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투성이었던 <금강경>사구게

나의 인생을 결정한 불교서

2007-06-18     관리자
 

싱그러운 아침에 까치도 인사하고 뻐꾸기도 노래하는 것을 보니, 오늘 하루도 기쁘고 즐거운 날이 될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기쁨을 느끼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게끔 삶의 계기가 있다고 본다. 부모님의 영향, 스승님의 가르침, 아니면 생활 철학이나 사상 등이 담긴 책을 통해서이다.

  필자는 이 세 가지의 영향을 다분히 받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내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햇수로 이십 년 가깝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몸이 아팠을 때, 귀한 자식 잃을까봐 어머니께서 물어 물어 가신 데가 단양에 있는 ‘구인사’란 절이었다. 그 인연으로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보다도 불교 쪽으로 더욱 마음을 쏟게 된 계기는 1974년 10월쯤으로 기억되는 데 광덕 큰스님께서 종로 3가 대각사에서 ‘불광법회’를 이끌고 계실 때이다.

  첫눈에 뵙는 큰스님의 밝은 모습과 인자하심이 나를 자연스럽게 불심을 닦는 쪽으로 기울게 하였으며, 존경심과 외경심이 우러나오게 하였다.

  그 때, 우리들에가 가르치신 경전이 <금강경>이었다. 당시 온 몸이 티끌로 휘감겨 있던 나에게 금강경에 담긴 부처님 말씀은 전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나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지만 신선한 충격을 느꼈으며, 불법 세계로 빠져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 당시 나는 부처님을 막연하게 한 인간을 신격화(神格化)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금강경> 첫 부분인 ‘법회인유분(法會因 由分)’설법을 들을 때부터 의문투성인 것을 발견했다.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 대중들과 더불어 식사하실 적에 옷 걸치시고, 탁발가시며 얻어다가 앉으시고 밥 드시며 발 씻고 자리 펴고 앉으셨다.”라는 대목에서 부처님이 우리하고 똑같은 분이신가? 그런 분이 무엇이 특출(特出)하신가? 무엇을 깨치셨는가? 등등의 의심이 났다.

  내 것, 내 가족, 내 주위의 것만을 또는 눈에 감각으로 느끼는 것만을 전부로 알고 있던 나로서는 부처님 말씀이 통 이해가 안 되었다. 또, 지식으로만 알고 살려고 애쓰던 나에게 “상(相)에 머무름이 없는 보시의 복덕이 최상의 복덕이다<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제 2>”란 말씀은 의문을 더하게 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형상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나하고 동떨어진 얘기가 아닌가? 등의 의문만을 품게 했었다.

  그렇지만 덕 높으시고 존경하옵는 큰스님께서 설법하시니 일단 계속 들어보자 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마음을 스스로 앉히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그렇게 하기를 잘 했다고 여겨진다.

  그 다음번 설법에는 더욱 의심투성이었다.

  “무릇 있는 바 상(相)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다.<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제5>”.

  이 사구게(四句偈)에 이르러서는 더욱 혼란의 세계로 떨어졌었다. 이 세상에 있는 상이 다 허망(虛妄)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왜? 어찌 되었던 그 당시는 이렇게 금강경 내용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면서도 금강경에서 내 마음을 떠나지 못하게 한 구절이 다음 구절이었다.

  “비구들아! 내가 말한 법(法)은 뗏목과 같으니 법도 응당 버려야 하거늘, 법 아닌 것이랴?<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제6>”

  저쪽 언덕으로 건널 때는 배가 필요하지만, 언덕에 올라간 다음에야 배를 짊어지고 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 그 배가 아무리 값지고 훌륭하더라도 짊어지고 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는 데, ‘부처님 말씀(진리, 법)을 버려라!’는 부분은 풀리지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을 믿고 따르지? 어디에 의지하지?

  이렇게 그럭저럭 법회에 참석하면서 흐릿하나마, 이런 것이 그 유명한 금강경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금강경 공부의 인연은 그렇게 맺었지만, 나의 삶 중에서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전공 공부 때문에 7-8년 동안 부처님 시봉하는 공부를 제대로 못했었다.

  그러다가 대만 유학에서 돌아온 1986년 4월인가 집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금강경 독송회’란 간판을 보게 되었다. 들어가서 알아보니, 보살님이 원력으로 연 포교당이었다. 그 분은 옛날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백성욱 박사님 밑에서 금강경을 배웠다고 했다.

  이제는 한평생 금강경 읽으면서 그 공덕을 회향하고 전법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나의 금강경 공부 시절이 회상되었다. 동시에 몸에 스며드는 알 수 없는 희열감이 솟아올랐다. 그렇다! 이제부터는 아침 저녁으로 ‘금강경’을 다시 읽어 보자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몸 전체로 부처님 말씀을 받아들이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하여 나의 금강경 독송은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 몸 담고 있는 충북대학교 중문과에서 일하게 된 것도 그 공덕 중의 하나인 것 같다.

  1987년 2월에 청주시에 있는 충북대학교에 가 보니 ‘충북지역 교수불자회’가 태동되려 하고 있었다. 그 해 7월에 ‘속리산 법주사’에서 창립법회를 열고, 부처님 시봉 잘하는 선우(善友)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전국 규모의 ‘교수불자회’가 자리잡게 된 것도 ‘충북 교수불자회’가 싹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요사이도 청주지역에 있는 교수 불자들과 함께 매월 첫째 금요일 오후 5시에 속리산 법주사에 모여 성찬 스님을 모시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강의를 들으며, 참선도 하고, 당신들 전공에 대한 얘기도 돌려가며 듣고 있다.

  이제는 처음 금강경을 들었을 때보다, 순연(純然)하게 들려 온다. 그러나 아직도 몸으로 온통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바람은 중생 몸이 다하기 전에 몸 전체로 확연하게 금강경의 뜻을 받아들이고 춤을 더덩실 추는 것이다. 또 하나 금생(今生)에 맺은 좋은 인연을 다른 사람들과도 간직하고 싶다. 그러면서 내가 여러 선우(善友)들로부터 받은 공덕들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고 싶다.

  광덕 큰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전법이 최상의 보은’이 아닌가?

  이제는 힘닿는 데까지 아는 것만큼 우리 이웃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안재철:서울교육대학교, 국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단국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만 국립사범대학 국문연구소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충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