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과 스노우맨

2014-02-10     불광출판사

운문사 도량에도 겨울방학이 찾아왔다. 학인들은 자기 절로 돌아가는 게 그렇게도 좋은지 하루 종일 싱글벙글한다. 학기 내내 도량을 가득 채웠던 학인들의 독경소리가 빠져나간 자리가 허전하다. 겨울은 고요하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준다. 세상이 다복하기를 바라며 기원해본다.
 
| 버리는 연습
겨울방학 하루 전날. 온 도량이 부산하다. 학인들은 대청소하며 도량 구석구석 깨끗하게 하고, 개인 다락장과 정통(목욕탕)장에 있는 옷가지며 책, 그리고 사용하는 물품들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여름옷과 춘추옷, 공양 받은 물품들, 지금 당장 쓰지 않는 물건들은 잘 싸서 부칠 것은 부치고, 필요치 않은 물건들은 버리거나 나누어 준다. 파제간탐破除慳貪, 자기 것을 아끼고[慳] 다른 사람의 것을 욕심내는 마음[貪]을 제거하고 버리는 것이다. 혼자 살아도 있을 것은 다 있어야 된다. 그러나 최소한의 꼭 필요한 것만 빼고는 쌓아두지 않는다. 난 그것이 수행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걸망 하나 메면 그뿐! 잘 안되기는 하지만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면 마음도 가벼워지고 몸도 개운해진다. 나도 습관처럼 철마다 버리는 연습을 한다. 그래도 쌓이는 물건들이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늘어나고 무거워진다. 나이 들수록 가벼워지고 작아지기를!
드디어 방학 준비 완료. 원주실 뒷뜰에는 택배로 부칠 바나나 박스와 과일 상자들이 포장되어 차곡차곡 쌓여있다. 짐 싸고 소포 부치는 데는 스님들이 제일인 것 같다. 요즈음이야 모두 택배 박스로 부치니 꼼꼼하고 야무지게 짐을 포장할 일이 없어졌지만 얼마 전만 해도 짐 싸고 포장하는 데는 스님들이 최고였다. 특히 학인스님들이나 선방스님들은 걸망 살림, 박스 살림하며 철철이 짐을 쌌다 풀었다 하기 때문이다.
방학하기 전날 밤 대중들이 모여 방학공사를 했다. 입승스님이 방학기간과 남는 인원수, 그리고 개학날 저녁공양시간 전까지 귀사하여야 하고, 어길 때는 학칙 몇 조에 의해 벌칙을 받는다는 내용과 전달사항까지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이어지는 학장스님의 훈시사항.
“‘우리 상좌 강원 보냈더니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말 들을 수 있도록 은사스님 잘 도와드리고 학비도 많이 타오고, 잘 보내다 와요. 방학이라 해서 책 아주 놓아버리지 말고…. 알았나요?” “네.” 초등학생들처럼 큰 방이 떠나가라 우렁차게 대답한다. 오늘 밤은 아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난 은사스님이 여기 계시니 달리 갈 곳이 없다.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어디든 갈 수 있다. 매인 곳이 없으니 자유롭다. 규칙적인 대중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각자의 절에서 지내는 것이 학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자유이리라. 물론 다른 스님들과 함께 사는 또 다른 대중사찰이야 예외겠지만. 은사스님이 계시는 각자의 절에 가면 또 다를 것이다. 방학 때마다 학인들은 각자의 절로 돌아간다. 아직 사미니 학인이기 때문에 여기보다 더 바쁘게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생활이라는 틀과 구속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으로 마냥 즐겁다. 너무 자유로우면 게을러서 방종하게 되고, 구속하면 긴장하게 되고 불안하다. 강원생활에서 방학은 자유와 구속 사이에 적당한 여유를 주는 것 같다.
신나는 겨울방학. 모두 싱글벙글 환한 모습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티격태격 다투다가도 돌아서면 금세 “하하, 호호” 한다. 한 학인스님이 도반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제발 철 좀 드세요.” 도반스님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더니 한참 만에 손에 철사 한 개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하는 말 “자, 나 철 들었다. 어쩔래?” “….” 산에 살다보니 일일이 따지지 않고 단순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학인들하고만 살아서 그런가? 나도 정말 철이 안 든 것 같다.
드디어 방학 날 아침. 공양을 먹는 둥 마는 둥.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며 종무소 앞에 전부 모였다. 대중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죽비소리에 맞춰 꾸벅 절하는 학인들의 표정이 설렘과 기쁨으로 환하다. “조심해서 건강하게 잘 다녀와요. 방학이라고 공부 멀리 하지 말고, 개학날 잊어버리지 말고.” 강사스님들의 당부다.
 


운문사에 쌓인 눈이 유난히 하얗다. 경내 곳곳에 심은 나무에는 눈이 반짝이며 지붕도 두툼하게 눈짐을 진다. 겨울방학을 맞아 학인스님이 빠져나간터라 더욱 고요하다.
 


눈길을 걷는 스님 뒤로 발자국 하얗게 남는다. 길의 끝이 어디있으랴. 그저 걸을 뿐이다.
 



학인스님이 방학을 맞아 자기 사찰로 돌아가고 눈이 오면 빈자리가 더욱 드러난다. 눈 쌓인 항아리는 스님의 공양 재료가 담긴 것이다. 스님들이 돌아올 때까지 쉬이 열리지 않는다.
 
| 겨울은 꿈꾸듯 찾아오고
학인들은 걸망을 등에 지고 도반들끼리 잿빛 승복을 휘날리며 구름문을 나서 바람처럼 떠났다. 뭐가 그리도 급한 지 첫차를 타기 위해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도 않은 눈 덮인 푸른 솔숲길을 걸어간다. “스님은 어디로 가요?” “은사스님 계신 절로 직행해야지요.” “강사스님은 어디 가시는데요?” “갈 곳이야 많지, 오라는 데가 없어 그렇지.” “모처럼 한가하시겠네요. 저희들이 속 썩이지 않아서….” “알긴 아네.” “그럼요. 스님! 방학 동안 많이 드시고 살 좀 찌세요.” “그러게. 은사스님 잘 도와드리고, 기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봐요.” “네, 근데 강사스님! 저희들 보고 싶어도 참으세요. 히히.”
그렇게 왁자지껄 학인들이 떠났다. 1학년 치문반이 남아 있긴 하지만, 들어오는 사람은 별로 표가 안 나도 나간 사람은 금방 표가 난다. 갑자기 세 반이 다 떠나가고 나니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처럼 구름문이 썰렁하다. 40일 간의 겨울방학 동안 남은 치문반 스님들은 소임을 짜고, 자비참법 기도를 하며, 또 어떻게 방학을 잘 보낼 것인지 나름대로 온갖 계획을 거창하게 세운다. 봄방학, 여름방학도 있지만, 겨울방학이 제일 고요하고 한가하다. 하여 난 겨울방학을 제일 기다린다.
학인들이 다 떠나고 난 구름문의 겨울산사는 적막하고 쓸쓸하다. 겨울산사에 하얀 쌀밥 눈이 다복다복 내린다. 온 세상이 모두 다복하기를 염원해본다. 난 이번 겨울방학도 구름문에서 보낼 것이다. 가끔 여행도 가고 책도 보고, 절도 하면서 고요히 쉬리라. 남은 학인들은 방학 때 금당에서 생활한다. 방학이지만 나도 학인들과 함께 사는 동안은 새벽예불을 하고, 아침마다 발우를 펴며 또 기도를 할 것이다.
유일하게 군불을 때는 금당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큰방이다. 운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요사채인데 비로전과 마주보고 있다. 새벽 입선시간, 문을 열면 바로 앞에 비로전 꽃 창살문이 촛불에 일렁이며 꽃잎처럼 하늘거린다. 몇 해 전, 까맣게 때가 묻은 금당 나무기둥의 무늬결이 하도 멋져서 탁본을 하여 운문사 달력에 넣은 적도 있었다. 찬 겨울밤, 금당 아궁이 속에서 타닥타닥 별빛이 탄다. 밖은 온통 하얗고, 밤도 하얗게 빛난다. 따뜻한 장판방에 학인들이 책상을 들이고 소리 내어 경을 읽는다. 학인들의 독경소리가 쟁글쟁글 청아하다. 나도 지금 이 순간 좌복 위에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겨울날 눈이 내리면, 나는 남은 학인들에게 영화 ‘스노우맨’을 보여 주곤 했다.
“눈보라치는 푸른 밤하늘 저편, 하얀 눈사람 손을 잡고서 걷네.” 회색빛 하늘 저편에서 노래가 아름답게 흐르고, 눈이 펄펄 날리는 북극으로 눈사람과 손을 잡고서 날아가는 꼬마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나도 그런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오늘 밤 산사에 또다시 눈이 내리고, 스노우맨이 찾아왔다. 지금은 떠나갔으나 어디에선가 학인들의 재잘거림과 맑은 웃음소리 여전히 들려오는 것 같다. 눈사람이 녹을 때 안타까워하던 그 한숨소리도.
아침 산책길. 극락교 앞에 스노우맨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말없이 서있다. 눈도 삐뚤 코도 삐뚤. 학인들이 청소하다 눈을 뭉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서로 한 주먹씩 눈을 뭉쳐 들고 던지고 받으며 장난을 친다. 영락없는 철부지 개구쟁이 모습이다. 눈싸움이 끝난 뒤 스노우맨과 함께 사진 한 컷 찰칵! 우리는 모두 이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있는 스노우맨이다. 난 이번 겨울방학도 스노우맨과 함께 울고 웃을 것이다.
 
 
진광 스님
청도 운문사 승가대학 학감. 1977년 명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운문사 강원 대교과를 마쳤다. 이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휴스턴에 있는 ‘Southwest Zen Academy’에서 선禪수련을 했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미학 미술사를 졸업하고 철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30여 년 가까이 솔바람 맑은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학인스님들에게 부처님 경전을 가르치며, 산을 벗 삼아 소욕지족의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2008년 평소 수업 시간에 학인스님들에게 읊어주던 시에 배경음악을 담아 시낭송집 <구름 나그네>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