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불교多佛敎적 상황과 그 극복의 과제

우리 시대의 불교

2014-02-09     불광출판사

오늘날 한국 불교인들의 신행활동과 수행, 불교문화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불교지식의 습득 경로 등이 이루어지는 실제 불교의 현장을 살펴보자. 한국불교는 선종禪宗을 표방하는 ‘조계종’이라는 명칭으로 포괄할 수 없는 ‘다불교多佛敎’적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들 가운데 다수는 여전히 조계종의 ‘전통적’ 신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불교인들 로서 ‘다불교’적 관점에 포착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다불교’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불교관이나 수행관 등과 같은 불교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다양성에 관한 문제이다.
 
| 각양각색 백인백색의 ‘불교들’
간화선과 위빠사나 수행 간의 수월성 논쟁은 이미 해묵은 것이 되었다. 불교사에 대한 이해와 경전에 대한 평가는 신행 경험이나 관점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불교의 특정 의례나 신행방식을 두고 어떤 이들은 ‘전통’ 혹은 ‘특색’이란 이름으로 옹호하고, 또 다른 이들은 ‘미신’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불교를 ‘근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탈근대적 대안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불교를 ‘영원의 철학’이자 고전종교라고 주장한다. 불교를 더욱 더 현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통의 회복이 더 시급하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런 가운데 티베트불교나 남방불교에서 미래불교의 모습을 찾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서구의 신불교(neo-Buddhism)가 미래불교의 대안이라고 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불교적 코드를 읽어내는 ‘첨단’ 불교인이 있는가 하면, 불공佛供 드리는 것만으로 자신의 불교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불교인도 있다.
요컨대 각양각색 백인백색百人百色의 ‘불교들’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불교’라는 이름으로 공존하고 있다. 여기에 힐링이나 웰빙 등 생활트렌드 산업에서 말하는 ‘불교’를 보탠다면, 오늘날 한국불교의 모습은 그야말로 ‘불교’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불교인 ‘다불교’적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불교는 그 시작에서부터 다양한 해석을 용인하는 다원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원산지로부터 수입되는 경전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적 관점들이 공존해왔다. 그러나 지금 한국불교가 처해있는 다불교적 상황은 전통시대의 경우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우선 다불교적 상황 자체가 한국불교 내부의 추동력에 의한 주체적 변화가 아니라 외부 환경에 의해 ‘떠밀려온’ 상황이라는 점이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이 지금의 ‘다불교’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주체적 관점을 정립하지 못한 채, 막연한 위기감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황을 바라보는 주체적 관점이 없다면 다양성은 혼란일 뿐이다.
‘불교란 무엇인가’, ‘무엇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왜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매우 초보적이며 구체적인 물음에조차도 필요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 상황은 재가불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출가스님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편 다불교적 상황은 일종의 현실적 조건일 뿐, 그 자체가 좋다 나쁘다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다인종 국가인 미국사회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다원적 상황은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 그 사회의 큰 자산이 될 수도 있고 혼란과 분열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근대 이후 한국사회의 다종교적 상황이 한국불교의 체질을 강건하게 했던 것처럼, 지금의 다불교적 상황은 한국불교가 스스로를 점검하고 새로운 질적 도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 다불교를 초래한 역사적 연원과 배경
오늘날 세계 각국의 불교를 살펴볼 때 다불교적 상황을 맞고 있는 지역은 미국과 유럽 등의 새로운 불교 지역을 제외한다면, 전통적인 불교 국가 가운데에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가 맞고 있는 다불교적 상황은 오늘날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변방의 위치를 극복하고, 21세기 새로운 불교의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다불교를 초래한 역사적 연원과 배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사회의 다불교적 상황에 대한 역사적 연원으로 대략 세 가지 정도를 지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19세기 중엽 소위 근대불교학의 이름으로 서구에서 창안創案된 ‘부디즘buddhism’의 영향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뒤 별도의 단락을 통해 상세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두 번째는 90년대 이후 출판, 유학, 현지수행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입, 소개되기 시작한 지역불교 전통들이다. 남방 상좌부 전통이나 티베트불교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지적 호기심에 의한 지식 수입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수행에 참여하거나 수행센터를 한국에 건립하는 등 현지불교를 한국에 정착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펴고 있다. 여기에는 이국적 불교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니라, 조계종단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 전통에 대한 실망감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 번째 역사적 연원으로 미완으로 끝난 한국 근대불교를 들 수 있다. 20세기 초 근대불교와 함께 시작된 다양한 불교개혁 프로그램들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큰 변화의 동력을 만들지 못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왜색불교 청산의 과정에서 그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1947년의 봉암사 결사는 ‘출가수행 종풍의 확립’이라는 기치 하에 한국불교의 방향을 출가수행 중심의 전통복고로 돌려놓았다. 그런 한편 1962년 출범한 현재의 통합종단은 70・80년대 동안 한국사회의 다른 부문의 변화에 발맞추어 종단 운영 등의 제도적 측면에서 상당히 근대화를 이루게 된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불교는 제도나 시스템의 변화에 출가수행자들의 의식변화가 따라가지 못하는 일종의 ‘문화지체(cultural lag)’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깨달음이냐 중생제도냐 등 오늘날 한국불교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들은 문화지체에 따른 전통과 근대의 길항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 다불교적 상황을 받아들이는 주체적 관점의 확립
이제 앞서 언급하였던 ‘부디즘’의 영향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서구에서 창안된 ‘부디즘’은 식민지기 동안 일본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어 만해萬海 등 근대 한국불교의 선각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불교 지식인들은 부디즘을 곧 ‘진정한 불교’의 복원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여파는 지금 현대 한국불교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부디즘은 동양의 전통적인 불교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합리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이성 중심의 불교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불교를 철학적 사변으로 환원하고 깨달음을 심리적・인지적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부디즘적 불교 이해의 한 예다. 합리적 설명과 이성적 이해를 결한 전통불교의 모습들은 부처님 본래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미신에 다름 아니었다.
부디즘의 또 다른 한 특징은 불교의 종교성을 탈각시킨 ‘관념적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일부 불자들의 불교에 대한 관념적 이해는 실상 서구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창안한 부디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에게 불교의 윤회나 업설은 당시 몽매했던 고대 인도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다. 그들의 경전 이해와 불교관은 대단히 선택적이고 자의적이다. 보시는 기부행위를 미화하는 것일 뿐 공덕을 쌓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명상은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중요한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불교는 지식이며 지혜롭게 고안된, 훌륭한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부디즘은 불교의 중심을 지금 여기가 아닌 과거로 회귀시켰다. 부디즘의 관점에서 오늘의 불교는 부처님 이래 계속 퇴보해온 타락한 불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진정한 불교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부처님 시대를 높이 평가했던 것은 전통불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부처님 시대를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지금 여기의 불교를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그 점에서 동양의 전통불교와 식민자들이 창안한 부디즘이 구별되는 것이다.
부디즘은 불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최근의 것이지만 지금 우리의 불교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거기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불교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가능하게 된 것이 긍정적 측면의 하나라면, 불교를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그리고 합리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서 불교 본래의 종교성이 탈각하게 된 것은 부정적 측면의 하나일 것이다. 이 점은 지금 한국불교의 다불교적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다른 지역불교 전통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용자의 주체적 관점이다. 지금의 다불교적 상황을 그냥 방관하면서 시절인연만 기다린다면 다불교적 상황은 한국불교의 미래에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일종의 아노미anomie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수용해 나간다면 다불교적 상황은 한국불교가 21세기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 영문과 및 동국대 대학원을 졸업하고(석사, 인도철학), 미국 UC버클리 대학원을 졸업했다(박사, 불교학). 미국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교수, 「불교평론」 주간,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우리는선우’ 상임대표, ‘철학연구’ 편집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는 『불교와 불교학』, 『퇴옹성철의 깨달음과 수행』, 「‘깨달음의 사회화’에 관련한 몇 가지 고찰」,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관한 검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