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연들과 이익을 나누는 수행의 힘

2014-02-10     불광출판사

수불 스님
1975년 범어사에서 지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7년 범어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0여 년간 제방 선원에서 수행하고 1989년 부산에 안국선원을 개원했다. 현재 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 주지이자 안국선원 이사장, 부산불교연합회 회장, 동국대 국제선센터 선원장을 맡고 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난 날입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출현했다는 것은 종교적 우열을 떠나 인류에게 축복입니다. 이로 인해 동서가 정신적인 교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교에서 신교가 나눠진 후 20세기 들어와서, 바티칸 공회에서는 종교개혁이라고 할 정도로 스스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 우리 시대의 진정한 수행은 무엇인가
인류는 계속해서 변화해가고 있기 때문에, 예전의 정신적인 가치를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적용시킨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치 옛날 완행열차를 KTX를 타는 지금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정신적 입장으로는 시대를 리드하기는커녕 비춰보지도 못할 것입니다.
교회의 변혁을 주도한 사람들도 세상의 변화된 모습을 어떤 식으로 수용해야, 세계를 리드하는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8·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의 변화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절실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6세기 들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신교와 구교로 갈라진 이후에도 변화를 수용할 조짐이 보이지 않다가, 산업혁명 이후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점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늘에 비행기가 500명씩 사람을 태워 나르고 땅에서는 기차가 시속 300km로 달리는 시대에 접어들었는 데, 구태의연한 모습으론 세계 사람들을 아우르기에 부족하다 보니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불교는 수행이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변화든 수행을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 변화와는 상관없는 가치입니다. 다만 불교를 믿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수행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올바른 수행의 방법을 접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잘 드러나지 않으니 최근에 와서 수행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지, 수행 자체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원래 뜻하고 거리가 멀어진 모습으로 수행을 하니 공부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근기가 얕다거나 말세라고 표현을 하며 수행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럼으로써 점점 더 수행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하는 오류를 우리 스스로 범해왔습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쉽게 빨리 맛볼 수 있도록 진정한 수행이 무엇인지에 눈떠야 합니다. 바른 가르침에 의지해서 시간을 보낸다면, 양적·질적으로 훨씬 더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 근거가 수행 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고, 불교를 믿으면서도 다른 일련의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매우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들을 모두 포용해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눈뜨게 해줄 수 있는지가 과제입니다.
 
| 정신적인 혁명을 가져온 부처님의 가르침
자기주장을 하는 것은 좋은데, 실질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주장을 해야지 주장만 해놓고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니깐 오히려 손가락질만 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과를 보여 달라고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내려고 애를 써도 보여주지 못하니 늘 그 나물에 그 밥처럼 오해받고 있습니다.
불교가 위기라고 하는데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믿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아질지 적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불교라고 하는 그 가치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에게 회자되고 인류 사회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힌두교의 입장에서 불교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변화와 개혁입니다.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기 전에 인도사회에서는 육사외도가 브라흐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계급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처님께서 정신적인 혁명을 가져온 것입니다. 왕족 출신이 출가했을 때 이발사에게 절을 하라고 시킨 것이나 앙굴리마라를 제자로 받아준 경우 모두 혁명적 사고를 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눈으로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앞장서서 개혁을 부르짖은 혁명적 사건으로서, 불교의 밑바닥에 깔린 정신적 구조는 이 지구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때의 인도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선진 문명이었습니다. 계급타파를 부르짖은 부처님께서는 오로지 깨달음에 눈뜨고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이 최종적인 완성이라고 초기불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훗날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회변화를 꾀하고 인류에 이익을 주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사상들을 만들어내고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것들이 대승불교로 승화되었으며, 다시 일불승으로 전환되면서 순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최상승 수행법인 선불교라는 개념까지 온 것입니다. 그것도 20세기 이후에 일반사회에 퍼진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절 집안에만 있었지, 세상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남들이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편화시키는 모습은 보이지 못했습니다. 승가의 빼어난 어른들이 전문적으로 공부해서 뜻을 이루어내는 시기를 거쳐서,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가치를 믿고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흐름에 있어, 우리가 이론적 가치를 세상에 제공함으로써 지난 20년 동안 간화선의 대중화를 주도한 것입니다. 간화선 중심으로 수행하자는 모토를 내세운 것이 조계종입니다. 간화선 가르침이 보편화될 수 있는 흐름이 여기저기에서 엮어진다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 불법佛法의 실다운 가치에 눈뜨는 삶
스스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하는 가교역할이 수행의 가치입니다. 눈뜬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행을 할 수 있고 보람도 느낍니다. 또 후세들에게 수행의 길안내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굉장한 일입니다. 수행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나름대로 알게 모르게 노력한 흔적들이 그만큼 드러나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루어질 만한 바탕 위에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해야 합니다.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됩니다. 자기가 정진한 깜냥만큼 세상에 공개되고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늘 살얼음 걷듯이 조심해서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익혀야 합니다.
나중에 계정혜 삼학도 다 숙지되어서 벗어나는 힘을 얻으면, 이쪽저쪽을 다 살펴보고 다른 사람에게도 수행의 인연을 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큰 원력은 보살로서의 역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해야 됩니다. 우리 모두 깨달음에 눈뜰 수 있다는 염원 하에서 수행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선각자의 마음씀씀이입니다. 공부할 수 있게끔 기회를 제공하고 또 공부에 뜻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공부할 수 있도록 씨앗을 뿌려서, 결국은 금생이든 다음 생이든 수행해서 그 완성을 맛볼 수 있도록 길안내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잘 살다 가는 삶입니다. 그런 복도 못 지녔으면 자기 공부만이라도 열심히 하고 가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새삼스럽습니다. 나를 일깨워서 눈뜨게 해줍니다. 제대로 몰랐던 자신의 마음을 열어서 알게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나는 인연들이 수행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해야 합니다, 정진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부단히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속에 있다 보면 수행하려 해도 금세 경계에 부딪히게 되곤 합니다. 그렇더라도 수행을 부단히 하며 본인 스스로를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나는 것 같더라도 나중에는 모두 좋은 인연으로 회향됩니다. 수행의 힘이 몸에 배어서 우러나온다면, 여기에 있든 지옥에 있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정화시킬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즐기게 될 때까지 수행을 해야만, 불조佛祖의 가르침에 접근해서 이익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종교적 가치관에 눈떴다는 사실은 큰 희망의 불을 밝힌 겁니다. 마음의 눈을 떴다는 것은 일대사건입니다.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일대사一大事 인연을 다 소화한 눈으로 남을 안내할 수 있는 인연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열심히 내면을 닦고 인연 있는 사람들한테 나눠줄 수 있을 때, 불법의 실다운 가치를 눈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