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로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

악기장 임선빈

2014-02-10     불광출판사

그의 인생과 북 이야기는 그야말로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우리의 애잔한 현대사의 아픔을 관통하며 최고의 북을 만들기 위해 바쳐온 53년의 세월, 미니시리즈 10부작 분량은 족히 나올 법하다. 소아마비와 청각장애라는 중복장애를 딛고 최고의 북 장인으로 우뚝 선 악기장 임선빈(64) 선생을 만나본다.
 

사물놀이북
 
| “오늘부터 북 만드는 거 배워라”
임선빈 선생은 1949년 충북 청주에서 3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25전쟁 때 피난을 가다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비록 몸에 장애는 있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그러나 딱 11살 때까지만이었다. 직원 30명을 거느린 철공소 사장이었던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면서 가족은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야반도주하듯 도망쳐나와 터를 잡은 곳은 서부이촌동의 한강다리 밑 쓰레기 매립지였다.
한 사람이라도 먹을 입을 줄이기 위해, 막내인 그는 근로재건대에 맡겨졌다. 낮에는 넝마주이가 되어 종이를 줍고, 저녁에는 깡통 들고 밥을 얻으러 다녔다. 집에 있어봐야 허구한 날 굶기 일쑤지만, 그나마 찬밥 한 덩어리라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날마다 무지막지한 구타가 이어졌다. 다리가 불편하니 동작이 느려 종이 수거량도 얻어오는 밥도 적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매질로 돌아왔다. 하루는 귀를 잘못 맞아 급기야 오른쪽 귀의 청력을 잃게 되었다.
“이러다 맞아 죽겠다 싶어, 용산역 개구멍 통해 열차 타고 무작정 도망을 갔어요. 배가 고파 내린 곳이 순천역이었고, 밥을 얻으러 걷다보니 여수 가는 길에 덕양이라는 곳에 장이 섰어요. 오래 걸은 데다 허기에 지쳐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졸고 있는데, 돌멩이가 머리로 날아와 잠이 퍼뜩 깼지요. 앞을 보니 제 또래 꼬맹이들이 ‘거지~ 거지~ 상거지~’ 하며 놀려대고 있는 거예요. 제가 봐도 머리부터 옷, 신발 등 상거지가 따로 없었죠. 그때 어떤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물리치더니, 집이 어디냐고 묻고는 자기를 따라가면 밥도 먹여주고 용돈도 주고 기술도 가르쳐주겠다는 거예요.”
노인은 그에게 국밥 두 그릇을 시켜주고, 냇가에 가서 씻긴 후 신발과 옷까지 사 입히고 나서 대구 칠성동 공방으로 데려 왔다. 그 노인이 바로 북의 대가 황용옥 선생이며, 덕양 우시장엔 북가죽을 만들 소를 사기 위해 온 것이었다. 처음 두 달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는 밥 먹으며 잠만 잤다. 그러던 어느 날 창문에 달빛이 비치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어머니 품이 그립고 마음이 허전했다. 방안에 만들어놓은 북이 눈에 띄어 무심코 두들겨보았는데, 그 첫 소리가 가슴을 휘몰아치며 전율을 일으켰다. 다음 날 아침, 스승이 불러 “어젯밤 북 쳤냐?” 묻고는 한마디 이른다. “오늘부터 북 만드는 거 배워라.”
 

안양 시민의 소리북
 
| 스승이 전해준 장인정신
북 만드는 일은 끝이 없었다.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중노동이었다. 원목을 직접 켜고 잘라서 북통을 만들고, 탄력 좋은 가죽을 얻기 위해 소는 직접 잡아 가죽을 벗겼다. 몸이 불편해 고된 일을 따라가지 못하면 직원들로부터 호되게 욕을 먹었다. 그럴 때마다 황용옥 선생이 나서 방패막이가 돼주었다. 그리고 기술과 소리의 원리를 이해할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알려주곤 하였다. 어느 날은 지나가다 스승과 직원이 나누는 들었다. “왜 저런 상거지 병신을 데리고 오셨습니까?” “저 놈은 거지 될 애가 아니다. 눈초리를 보면 알 수 있어.”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북일을 게을리 할 수 없었어요.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항상 게시판에 전시되었으니 그나마 손재주가 있는 편이고, 몸은 불편해도 눈썰미가 좋고 머리 회전이 빨랐어요. 스승님 밑에서 7년 정도 있다 보니, 몇 가지는 혼자서도 기술이 되고 손님들 주문은 맡을 정도가 됐어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드디어 스승님을 따라 속리산 법주사 법고를 만들기 위해 동행하게 됐지요.”
스승은 그와 함께 목욕재계하고 삭발까지 시켜주며, “오늘부터 일체 다른 생각 말고 마음 속으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만 찾아라.” 하였다. 법고를 만드는 3일 동안, 가죽을 늘리기 위해 북줄 잡아당기는 일을 맡으며 오직 관세음보살 염불만 했다. 완성된 법고가 기대 이상으로 좋은 소리를 내자, 스승은 무척이나 흐뭇해했다. 그러나 그 작업이 스승과 함께 한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 얼마 후 스승이 갑작스레 병석에 누워 운명하였다. 공방 직원들은 만들어놓은 북과 재료들을 모두 챙겨 뿔뿔이 흩어졌고, 그만 홀로 남게 되었다.
“아무 것도 없으니 혼자서 북 만들 재간이 없는 거예요. 몇 날 며칠 방에 틀어박혀 궁리하다가, ‘그래 북 만들면서 관세음보살님 찾으며 마음은 편했으니 출가를 하자’고 결심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팔공산 파계사에 올라, 어느 전각 처마의 용머리와 마주쳤는데 발을 떼지 못하겠는 거예요. 북통에 단청 문양을 그려 넣으면 색다른 북이 탄생할 것 같아 가슴이 설레었죠.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출가의 뜻을 접고, 스승님과 호형호제하던 김종문 선생님을 찾아가 저를 받아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렸죠.”
 

법고
 
| 손의 떨림으로 소리를 듣다
그는 북에 있어서만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최고의 북을 만드는 것만이 스승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초로 북에 단청 문양을 넣어 획기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만든 북을 받기 위해 줄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김종문 선생 문하에 10여 년간 있으며 부족한 기술을 빠짐없이 익혀 갔다. 어디에 북 잘 만드는 이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곧바로 찾아가 그 비법을 배워야 직성이 풀렸다.
20대 중반 무렵이었다. 광주의 박일호 선생이 판소리북은 최고로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가 문을 두들겼다. 한 수만 가르쳐달라고 애원했으나, 차비를 주며 돌아가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3일 동안 대문 밖에서 쭈그려 자며 기다리니, 선생의 부인이 끈기도 좋다며 안으로 불러들였다. 선생은 화두를 던지듯, “자네, 양잿물 써봤나?”라는 한 마디를 던졌다. 고수들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비법의 실마리가 스르르 풀려나갔다. 돌아와 몇 번의 실패 끝에 가죽의 색깔과 소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북통을 원통으로만 했는데, 쪽으로 이어서 만드는 곳이 대전에 있다고 하여 한걸음에 달려갔다. 북통 만드는 법을 배우며, 또 북의 전체적인 작업을 가르치며 그곳에 눌러앉았다. 대전에서 대북 작업을 하며 그의 명성은 높아져갔다. 그때 참여하여 만든 대북이 청와대 춘추관 북, 통일전망대 통일북, 88서울올림픽 북, 대전 엑스포 북 등이다. 기술의 완성을 이루고 북의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이후 방짜유기장 이봉주 선생의 아들이 운영하는 공방에 스카웃되어 안양으로 올라왔다. 1997년 그는 역사에 남을 대북을 3년에 걸쳐 완성한다. 울림판 2m 40cm의 국내에서 가장 큰 북, ‘안양 시민의 소리북’이다. 이를 계기로 1999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0호 악기장으로 지정된다.
북장이로 살아온 지 53년, 오직 북에 매달려온 세월이었다. 그가 농담조로 “북 만드느라 아들은 하나밖에 못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대북이나 법고를 만들 때는 아내와의 잠자리를 피하고, 아침저녁 찬물로 목욕재계한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북일에만 집중한다. 그가 만든 북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탁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장애 덕분이다. 어렸을 때 청력을 잃은 오른쪽 귀를 대신해 왼쪽으로만 소리음을 잡다보니, 너무 혹사한 탓에 그마저도 청력을 상실했다. 보청기를 끼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대북 작업을 할 때는 보청기를 아예 빼버려요. 북의 소리를 잡을 때, 한 손으로 북통 잡고 한 손으로 두들기면 그 소리의 떨림이 손을 타고 올라와요. 주위 잡음 소리도 안 들리니 더욱 집중이 잘 되죠. 가죽의 미세한 떨림까지 감지해 음을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는 거죠.”
그는 지난 5월, 53년 만에 남의집살이를 청산하고 독립해 드디어 자신의 이름으로 공방을 냈다. 악기장 전수조교에 합격한 아들 임동국(31) 씨가 함께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두 가지 꿈은 꼭 이루고 싶다고 한다. 하나는 장애의 설움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장애인들에게 일터를 마련해주고 기술을 가르쳐 생활에 보탬이 되는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 해를 보낼 때 치는 ‘제야의 종’처럼, 한 해를 맞으면서 치는 ‘영신迎新의 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드라마틱하게 살아온 그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길 기원해본다.
 
 
임선빈
1949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6.25 전쟁 때 피난가며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에 장애가 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넝마주이 생활을 했으며, 심한 매질로 오른쪽 청력을 잃었다. 11살 때 북의 대가 황용옥 선생을 만나 북과 인연을 맺었다. 청와대 춘추관 북, 통일전망대 통일북, 88서울올림픽 대북 등의 제작에 참여했고, 안양 시민의 소리북과 제주도 용고龍鼓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만든 법고 또한 설악산 백담사와 예천 용문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에서 울리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북 장인으로서, 1999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0호 악기장으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