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힐링 아닐까요”

원주 치악산 명주사 ‘숲 속 판화학교’ 템플스테이

2014-02-09     불광출판사
 



겨울 산사의 묘미는 앙상함 속의 풍요로움이다. 서늘한 풍광 속에서, 비우고 비워 비로소 충만해짐을 깨닫는다.
 
이번 겨울도 7부능선을 넘어가고 있다. 초반의 매섭던 한파도 한풀 꺾이고 추위에도 웬만큼 적응되었다. 야심찬 포부는 아니더라도 호기롭게 맞이한 새해였지만, 여느 때와 별반 다름없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다. 퀘퀘한 온기가 서려있는 사무실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마저, 사그라져가는 눈을 인 채 심드렁하다.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다. 무엇을 해도 시큰둥한 금요일 오후, 마음 속으로 겨울여행 채비를 한다. 겨울 산사에서 코끝이 알싸하도록 대자연과 마주하고 싶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몸은 마음을 따라 강원도로 향하고 있다.
 
| 판화로 소통하는 문화도량
고요하고 고요하고 또 고요하다. 벌 받는 자세로 겨울을 나고 있는 나목裸木을 바라보며 치악산 명주사로 들어선다. 자신의 모든 것을 떨궈낸 채 볼 품 없이 떨고 있는 나무들에게서, 비우고 비워 겨울을 견디는 지혜를 배운다. 나는 무엇을 그리도 채우려, 채우려 했단 말인가. 한 마음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제서야 치악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명주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단출한 규모다. 법당과 탑이 없었다면 아무도 사찰임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다. 법당마저도 전통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황토벽에 너와지붕을 인 팔각 모양의 법당이다. 게다가 단청도 입히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즉 전통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명주사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지정하는 템플스테이 운영사찰에 번번이 속하지 못했다. 3전 4기 만에 2011년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지정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성이 결여된 독특함 때문에 명주사는 다른 사찰과 차별성을 갖는다. 법당은 ‘강원도가 선정한 아름다운 집’에 선정되는 등 매혹적인 건축물로 호평 받는다. 또한 산세를 가리는 여타 큰 건축물이 없으니 어디서든 자연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다. 그리고 명주사만의 특별한 한 가지, 바로 국내 유일의 고판화박물관이 있다는 점이다. 명주사와 고판화박물관의 만남은 뮤지엄스테이museum-stay 형식의 ‘숲 속 판화학교’라는 문화형 템플스테이를 탄생시켰다. 지난 해 4,000여 명이 참가해, 판화와 전통 책 만들기 체험을 하며 우리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주지 선학 스님의 판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선학 스님은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조각 전공)를 졸업하고 군종장교로 임관해 15년간 군종법사를 역임했다. 1998년 전역하며 태고종으로 전종轉宗했으며, 이곳에 도량을 일궈 명주사를 창건했다. 1996년 중국 구화산 성지순례 중 우연히 구입한 지장보살 목판화본을 계기로, 한국・중국・일본・티벳・몽골 등에서 목판 원본과 작품 4,000여 점을 수집해 2004년 고판화박물관을 개관했다. 이후 박물관을 활용한 포교 방법론을 찾기 위해 우리나라 박물관교육학 박사 1호가 되었으며, 명주사를 대중과 소통하는 문화도량으로 가꾸고자 ‘숲 속 판화학교’를 전면에 내세웠다.
 

몸과 호흡과 마음이 하나되는 명상의 순간
 


4,000여 점의 고판화 유물이 전시・보관되어 있는 고판화박물관
 




정성을 다해 조각하고, 먹물 바르고, 문지르고, 찍어내는 과정을 거치며 판화의 매력에 쏙 빠져들게 된다.
 

템플스테이의 묘미는 역시 발우공양이다. 발우를 가지런히 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진다.
 
| 동아시아 디자인의 보고寶庫, 고판화박물관
‘숲 속 판화학교’ 템플스테이는 시작부터 남다르다. 하얀 티셔츠에 꽃, 새, 물고기, 코끼리, 호랑이 등 자신이 좋아하는 문양을 판화로 찍어,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만의 수련복을 만든다. 서툰 손길로 손과 얼굴에 먹물이 묻어나지만, 장인정신을 발휘하듯 먹물을 칠하고 찍어내는 순간순간 정성을 다한다. 정성을 기울인 만큼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나오자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웃음이 터져나온다.
자신이 직접 만든 각자의 수련복을 입고 고판화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에는 선학 스님이 수집한 4,000여 점의 고판화 유물이 전시・보관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목판인 오륜행실도 목판을 비롯해 궁중판화, 사찰판화, 부적판화, 외국 희귀판화 등 고판화의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다. 일본 만화의 원조가 되는 판화도 있어 유독 아이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팔만대장경이 서각 위주의 목판이라면, 고판화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은 불화, 문양 등 그림 원판이 많다. 가히 ‘동아시아 디자인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잠시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차담시간이 이어졌고, 발우공양 전까지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아이들이 순식간에 절 마당으로 쏟아져나온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신바람이 났다. 눈밭을 헤치며 뒹구는 아이, 절에서 키우는 복슬강아지와 장난치는 아이, 절 구석구석을 다니며 호기심어린 눈으로 구경하는 아이 등 하는 행동은 달랐지만 모두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반면 어른들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온전한 자유시간을 즐긴다. 먼 산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홀로 계곡으로 난 겨울 숲을 거닐며 명상하는 이도 있다. 막 산책하고 돌아온 김애경(44, 여중 교사) 씨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흐른다.
“너무 좋네요. 화선지와 티셔츠에 판화를 찍으며, 마치 학창시절 미술시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어요. 절 규모도 아담해서 더욱 아늑한 것 같고, 차 마시는 동안 평온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듯해 매우 편안했어요. 시어머니, 남편, 아들딸 등 온가족이 함께 왔는데 모두 만족하는 것 같아요. 알게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도 하얀 눈밭에 스르르 내려지는 것 같아요. 이런 게 힐링 아닐까요. 참 오길 잘했어요.”
 

고판화박물관의 특징은 그림 원판이 많아,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명주사 도량 곳곳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아이들.
 

치악산 산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길러진다
 
| “오늘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발우공양 시간, 아이들이 허기졌는지 다소 까다로운 절차에도 어려워하지 않고 공양을 맛있게 잘한다. 서툰 젓가락질에도 발우를 들어 입을 가리고 공양하는 모습,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발우를 깨끗이 비우고 나서 자랑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이 대견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이어서 법당으로 자리를 옮겨 명상 체험을 했다. 몸을 바르게 하고(調身), 호흡을 고르게 하며(調息), 마음을 집중하는(調心) 참선의 기본 명상법을 단계별로 배워보는 시간이다. 누구 하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의젓하게 앉아 자신의 마음을 관조한다. 법당을 나오면서 임향아(44) 씨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녀는 원주 일산초등학교 학생들 14명을 인솔해서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지도교사다.
“우리 문화도 체험할 수 있고 자연 경관이 좋아 소풍 삼아 참여했어요. 원래 이렇게 차분한 애들이 아닌데, 오늘 제가 여러 번 놀랍니다. 굉장히 장난기 많고 집중을 잘 못하는 아이들이라, 내심 발우공양과 명상시간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아이들이 판화도 재미있어 하고 마음껏 뛰어놀며 행복해 하니, 오늘 하루 추억에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명주사 템플스테이의 하이라이트는 ‘전통 책 만들기’ 프로그램이다. 책 표지에 문양을 내고 판화로 내지를 찍은 후, 구멍 뚫고 실로 제본까지 해 한 권의 책을 완성해보는 체험이다. 두꺼운 책 표지에 양초로 밀랍 칠을 한 후, 문양 원판 위에 대고 나무로 쓱쓱 골고루 문지르면 문양이 돌출되어 근사한 책 표지가 된다. 글과 그림 한 장씩 내지에 찍어내는 과정도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다. 그리고 조막손으로 표지와 내지를 포갠 후 구멍 다섯 개를 뚫어, 실로 흐트러지지 않게 제본하는 모습도 야무지다. 가장 빨리 책을 완성한 박예림(10) 양이 자신이 만든 책을 흔들며 즐거워한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너무 빨리 간 것 같아요. 옛날 방식 대로 책을 직접 만들어보면서 책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구요. 판화도 어렵지 않고 재미있어 집에 가서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발우공양은 조금 불편했지만 앞으로 밥을 절대 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명상은 처음 해봤는데요.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은데, 아직은 밖에서 뛰어노는 게 더 좋아요.”
아이들과 꼬박 하루를 같이 보내면 피곤할 법도 한데, 이번은 다르다.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좋고, 휭 하니 건듯 불어오는 겨울 산바람도 청량하다. 이 또한 ‘강원도의 힘’인가 보다.
 
금선사 템플스테이 안내
체험형 | 매주 토・일(1박 2일)휴식형 | 주중 상시문의 | 02)395-9955 www.geumsunsa.org<우리절에안기다>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과 함께 만들어갑니다.www.templestay.com
명주사 ‘숲 속 판화학교’ 템플스테이 안내

정기 템플스테이(1박 2일) | 매월 둘째・넷째 토・일요일
템플라이프(당일) | 연중 상시
문의 | 033)761-7885,
www.gopanhw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