘볼시(示)’와 오른쪽에 ‘홀로 단(單)’으로 이루어졌다. 즉, 선은 혼자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삼계(三界)안에 그 텅 빈 앎만 홀로 있다.

 

혜민 스님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 종교학 석사를 수학하던 중 출가를 결심하고 2000년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그 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 공부를 하며, 연구차 북경과 오사카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현재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햄프셔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젊은 날의 깨달음: 하버드에서의 출가 그 후 10년』이 있다.

페이스북 ID: 혜민스님 / 트위터 주소: twitter.com/haeminsun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