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선을 그리다

수원 참마음선원 사불수행

2014-02-10     불광출판사
오전 7시, 기계처럼 맞물린 삶을 살아야 하는 도시에선 출근을 앞둔 사람들이 부지런히 하루를 맞이하는 시간. 용인시 동백신도시에 거주하는 유재숙(52, 법성화) 씨도 이 시간이면 달콤한 잠자리와 모진 이별을 한다. 여느 주부들이 그렇듯 남편 김상길(57, 법공)씨의 출근을 돕기 위함이다. 아침상을 차리고, 남편 이 출근한 이후에도 쉴 틈 없이 청소와 빨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집안일에서 벗어나면 어느덧 시간은 오전 10시. 그녀는 붓을 잡고 지난밤 그리다만 불화 앞에 엎드린다. 붓을 잡는 그 순간부터 그녀는 평범한 주부가 아니다. 오전 10시의 유재숙 씨는 붓을 잡은 수행자다.
 
| 고려불화에서 시작된 전통 수행법
유재숙 씨의 수행은 붓을 들고 불화를 그리는 방식, 이른바 ‘사불(寫佛)’이라 부르는 수행의 한 형태다. 사불수행의 시작은 고려불화 중 경전 표지에 들어간 ‘사경화’ 초본이라고 보고 있다. 이후 도제식으로 스님들 사이에서 은밀히 전승돼 왔다. 과거 사불을 할 때는 출입을 모두 봉한 채 사불을 하는 스님의 시봉을 소임별로 배치하고 작품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또 아무도 그 과정을 볼 수 없었다. 다른 불교국가에서는 불화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경우가 거의 없다. 불화 자체가 드물다. 우리나라에서만 특화된 수행법이라는 얘기다.
국내에서 사불수행을 접할 수 있는 곳은 단 두 곳이다. 동산불교대학 불교미술학과와 수원의 참마음선원(주지 법인 스님)이 사불수행의 본산 역할을 하고 있다. 사불수행을 접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접하기 힘든 수행법이라는 반증이다. 양쪽을 오가며 수행자들을 이끌어 주는 건 참마음선원 주지법인 스님의 역할이다.
유 씨 역시 법인 스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불을 접하게 됐다. 3년 전 동산불교대학을 입학한 것이 계기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지만 배울 기회가 없었던 그녀의 눈에 불교미술학과라는 여섯 글자가 들어왔고, 망설임 없이 등록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불수행과 처음 인연을 맺은 뒤로 꾸준히 사불수행에 매진해왔다. 지금은 일주일에 두 번 참마음선원을 찾아가 다른 도반들과 함께 사불에 정진하고 있다.
 



유재숙 씨와 함께 찾아간 참마음 선원은 입구부터 정갈한 느낌이다. 2층 대웅전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가자 너른 마루에 펼쳐진 홍탱(홍색 불화)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행자들이 공동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작품이다. 크기는 가로 330cm에 세로 160cm. 압도적인 크기다. 붉은색 바탕 위로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 초(밑그림)가 앞으로 어떤 부처님께서 나투시게 될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이날 작품에 참여할 인원은 법인 스님을 포함해 총 4명이다. 평소에는 10여 명 가까운 수행자들이 거의 매일 작품에 참여한다. 4명 중 스님을 제외하면 둘은 3년차, 한 명은 1년차 수행자다. 수행경력에 따라 각자의 역할은 달라진다.
지난해 9월에 사불수행을 시작한 김초원(37, 서원, 수원 영통구) 씨는 불보살들의 광배 외곽선을 그린다. 1년차 수행자인 김 씨가 이 작업을 맡게 된 것은 광배의 외곽선이 작품 전체에서 선의 굵기가 가장 굵고 붓을 놀리는 연습을 하기 적당하기 때문이다. 3년차 수행자 두 명은 본격적인 선긋기에 나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착한 순서대로 작품을 시작한다.
이미 초를 통해 전체적인 그림은 나와 있지만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생동감도, 움직임도 없다. 수행자들은 검은 초에 덧칠하기 위해 금분에 정제수를 조금씩 섞어 생명수를 만들었다. 붓이 검은 선 위에 오르는 그 순간은 조심스럽다. 호흡이 멈춘다. 눈길이 붓길 위에 올랐다. 한 호흡만큼의 정적. 드디어 붓이 움직였다.
한 획, 한 획. 거침없이 움직이는 붓을 따라 선이 살아난다. 복잡하게 얽힌 동맥과 정맥을 따라 생명수가 흐르며 나무들이 살아나고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는 금빛 찬란한 이파리가 달리고, 문수보살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길고 짧은 금빛 동맥과 정맥이 더 얽히고설킬수록 만물이 기지개를 켜며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불보살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수행자들은 엄청난 집중도를 보였다. 선 하나하나를 위한 집중력이다. 그런 고도의 집중력에서 탄생한 선은 흔들림이 없다. 그저 곧게 뻗어나갈 뿐이다. ‘나’라는 존재마저 망각한 채 하나에 몰두하는 그 모습. 삼매다. 삼매에 빠져 불화를 완성해나가는 그 공간에는 오직 조용한 명상음악만이 흐를 뿐, 그 어떤 말 한 마디도 듣기 힘들다. 어떻게 사불을 수행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과정에 있었다.
“수행자가 집중하지 않고 호흡이 흐트러지면 그 순간 바로 선이 흔들립니다. 가차 없지요. 그래서 더 호흡에 집중해야 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집중이 요구되는 수행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거예요.”
법인 스님의 말처럼 삼매에 빠져 불화를 완성해나가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사불의 밑그림인 초를 그릴 때에도 반드시 명상이나 독경과 같은 수행과정에서 얻은 영감을 토대로 한다. 그래서 창의적일 수 있으며, 작품이자 수행의 결과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수행 원력을 군법당에 회향하다
이처럼 철저한 집중을 동반한 수행인 사불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왜 쉽게 만나기 힘들어졌을까? 법인 스님은 그 이유로 일제강점기를 들었다. 그 당시 일본인들이 수많은 사찰의 문화재급 후불탱화들을 일본으로 가져갔고,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급하게 만든 후불탱화가 어마어마하게 양산됐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행의 과정은 생략됐고, 사불수행자들은 좌절했다. 그런 시기를 거치며 사불수행이 설 자리를 잃었다. 해방 이후에는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불화=생산품’의 공식이 성립돼 버린 것이다. 맥이 끊겨가던 사불수행은 석정 스님을 비롯한 일부 스님들을 통해 겨우 전승돼 왔다.
그렇다면 사불수행은 수행자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선원에서 가장 고령임에도 가장 놀라운 집중력을 보였던 김준기(67, 현광, 안양 평촌)씨는 잠시 미소를 머금었다. “화두 대신 붓을 들었을 뿐입니다. 불화에 집중하는 것이 너무 좋아 매일 8시간씩 하고 있어요. 사불을 하기에는 기력이 달리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즐겁지요.” 초보 수행자 김초원 씨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본래 잡생각이 많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잡생각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 스스로가 변화를 겪어보니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도 선원에 다니게 하고 있어요.”
사불수행의 장점은 내 수행의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공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도 크다. 그래서 초심자들에게 권하기 좋은 수행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참마음선원은 수행을 수행으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결과물로 탄생한 불화를 군법당에 보시하고 있다. 군법당 중에는 시설이 열악한 곳이 많다. 심지어 불상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후불탱화조차 갖추지 못한 곳이 허다하다. 이런 현실을 전해들은 법인 스님과 수행자들이 후불탱화보시에 나선 것이다. 2007년 11월부터 시작된 후 불탱 보시는 전국 108개 군법당을 대상으로 10년 간 이어질 계획이다.
참마음선원에서 만난 수행자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불수행을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사불수행을 제대로 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태부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불수행은 분명히 장점이 있기에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진가를 알아봐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만의 전통 수행법이기에 사불수행은 분명, 꽃을 피울 것이다. 그날이 오길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