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법을 보는 두 가지 시선

간화선과 초기불교의 만남

2014-02-09     불광출판사


 

 
아잔 브람 스님
세계적인 명상 스승이 된 케임브리지대학 물리학도 출신 출가자다. 태국의 생불生佛이라 불리는 아잔 차 스님을 만나 제자가 된 후 호주 불교의 산실이자 호주 최대 수행 커뮤니티가 된 ‘보디니야나’ 센터를 세웠다. 그의 수행법은 일반적인 위빠사나 수행과 달리 ‘청정도론’ 주석서를 따르지 않고 『니까야』 원전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명상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적명 스님
고등학교 졸업 후 나주 다보사 우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전국 제방선원과 토굴에서 50여 년간 묵묵히 정진에만 몰두해온 선사禪師다. 영천 은해사 기기암 선원에서 주석하다 봉암사 대중들에 의해서 2009년 2월 봉암사 수좌로 추대됐다. 대중들은 ‘조실祖室’로 추대했지만 스님은 한사코 ‘수좌首座’로 살겠다고 해 결국 ‘조실 격 수좌’를 맡고 있다.
 
남방불교의 법맥을 이어 서양에 초기불교 수행법을 전한 세계적인 명상 대가 아잔 브람 스님이 한국을 찾았다. 스님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성난 물소 놓아주기』,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의 저자이자 호주 최초의 사찰 건립자이기도 하다. 아잔 브람 스님은 열흘에 걸쳐 주요 사찰에서 대중강연을 하고, 동국대에서 ‘세계명상힐링캠프’를 일주일간 지도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이후 출국을 하루 앞두고 한국불교의 성지 중 하나인 문경 봉암사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아잔 브람 스님은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과 함께 남방불교와 대승불교의 수행관에 대한 질의응답 형식의 대담을 가졌다. 이 대담은 명상수행 중심의 남방불교와 간화선 중심의 한국불교를 대표할 수 있는 두 대가가 자리를 함께 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날 대담에는 선원 수좌 원담 스님, 정명 스님, 참불선원장이자 이번 아잔 브람 스님 방한을 기획한 각산 스님, 전현수신경정신과 전현수 원장 등이 함께 했다. 또 ‘세계명상힐링캠프’ 참가자 80여 명과 봉암사에서 결제 중이던 스님 20여 명도 선열당禪悅堂에 모여 대담을 지켜봤다.
 
| 과학의 세계를 불법으로 풀어 헤치다
원담 스님:
뇌와 마음은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마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적명 스님: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뇌는 마음이 만든 상에 불과하다. 꿈을 꾸면 어떤 세계는 천상이, 어떤 세계는 지옥이 되는 것과 같다. 뇌가 마음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인 세계를 꿈꿀 수도 있다. 현실도 매한가지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결과다. 마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하기 어렵다. 이해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이 곧 마음이다. 불교의 가장 기초적인 가르침으로 사성제를 들 수 있는데, 사성제가 바로 마음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아잔 브람 스님: 초기불전에 보면 두 가지 깨달음이 있다. 하나의 깨달음은 그 다음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는 아라한과이다. 이것은 탐진치가 멸하는 것이다. 그때 본인이 자유를 얻었음을 안다. 두 번째는 반열반이다. 이것은 완전한 소멸이다. 반열반에 들면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 마음조차도 멸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본성까지 사라진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뇌와 마음의 관계는 흥미롭다. 1981년에 존 로버 교수가 뇌가 없는 청년을 발견했다. 그는 수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었다. 그런데 CT촬영을 해보니 뇌가 없었다. 지성도 높았고 사회적응도 잘했던 사람이다. 마음이 뇌 밖에 존재한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다. 마음이 뇌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뇌가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다.
원담 스님: 물질의 궁극적 본성은 무엇인가?
적명 스님: 내 식으로 해석하는 법문이 있다. ‘연기緣起’에 대한 법문인데, 나는 이것을 생성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을 세계가 일어나는 근원이라고 설명한다. 일단 가장 먼저 청정한 본성이 있다고 가정을 하자. 그리고 무명이 있다. 이것이 행行을 일으킨다. 그 결과로 식識이 형성된다. 그 뒤에 몸과 마음 등 모든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무명으로 말미암아 청정한 마음이 흔들리고 이 마음이 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청정한 마음은 불성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이 아니다. ‘유식唯識’에서 말하는 ‘식識’이다. 흔히 진여 불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근원의 근원인 셈이다.
아잔 브람 스님: 양자물리학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안다고 관찰하는 바로 그 순간이 창조의 순간이다. 이것은 선禪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박스 안의 고양이가 청산가리 캡슐이 터져서 죽었는지, 캡슐이 터지지 않아 살았는지는 박스를 열어야만 알 수 있다. 그 전에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제3의 상태다. 즉,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관찰이 필요하다. 양자물리학에서도 의식적 관찰이 있어야 어떤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한다. 2,600여 년 전 부처님의 말씀을 현대과학이 증명하고 있다.
 


조계사에서 대중강연을 하고 있는 아잔 브람 스님(위).
봉암사 대담에서 스님은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초기불교의 입장을 진솔하게 펼쳐놓았다.
 
| 선정(禪定)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각산 스님:
깨침으로 가는 길에 선정은 필요한가?
적명 스님: 선불교적 관점에서 선정은 깨달음으로 가는 진정한 방법이 아니라고 본다. ‘입정入定’과 ‘출정出定’이 있기 때문이다.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선정은 끊어지지 않는 삼매이다. 일상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삼매라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화두 수행 중에도 선정에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권장하지는 않는다.
각산 스님: 초기불교 경전에 보면 깨침의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하고 그 중에서도 정정正定을 말한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적명 스님: 정정은 끊어지지 않는 삼매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각산 스님: 팔정도의 견해와는 어떻게 일치되는가?
적명 스님: 팔정도의 정정은 단절되지 않는 선정 삼매라고 본다. 우연히 본 초기경전에서도 부처님이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선정을 권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삼매라고 이해하고 있다.
아잔 브람 스님: 이런 설명은 팔리 경전의 부처님 가르침과는 조금 다르다. 선정 안에 들어가면 내가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놓아 버리면 모든 사물이 다 사라지는 것을 볼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상태가 아니고 굉장히 초인적이고 수승한 상태이다. 선정 없는 지혜 없고, 지혜 없는 선정 없다. 명상을 잘하는 방법은 우리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것이다. 내려놓으면 점점 움직임이 사라진다. 선정이라는 것은 고요해지는 단계일 뿐이다. 그래서 놓고 놓다보면 선정禪定이 온다. 어떤 방식의 명상이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현수 박사: 요즘 마음이 힘든 사람이 많다.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는 무엇이고,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아잔 브람 스님: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는 탐욕과 갈애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달리지 마라. 멈추면 된다. 천천히 기다리면 내가 원하던 것이 온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적명 스님: 남방불교와 대승불교는 수행관은 물론 진리관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실감한다. 마음의 움직임이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선사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상하다. 그대 것만이 그대 앞으로 온다.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은 그대 앞으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을 쉬어라. 그리고 보다 근원적인 해탈을 성취하면 모든 고뇌가 멈춘다는 것을 알아라. 그래서 가다가 오다가 화두에 마음을 둬봐라. 그렇다면 고요함은 물론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각산 스님: 한국불교는 수행의 목표를 견성성불見性成佛에 두고 있다. 견성으로 성불을 이룬 분들이 있는가?
적명 스님: 정말 견성한 분들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입 밖에 내기 어려운 부분이다. 언제나 치열한 수행자가 있었고, 그 가운데 깨달은 자가 있었다. 깨달음의 문제는 남방불교에서 생각하는 부분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모든 탐진치貪瞋癡가 제거돼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입장이 아니다. 깊은 삼매에서 문득 진리를 깨닫게 되면 깨닫는 것이다. 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세계에 중생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중생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세계는 그대로 열반세계고 그대로 완성된 세계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소멸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았을 때 소멸을 바라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완전한 소멸만이 진정한 열반이라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열반에 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 세계가 열반의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중생이 있고, 중생의 고뇌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무지개처럼 본래는 실체가 없음에도 중생들은 고통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민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연기와 공空을 깨닫게 해서 실체가 없는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부처님은 중생들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견성한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 언젠가는 하나로 융화되어야 할 두 전통
각산 스님:
남방불교에서도 초기경전처럼 수행해서 깨침을 이룬 분들이 존재하는가?
아잔브람 스님: 수백 명, 수천 명이 되는 사람이 부처님 가르침대로 선정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은 후에는 중생들을 위해 오도송悟道頌을 많이 남겼다. 그들이 반열반에 들기로 결정하거나 들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소망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원하는 것 자체를 놓아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은 직후 제자들의 요청으로 반열반에 들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신이 없어도 깨달음을 전할 수 있는 시점이 돼서야 반열반에 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라한 한 명이 깨달음을 얻고 나면 반열반에 들 때까지 수많은 다른 아라한들을 길러낸다. 이런 식으로 불교의 전통이 이어져 왔다.
전현수 박사: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 법문은 깊은 수행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가?
적명 스님: 어려운 질문이다. 여러분들이 세계를 볼 때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세계이다. 산이든 바다든 너든 나든 모두가 ‘내 세계의 존재들’이다. 수행을 하다보면 이런 것들을 체험하고 굉장히 놀라게 된다. 수행을 하다보면 눈앞이 무너지며 경계가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진정한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보이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꿈꿀 때 꿈속 세계가 모두 나의 생각이듯이 우리가 세계를 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세계일뿐이다. 이것을 마음에 명심해야 한다. 즉, 현실 세계에서 구별되는 너와 나의 개념도 결국 내 속의 너와 나일뿐이다. 결국 언제나 우리는 하나라는 말이다.
사회자(정명 스님): 오늘 자리를 간단히 정리해 달라.
아잔 브람 스님: 오늘 만남을 통해 차이점도 느꼈지만 공통점도 발견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논했지만 친절과 자비와 형제애가 오갔다. 하나의 법을 두 개의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것은 굉장히 신선했다. 제가 수좌스님에게 들은 가르침도 잘 간직해 가져가겠다. 정말 불이인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없을 텐데. 마음이 허공처럼 넓은 사람은 품안으로 날아드는 모든 새를 받아들인다. ‘한국 선불교의 새’와 ‘호주 초기불교의 새’가 오늘 만났다. 결국 세계일화世界一花와 다르지 않다.
적명 스님: 열반이란 것, 진리라는 것이 몸과 마음과 세계가 있는 상태에서 수행할 수 있느냐? 몸과 마음과 이 세계가 모두 멸진해야만 구경究竟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느냐? 오늘 확인한 것은 이런 차이였다. 이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양쪽 가르침대로 수행해서 도달할 수 있다는 것과 열반의 세계는 체험 가능한 세계, 실현 가능한 세계라는 것도 확인했다. 종교는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2,000년이 넘는 전통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구도를 해 왔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아마도 앞으로 당분간은 이 같은 견해 차이가 지속될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서로 융화되어 하나가 돼야 한다. 그래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 그 일을 할 사람들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이다.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힘써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