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세계 최초로 여성을 받아들이다

2014-02-10     불광출판사

남성과 여성은 해와 달처럼 각기 다른 고유한 기능 속에서 인류의 전체를 구성한다. 다름 속에 내재한 조화의 완성, 이것이 바로 남성과 여성의 진정한 가치인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이것을 자각하는 데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류의 문명발달이란 필연적으로 전쟁과 계급을 수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성주의사회가 만들어지게 되며 여성은 소외된다. 덕분에 문명이 오래된 지역일수록 여성차별은 보다 심하고 가혹한 양상을 띤다.
 
| 인류 최초의 양성평등
중국문명의 유교는 촌수를 바탕으로 주변인을 대우한다. 그러므로 1촌인 부자간의 덕목인 ‘효’와 2촌인 형제간의 관계인 ‘제悌’가 그 근간이 된다. 그러나 부인은 무촌으로, 특별히 정해진 형식이 없다. 덕분에 첩을 두거나 불합리한 이유로 내쳐도 윤리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여호와는, 남성인 아담은 신의 의지로 만들지만 여성인 이브는 아담의 일부인 갈비뼈로 만든다. 이로 인하여 서구에서는 오늘날까지,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성씨를 따르는 종속적 구조가 유지된다.
문명이 오래되었다는 점에서 인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붓다 당시 집안에 남성구성원이 없고 여성만이 존재할 경우, 그 집의 가산을 적몰하는 법이 공공연히 시행되고는 했다. 즉, 여성은 독립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힌두교에서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티sati라고 해서, 남편이 죽은 후 화장하는 불길 속으로 아내가 뛰어 들어가 자살하는 것을 권장하며 이를 미덕으로 여기곤 했다. 이는 조선시대에 수절과 자결을 권장했던 것과 유사한 가치라고 하겠다.
불교는 세계의 종교 중 가장 오래된 종교이다. 그러나 붓다의 창조적인 정신은 가장 현대적인 새로움을 내포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 단적인 예가 여성을 출가수행자로 받아들여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우하는 사건이다.
여성의 출가는 붓다의 부친인 정반왕의 사후에 이루어진다. 정반왕의 직계인 붓다와 이복동생 난타, 그리고 붓다의 아들인 라후라는 모두 출가한다. 그러므로 정반왕의 임종은 붓다의 이모이자 양모인 대애도와 부인 야소다라에게 더 이상 의존할 석가족 남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붓다를 따라서 출가한 다수의 석가족 남성들로 인해서 의지할 대상이 없던 석가족 여성들이, 대애도를 필두로 붓다에게 출가를 요청하게 된다. 즉, 불교의 여성출가에는 그들의 바람도 있었지만 당시의 문화배경적인 측면 역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당시 석가족 여성들의 출가에 원치 않는 출가자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또 다른 측면에서의 붓다의 배려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후 석가족의 역사는, 강대한 코살라국 유리왕의 원한에 사무친 무자비한 대량학살의 상황을 맞게 된다. 당시는 국력의 정도로 보아 석가족이 제 아무리 단합한다고 해도 코살라군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치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과도 같은 양상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붓다의 지친들은 모두 출가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극의 화를 입지 않는다. 물질과 분노의 애욕이 부른 불길이 제아무리 치성해도, 출가의 고요함을 태울 수는 없기 때문일까. 붓다는 당신의 입장에서 그들의 생명을 그렇게나마 구하셨던 것이다.
 
|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대사건의 전말
대애도의 출가요구에 대해 붓다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는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고는 석가족의 땅인 가비라를 떠나 바이샬리로 이동한다. 이때 대애도와 500명의 석가족 여성들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착용한 채 결연한 출가의지를 보이면서 묵묵히 붓다를 뒤따른다. 즉, 가비라국과 바이샬리에 이르는 수백 ㎞에서 여성출가의 허용과 관련된 줄다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석가족의 귀족여성들은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이를 안쓰럽게 생각한 것은 마음이 부드러운 시자 아난이었다. 아난이 붓다의 4촌 동생이라는 점은, 아난 역시 석가족의 여성들과 무관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아난은 붓다에게 대애도가 양육한 은혜를 부각시키며 인간적인 호소를 한다. 그러나 붓다는 진리의 가르침을 전해준 것으로 그 은혜는 덮고도 남는다고 대답한다. 이는 사적인 감정에 의해서 여성출가가 결정될 수 있는 사한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자 아난은 다시금 여성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여쭙는다. 붓다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난은 그렇다면 출가를 허락해서 여성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다. 즉, 이성적인 관점에서의 여성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자 붓다는 여성출가자들이 남성출가자들에게 종속되는 8경계법을 수용할 경우, 여성도 출가할 수 있다는 조건부 출가를 허용한다. 대애도가 이를 수용하면서 여성출가는 마침내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대애도를 필두로 하는 여성출가는 붓다에 의해서가 아니라, 8경계법의 수용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붓다가 여성출가를 허용하면서 8경계법을 지니라고 하는 구조가 아니라, 8경계법을 수용하면 출가가 이루어지는 구조인 것이다. 이는 여성출가의 발생이, 붓다에 의해 출가가 시작되는 남성출가와는 전혀 다른 입각점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성과 같은 경우는 출가의 성립조건 자체가 8경계법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8경계법을 빼버릴 경우 여성출가는 일종의 원천무효(戒體의 소멸)가 된다. 즉, 조약이 우선이고 그 내용으로 8경계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8경계법 자체의 수용이 곧 조약의 성립이라는 말이다.
또 여성출가와 관련해서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는 일관된 인식에는 아난의 공로문제가 있다. 실제로 붓다 재세 당시 여성출가자인 비구니들은, 아난의 따듯한 성격 및 박식함과 더불어 은혜를 입었다는 점에서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에 반해서 엄격한 원칙적 입장을 고수한 마하가섭과 같은 경우에는, 붓다의 열반 이후 여성출가 문제를 들어서 아난을 힐책하는 양상이 확인된다.
그러나 당시 아난은 깨달음을 얻은 상태가 아닌 수다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붓다가 이러한 아난의 말에 의해서 판단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는 대애도를 비롯한 당시의 석가족 귀족여성들의 교만을 바로잡고, 효율적으로 8경계법을 받게 하기 위한 치밀한 의도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즉, 붓다의 여성출가 용인과 관련된 일종의 방법론이었다는 말이다.
1965년 베트남 파병이 최대의 쟁점이 될 무렵,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정희의 측근 차지철이 파병반대를 주장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파병과 관련된 대미교섭에서 보다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려는 박정희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아난은 차지철과는 다른 인물이며, 붓다 역시 아난에게 지시할 분은 아니다. 다만 붓다의 여성출가라는 원대한 계획 속에, 아난은 자신도 모르게 모종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 8경계법은 여성 수용의 공감대 형성 수단일 뿐
오늘날 한국승단의 가장 큰 쟁점 중 하나이면서, 암묵적으로 표면화하지 않는 문제가 바로 8경계법이다. 8경계법에는 ‘출가한지 100년 된 비구니라도 이제 갓 계를 받은 비구에게 절을 해야 한다’거나, ‘비구는 비구니를 경책할 수 있지만 비구니는 비구를 경책해서는 안 된다’는 여성차별 조항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단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 속에서 산출된 과거 속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덮어놓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도리어 이쪽이 잘못된 것이다.
붓다의 시대에 여성은 독립된 인격적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붓다가 여성을 수용해서 완성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사회적인 공감대 형성은 필요했다. 이러한 과정의 일환이 바로 8경계법인 것이다. 즉, 8경계법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으로 팔을 하나 자르는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8경계법을 비판하는 것은, 이때 살아난 사람이 생명의 은인에게 ‘왜 팔을 잘랐느냐’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붓다가 여성출가를 용인하자 당시의 사회적 인식이 붓다를 강렬하게 비판하는 양상이 확인된다. 이는 여성출가의 용인으로 인하여 붓다가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는 이를 감수하면서 여성문제를 계몽하신 선각자라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시절의 붓다가 아니라, 이를 오늘날까지도 묵수하려는 일부의 비구 스님들이 아닐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여성차별이 가장 심한 집단이 바로 승가이다. 이는 붓다의 거룩한 계몽정신을 무력화하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아닌가 한다.
 
 
자현 스님
동국대 철학과・불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중국불교)・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석사(인도불교) 동양철학과 박사(율장)・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건축) 고려대 철학과 박사(한국불교)를 수료했다. 동국대・울산대・성균관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현재 동국대 강의교수・대한불교조계종 울산 영평선원 원장대한불교조계종 월정사부산포교원 원장・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 교무국장・대한불교조계종 교수아사리를 맡고 있다. 인도・중국・한국・일본에 관한 80여 종의 논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