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동銅에 따뜻한 자연을 담는 연금술사

아원공방 노인아 대표

2014-02-09     불광출판사



‘연금술’이라는 단어가 있다. 흔히 철이나 구리 같은 금속을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으로 변화시키려고 했던 화학기술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양피지와 파피루스에 기록된 동서양의 많은 기록들은 물질에 정신을 부여하거나 정신을 물질화시키기 위한 기술이 연금술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은 스스로를 철학자로 자처하곤 했다.
 

| 한 눈에 매료된 동의 매력
여린 몸으로 망치를 들고 차가운 금속을 두드리는 노인아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연금술사다. 그의 작품을 보고 금속의 차가움을 연상하는 사람은 없다. 노 작가의 작품은 햇살의 따사로움을 머금은 빛깔이다. 게다가 아주 단순한 선과 면으로 자연을 담아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사슴과 토끼가 멈춰 서서 눈을 맞춘다. 가지에 앉은 새가 침묵의 지저귐으로 노래한다. 조그만 청개구리가 백동白銅 연잎 위에 앉아 바라보는 이에게 휴식을 권한다. 어느 것 하나 평화롭지 않은 풍경이 없다. 작가의 정신을 물질로 담아냈으니 연금술사라고 부를 수밖에. 파주 교하동 외곽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만난 노 작가는 조곤조곤한 말투에 수줍은 미소까지 영락없는 소녀였다.
“전 8남매 중 넷째예요. 여기서 조카랑 동생의 남편까지 총 5명이 함께 일을 하고 있죠. 예전엔 저도 함께 망치질을 하면서 고된 일을 했는데, 몸에 무리가 오면서 지금은 디자인과 상품 개발을 주로 맡고 있어요.”
작업실 곳곳을 직접 보여주는데, 작업실이라기에는 아주 깔끔한 편이다. 햇살 잘 드는 내부에 망치면 망치, 펜치면 펜치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처음 오는 사람도 쉽게 공구를 찾을 수 있을 정도다.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공간이었다. 커피 한 잔을 권하는 그에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물었다.
“어릴 때부터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금속공예 전시를 보러 갔다가 ‘동銅’으로 만든 작품을 보고 한눈에 반했죠. 그 색깔에 반해버렸어요. 그래서 그 길로 금속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죠. 처음 그 전시를 볼 때부터 평생 할 일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때 그에게 금속공예의 ‘ABC’를 가르쳐준 인물이 바로 서울산업대 오원택 교수다. 노 작가는 동銅으로 공예를 배우면서 그것이 지닌 색깔과 질감 등 모든 것이 좋았다고 한다. 동은 금을 제외한 금속 중에서 가장 무른 편에 속한다. 그래서 이리 저리 끊고 때려서 주물러서 원하는 모든 형태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그를 사로잡은 동의 매력이었다. 처음 금속공예를 배울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동과 백동을 주로 사용해왔다.
 





종로구 소격동 정독도서관 바로 옆에는 노인아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전시장이 있다. 이곳의 1층(위)에서는 아원공방의 공예품들이 전시돼 있다. 지하 1층(아래)과 지상 3층에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져 있다.
 
|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미적 감각
노인아 작가는 여느 기성 작가들처럼 공예를 전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미적 감각을 계발시켜준 인물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다. 그는 어린 시절 가계가 어려웠던 탓에 식구들이 모두 충남 공주로 내려가 살았다. 어머니는 8남매나 되는 어린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삯바느질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빠듯한 생활 중에도 그의 어머니는 집 마당에 채송화 같은 꽃들을 심고, 봄날 창호지를 새로 바꾸면서 꽃잎을 함께 발랐다. 끼니를 위해 상을 차릴 때도 별 것 없는 반찬이지만 어떻게 하면 먹음직스럽게 보일 수 있을지를 늘 고민하던 어머니다. 그만큼 팍팍한 생활 속에서 늘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살았던 어머니가 있었기에 자식들도 미적 감각을 풍요롭게 키워갈 수 있었다.
먹고 살기 힘든 사정은 별반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린 나이에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급사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의 나이 16살 때다. 당시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정신적인 부분을 채우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 그때부터 각종 철학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그는 적지 않은 불교철학서를 읽으면서 정신적 욕구를 해결해갔다.
“당시에는 그것만이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시기에 다져진 철학과 사상이 나중에 큰 밑천이 됐죠. 특히 불교철학을 만나면서 경험한 선禪의 세계는 제 작품에서 주요한 모티브가 돼주었어요.”
그가 고된 가장 역할에서 벗어난 것은 25살이 되던 해였다. 다행히 집안 사정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경제적 의무감을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회사를 그만 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했으니, 내 길은 그쪽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우기도 하고, 목조각을 배워보기도 했다. 모두 재밌는 작업들이긴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다 26살이 되던 해에 만난 것이 금속공예다.
작가가 작품 활동에 집중하다보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근근하게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몰두할 수 있었던 건 스님들의 도움 덕택이다. 한동안 출가생활을 했던 오빠 노승대 씨의 소개로 알게 된 젊은 스님들이 노 작가의 작품들을 사주었고, 그런 도움의 손길들에 힘입어 끊임없이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따로 처분하는 것보다 만들어내는 것이 더 많았으니 작업실에는 그의 작품들만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오빠가 작품을 팔자고 제안했고, 그는 평소 좋아하던 인사동에 두 평 남짓한 가게를 덜컥 계약해 버렸다. 당시가 1983년, 인사동에 금속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가게는 없던 시절이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아원공방’이다. 지금도 인사동 ‘아원공방’은 그대로 운영 중이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예상치 않게 장사가 너무 잘 됐어요. 가게를 여느라 졌던 빚도 6개월 만에 청산했죠. 당시에는 딱 2천만 원만 벌어서 시골에서 살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지금 가치로 하면 약 2억 원쯤 되려나. 그 꿈도 이룰 수 있었죠.”
 
| 작가들의 노력이 인정받는 사회를 위하여
이후로는 승승장구였다. 그의 작품이 영국 아트페어(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매매도 이루어지는 행사)에 소개되면서부터는 국제적인 명성도 얻었다. 최근에는 그의 작품들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그의 작품을 찾는 일본 관광객들도 부쩍 늘었다. 해외의 평단은 그의 작품에 대해 “노인아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복잡한 현대인들에게 여유를 주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평소에 명상을 하느냐?”는 질문은 노 작가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새, 나무, 꽃, 구름, 달과 같은 자연의 소재를 담아낸 서정성과 단순함의 미학이 인정받은 것이다. 그의 작품이 세상의 인정을 받으면서 ‘아원공방’은 어느덧 가족기업과 같은 형태가 됐다. 자매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해 노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한다. 아들 안지용 씨도 현재 금속공예를 배우면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어머니와 공동작업을 하고 있다. 2011년 10월에는 종로 소격동에 ‘갤러리 아원’을 만들어 노 작가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작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올해는 ‘아원공방’이 문을 연 지 정확히 30년째 되는 해다. 노 작가는 지난 30년 동안 사람들의 안목이 정말 많이 높아졌다며 “세상이 바뀌어 버렸다.”고 했다. 다만 젊은 작가들이 꾸준이 노력해 통해 작가주의를 다듬어 나가야만 금속공예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조언을 했다. 또 사람들이 작가들의 작품을 제대로 인정해주려고 하지 않는 풍토가 아직은 아쉽다는 말도 전했다.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땀과 노력이 얼룩져 있다. 그래서 작품은 공산품이 아니다. 그런 작가들의 노력을 제대로 알아주었으면 하는 게 노인아 작가의 바람이다. 이것은 불교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얘기다. 불교계는 작가의 작품을 지나치게 쉽게 대하는 경향이 전반적으로 짙게 깔려있다는 지적을 종종 듣곤 한다. 그렇다 보니 작품 활동이 생계와 직결된 젊은 작가들은 불교 공예를 자꾸만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한번은 곱씹어봐야 할 지적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다.
“일단 ‘아원공방’ 30년을 기념할 수 있는 이벤트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적인 목표는 내가 힘과 정신이 남아 있을 때 더 많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고요. 좀 더 고차원적인 목표도 있죠. 다음 생에는 출가자로 사는 것. 그게 제 발원이에요. 꼭 다음 생에는 출가자로 살고 싶어요. 지금부터 그렇게 되길 기원하면서 살아야죠.”
수줍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다. 맑은 표정에서 읽히는 그 순수함이 그의 작품들을 닮았다.
 
아원공방(阿園工房)

홈페이지:
www.ah-won.com
인사동점: 02)734-3482
소격동점: 02)735-3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