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따려면 밤하늘로 손을 뻗어야 한다

2014-02-09     불광출판사

수진 스님
부산 해인정사 주지. 1971년 부산 마하사에서 당대의 선지식 문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범어사 강원과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금산사 화엄학림을 이수했다. 1984년부터 수도암 수선안거 이래 해인사, 봉암사, 통도사, 쌍계사, 용주사 등에서 10년간 참선 수행했다. 1993년부터는 7년간 해인사 강원의 강주를 맡아 후학 양성에 진력했다. 조계종 11대 중앙종회의원, 조계종 교육위원, 교재편찬위원, 전국승가대학 교직자 협의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부산연합회장직을 맡고 있다.
 
제가 오늘 이야기하는 고향은 여러분이 태어난 고향이 아니라 여러분이 태어나기 이전의 고향을 말합니다. 이 고향은 죽어도 존재하고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또한 본래 고향은 시기, 갈등, 번민이 없습니다. 잘 살고 못사는 것도 없습니다. 고통도 아픔도 없습니다. 어쩌면 부처님께서는 이 고향을 알려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 우리 삶은 왜 고통스럽고 쓰라린가
우리에게는 태어난 고향과 태어나기 이전의 고향,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태어난 고향은 명절마다 갈 수 있지만 본래 고향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본래 고향을 한 번 등져 버림으로써 얼마나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요. 죽으면 지옥으로 가고 아귀로 가고 축생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삶이 지옥의 삶이고 아귀의 삶이고 축생의 삶이라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싸늘하겠습니까. 한 번 본래의 고향을 등져 버림으로써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태어남은 결국 쓰라림의 세계고 고통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고향인 본래의 마음을 등져 버렸기 때문에 삶은 고통스럽고 쓰라립니다. 행복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노심초사하지, 불행하게 살고자 마음먹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 잘살고자 했지 못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하게 살고 있습니다. 단돈 천 원이 없어서 철창 신세를 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한마디 잘못해서 철창 신세를 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그렇게 살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천하의 모든 문제는 내가 ‘진짜 나’를 등졌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짜 나’를 ‘진짜 나’로 알고 살고 있습니다. 조그만 이익에 생명을 걸고, 조그만 살림살이에 생명을 걸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자 한 것은 아닌데, 실제로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천하에 제 아무리 신통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우리의 본래 모습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을 먹어 불을 만들고 땅을 밟아 엎어서 하늘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를 알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가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성스러운 존재를 등지고 살아갑니다. 매일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며 함께 숨 쉬는 내가 나를 모른단 말입니다. 진짜 나를 등지고 가짜 나로 살아온 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요? 원숭이가 달 밝은 밤에 호숫가에서 달을 따보려고 하지만 절대 딸 수가 없습니다. 그 달은 하늘에 있는 것이지 호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을 따려면 하늘로 손을 뻗어야지 호수로 뻗으면 안 됩니다. 호수에 비치는 달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여러분의 모습도 이처럼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진짜 달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자가용으로, KTX로, 비행기로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올 수 있습니다. 전화 한 통이면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먹을 수 있습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신통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통한 것들은 여러분이 본래 마음을 아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가짜 내가 진짜 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부처님의 진리를 근간으로 찌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롯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여러분의 본래 고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 자신을 먼저 쏘라
마조 스님은 유명한 선사입니다. 길을 가던 마조 스님이 우연히 사냥꾼을 만났습니다. 마조 스님은 사냥꾼에게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사냥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조가 묻기를 “그럼 활을 잘 쏘겠습니다.” 하고 물었습니다. 사냥꾼은 당연히 잘 쏜다고 대답했지요. 마조는 “그럼 화살 하나로 짐승 몇 마리를 잡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사냥꾼은 당연히 화살 하나로 한 마리를 잡는다고 대답했겠지요. 그러자 마조 스님이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습니다.
“실력이 별로구만. 그런 건 천하 사람들이 다 할 수 있습니다.”
사냥꾼은 화가 나 물었습니다.
“그럼 스님은 화살 하나로 얼마나 잡을 수 있는데요?”
“나는 화살 하나로 수십 마리를 꿰어버리지.”
대답을 들은 사냥꾼은 갸우뚱거리면서 “아니, 스님은 살생도 하십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마조 선사는 “그렇게도 잘 아는 당신은 왜 당신을 쏘지 않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일화의 뜻은 무엇일까요? 사냥꾼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매일 활을 들고 남을 죽이려고만 했습니다. 마조 스님이 하고자 했던 말은 상대를 죽이려는 그 생각을 죽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허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마음을 스스로 쏘아 죽이라는 말입니다. 시시각각 변화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을 겨누고 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상대방을 원망합니다. 문제의 근원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항상 핑계를 댑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업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자신의 마음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가짜 나를 진짜 나라고 착각하고 살아온 탓에 이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신령하게 밝은 우리 자성은 깨쳐야 할 무언가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깨달아져 있는 겁니다.
법당에 오면 기도를 합니다. 대부분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이지만 본래 기도는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주는 소리입니다. 목탁으로 수없이 소리를 내서 갈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짜 나를 내려놓겠다는 수행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진실한 불자의 자세입니다. 목탁 소리, 요령 소리가 여러분을 수행으로 이끌어 주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의 마음을 활짝 깨어나게 해서 진계로 나아가게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잘못을 순식간에 깨부숴서 고통에 매이지 않게 하는 소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래 고향을 등지고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더 이상 시비에 이끌려 살 이유가 없습니다. 아들딸에 매여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돈에 매여 살 이유가 없습니다. 한 끼 먹을 밥이 있으면 족한 것입니다. 두 끼 먹을 밥이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세 끼를 먹을 수 있으면 여러분은 천하의 부자입니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요? 큰 부자란 무엇인가요? 진짜 나를 모르는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진짜 나를 모르고 살아왔단 겁니다. 가짜 나에 속아서 진짜 나를 착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스님의 법음과 목탁소리는 나를 내 진짜 모습으로 탈각시켜주는 소리로 알아야 합니다. 마조 스님이 사냥꾼에게 그렇게 잘 아는 자네는 왜 살생하는 마음을 쏘지 않느냐, 왜 시기하는 마음을 쏘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처럼 말이죠.
대조 스님이 어느 날 마조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마조 스님은 대조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왜 왔느냐?” “불법을 구하려 왔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그대에게 줄 것이 없네. 그대는 그대 안에 있는 보배를 찾지 않고 자꾸 밖에서 찾으려 하는가.”
대조 스님은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제 안에 있는 보배라니요.” “지금 웃고 있는 당신이 보배니 마음대로 꺼내서 쓰시게.”
참 묘한 말입니다. 무엇이 보배입니까. 누가 부자입니까. 우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보배를 한껏 가지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건 보배가 아닙니다. 없어지는 것은 보배가 아닙니다. 값으로 따질 수 있는 건 보배가 아닙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불가사의한 보배, 불가지적 보배가 그대 가슴 속에 있습니다. 마조 스님은 진짜 보배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가슴 속에 있는 것이니 마음대로 꺼내 쓰라고 한 것입니다. 그걸 대조 스님은 알아낸 겁니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속지 마세요. 더 이상은 속으면 안 됩니다. 아들에게도, 딸에게도, 돈에게도, 시기에도, 반목에도, 갈등에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보배를 꺼내 쓰는 데 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신령스럽고 밝은 우리 본래 자성은 여러분의 본래 마음을 떠나 있지 않고, 하늘에 떠있는 달은 가을연못에 톡 떨어져 있지만 하늘을 떠난 적이 없다 했습니다.
달이 허공을 떠난 적이 없듯이 진짜 나는 여러분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이를 알면 여러분은 밖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힘들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버리고 여러분의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만이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