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형 배움을 넘어 존재형 배움으로

2014-02-10     불광출판사
소유형 배움을 넘어 존재형 배움으로




요즘 스펙을 쌓기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워야만 하는 청년들의 삶이 무척 고달플 것 같다. 끊임없이 배운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 배움이 한 인간의 인격적인 성장이 아닌 기술적인 지식의 추가로만 이어진다면, 그 배움의 과정은 흥미롭고 아름답기보다는 고통스럽고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은 경험으로 바뀔 수도 있다.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닌 나라는 존재를 위한 배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 소유하지 말고 체득하라
얼마 전 AT&P라는 회계법인의 정종철 대표회계사를 만난 적이 있다. 회사 독서시간에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를 직원들이 읽은 계기로 연락이 닿아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회계사라는 전문직이 주는 기대와 달리 이 분은 독특하게도 ‘고졸 회계사’다. 사실 회계사가 꼭 대학교를 졸업할 필요는 없지만, 한국의 회계사는 대졸 또는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들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 어렵다는 회계사 시험을 볼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사정으로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정종철 대표는 회계사가 되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수십 종의 서적을 구매했고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종철 대표는 분명히 한국어로 되어 있는 표현인데도 무슨 뜻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어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책을 다 버리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을 무렵, 그 당시 그가 감명 깊게 읽었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뜻밖의 실마리를 주었다고 했다.
바로 배움에도 ‘소유형 배움’과 ‘존재형 배움’이 있다는 순간적인 깨달음이었다. ‘소유형 배움’을 그는 ‘실제로 활용하거나 필요가 있기 보다는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배우는 것’이라 정의한다. 반면 ‘존재형 배움’이란 ‘무언가를 배우는 것 그 자체가 존재의 본질과 성격에 스며드는 배움’이라는 것이다. 불현듯 그는 그만의 ‘페이퍼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세웠다. 회계와 재무의 원리를 지식으로만 소유하지 말고, 존재적으로 체험하고 이해해보자는 결심이었다. 그는 실제 회사가 하는 모든 재무와 회계 처리 방식을 가상으로 수행했다. 예를 들어 주주총회 공고를 직접 만들어 벽에다 붙여놓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이사회의 재무결산 보고를 하는 역할을 실제로 수행했다. 과정에서 모르는 개념과 궁금한 것은 도서관과 선배를 찾아가 해결을 했다. 그렇게 ‘존재형 배움’을 추구했던 그는 지금 한 회사의 대표회계사로서 당당하게 ‘존재형 회계’를 멋지게 전파하고 있다.
나도 비슷한 경우다. 내 학부 전공은 한국사였다. 고등학교 시절 시험공부가 지겨워 잠시 한눈을 팔고 읽었던 사마천의 『사기』가 너무나 재밌었다. 곧이어 우연하게 접했던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내게 역사라는 상상력 넘치는 공간에 뛰어들기에 충분한 자극을 주었다. 역사라는 과목의 특수성 때문에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기능적인 배움보다는 진리를 찾아가는 탐색적인 배움이 주를 이루었다. 예를 들어 ‘금석학’이란 수업은, 종이나 비석 등에 새겨진 문구를 통해 사료가 무척 부족한 당대의 상황을 파악해보려는 역사 접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돌 비석인데, 화선지에 정성스럽게 탁본을 해 새겨진 글자를 종이 위에 옮겨 놓으면 새로운 관점이 열리게 된다. 강의실과 방에 글자를 옮겨 놓고 몇 시간이고 해석할 수 없는 글자(한자)를 뚫어지게 보곤 했다. 그러다가 끝내 발견한 글자의 의미란! ‘고대사료강독’이란 수업에서는 삼국유사 와 삼국사기 원문을 서로 읽어가며 해석을 하는 시간이었다. 압축적으로 표현된 내용을 따라 가다보면 필히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했다. 뜬금없이 나타나는 ‘어느 날 왕궁 앞에 사자가 나타났다’와 같은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지를 즐겁게 상상하곤 했다.

| 우리의 존재가 아름다운 이유
역사를 전공해서인지 내 배움은 앞서 말한 소유형 배움이라기보다 존재형 배움이었다. 나중에 결혼을 하면 아내에게 따뜻한 마사지를 해주고 싶어 난데없이 ‘스포츠마사지 1급 자격증’ 과정에 신청해 3일 동안 스포츠마사지를 배운 적도 있다. 마사지라는 것이 자신의 에너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라 한번 하고 나면 급격히 에너지가 떨어지는 어려움 때문에 생각보다 활용을 못하는 것은 아쉽다. 하지만 마사지라는 새로운 분야를 접하고 어떻게 손의 움직임을 따라 뭉쳤던 근육이 신기하게 풀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출판이란 분야도 무척 궁금했다. 출판사 직원도 아니었지만 출판이나 인쇄에 대한 책을 구매하고 도서관에서 빌려 본 것만 해도 20권이 넘었을 것이다. 어떤 목적이 아니라 호기심이 가고 궁금한 부분을 해소해가는 과정 자체가 내게는 즐거움이었다.
이러한 존재로서의 즐거움, 과정 자체의 즐거움이 구체적인 결실로 연결된 것도 많다. 출판과 관련된 배움은 결국 ‘에딧더월드’라는 사회적 출판사를 만들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왜 사회적으로 유익한 콘텐츠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에 결국 그동안 존재형 배움으로 즐거웠던 출판을 직접 실행해보게 됐다. 그렇게 나왔던 책 중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이나 『지속가능한 미래예측 툴킷』 같은 경우는 교육과학기술부 우수도서나 지속가능발전교육 우수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와 같은 시민 기자활동을 통해 배우고 실천했던 저널리즘도 나중에는 첫 직장인 유엔 산하기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학부 졸업 후 한국사 전공으로는 웬만한 기업에 입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중국어를 배워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갔던 중국에서 안타깝게도 당시 ‘사스’라는 전염병이 창궐한 적이 있다. 등록해 다니던 학교가 폐교를 하고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귀국을 하던 시기에 나는 시민기자로 남기로 결정했다. 폐쇄된 학교에 들어가 취재도 하고, 중국인들의 반응을 「오마이뉴스」에 현지 소식 등으로 전하면서, 일간지에서도 인용하는 중요한 취재원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른 살에 처음으로 입사지원서를 내게 된 곳이 유엔거버넌스센터였다. 당시 채용공고가 났던 분야는 홍보담당이었다. 지원서를 제출하면서 중국에서 썼던 기사며 그동안 시민기자로 활동했던 내용을 모두 출력해 함께 제출했다. 운이 좋았을까. 최종 면접까지 갔는데, 다른 한 명의 지원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니 외국 유명 대학원을 졸업했고, 당시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분이었다. 갑자기 나 자신이 초라해졌지만 면접에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나에게 최종 합격 통지가 왔다. 나중에 채용담당자에게 “왜 내가 뽑혔나요?”라고 물어보니 “김정태 씨는 제출한 기사 자료를 보니깐 확실히 홍보담당자로서 역량이 충분히 보였어요. 다른 지원자는 스펙은 출중한데, 과연 보도자료를 잘 쓸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거든요.” 존재형 배움으로써 글 쓰는 것 자체가 좋아 써가던 기사가 내게 확실한 힘을 발휘했던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다.
지금도 내 배움은 여전히 존재형 배움을 지향한다. 존재형이란 지금 당장의 쓸모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학습이나 배움을 말하지 않는다. 호기심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나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선택하는 신중한 배움이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무엇을 어떻게 배우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역사를 전공했지만, 국제학과 경영학을 새롭게 전공했고, 지금은 적정기술과 디자인까지 함께 융합해가고 있다.
인생은 복잡하다. 그렇기에 배움과 학습도 단편적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회의 변화 속도 역시 과거와는 다르다. 소유형 배움은 앞으로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렵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을 존재의 아름다움을 존재형 배움으로 빚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흥미로운 도전일 것이다.

김정태
사회혁신 투자컨설팅 MYSC에서 근무하고 있다. 유엔거버넌스센터 홍보팀장으로 일하며 사회문제와 국제이슈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중심의 사회를 위해 적정기술을 연구하며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인간중심의 기술 적정기술과의 만남』 등에 공저로 참여했으며, 새로운 사회에 적응한 청년 후배들을 위해 베스트셀러가 된 『스토리가 스펙을이긴다』를 쓴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