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의 근원 일원상

거창 심우사의 <일심삼관문탱>

2014-02-09     불광출판사
 

01 일심삼관문탱의 부분. 반야용선이 거친 생사生死의 바다를 가로지른다. 용선은 구제받으려는 영혼들로 한가득 만선이다. 검푸른 물결을 헤치고 극락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바로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았다. 거창 심우사에는 필자가 항상 친견하고 싶었던 불화가 있다. 이 불화의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는 것은 수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불화가 진정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핵심을 깨닫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늘 눈 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았다. 눈 뜬 장님이었다. 무엇이든 진정 깨닫기 전에는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그리고 살아도 살지 못한다.
 

| ‘신앙’의 산물, 불교문화재 수난시대
“조사? 불화를 조사하겠다고? 조사해서 알려지면 좋을 게 없어. 사람들이 와서 그냥 두지를 않거든. 도난 문제도 심각하지만, 또 문화재 등록이니 뭐니. 진짜 원본은 꽁꽁 싸두고 가짜 사본을 거는 것도 그래. 이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거든!”
맞는 말씀이시다. 많은 사찰들은 소장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구책으로 진땀이다. 아무리 돈이 신이 된 세상이라 하지만, 어쩌다가 인간의 마지막 보루인 신앙의 대상마저 완전히 돈의 가치로 대하게 되었을까. 사찰의 문화재를 탐욕의 중생심으로 대한다면 천벌을 받는다 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사찰의 재물을 훔치거나 손해를 끼치거나, 절 안에서 함부로 음행을 하거나, 혹은 생명을 죽이거나 해치면 이러한 무리는 당연히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천만억 겁이 지나도 벗어날 기약이 없다”라고 다양한 경전에서는 누차 경고하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사찰의 보물들은 지극히 엄격하게 관리되고 보호된다. 유명 사찰들은 1년에 딱 한 번 정도 특정 기간에만 소장 유물들을 공개하고,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줄에 줄을 서서 경건히 관람을 한다. 또 사찰이 유물을 관리할 여력이 안 될 경우, 국립기관인 박물관에 위탁 보관한다. 만약 학술 조사를 신청할 경우, 까다로운 절차와 심사를 거친 후, 해당 유물 본래 소유지의 주지스님 허락이 최종적으로 있어야 한다. 물론 조사할 때는 지켜야 할 불문율의 까다로운 예의를 모두 지켜야 후탈이 없다. 우리나라도 어서 빨리 엄격하고도 세심한 제도적 보호책이 정착되었으면 한다. 또 들끓는 금전만능주의가 아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신앙의 산물을, 모두 함께 아끼고 보호하는 문화 마인드가 일반화되었으면 한다.
 

02
일심삼관문탱. 일체의 모든 현상은 ‘일심一心’의 원상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묘사했다. 1921년, 비단 바탕에 채색, 크기217x161.5cm. 작품의 오른쪽 아랫부분 신비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하얀 원. 일원상의 여의주이다.
 
| 상서로운 기氣가 나오는 하얀 원
심우사 주지 일형 스님의 근심어린 당부와 모처럼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근두근 마음이 먼저 달렸다. 스님께서 둘둘 말려있던 2미터가 넘는 화폭을 펼치니 화려한 내용이 전개된다. 작품이 너무 커서 걸 곳이 마땅치 않자, 스님께서 친히 사다리를 가져와 문 위에 못질 하시고 걸어주신다. 아, 마음 속에 그리던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사모하던 애인 만나듯, 가슴 떨리는 묘한 감동이 있다.
 

작품은 2m를 넘는 커다란 화폭이었다. 약 80cm의 화폭이 잘려나가 매우 안타까웠다.
 
작품은 종으로 긴 장방형의 두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그림02 그런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작품 하단부 오른편의 커다란 원이다. 다른 불화에서는 본 적이 없는, 하얀 원이 아주 대담하게 표현되었다. 원에서는 세 종류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데, 위로는 하얀 기운, (정면에서 보아) 왼쪽으로는 누런 색 기운, 오른쪽으로는 시커먼 갈색 기운이다.
위로 피어오른 흰색 기운 위로, 넘실대는 망망대해가 있고 그 가운데 거대한 반야용선이 있다.그림01 용선에는 빼곡하게 들어찬 중생들로 만원이다. 용선 2층에는 이들을 인도하는 부처님이 계신데, 정수리에서 오색의 기운이 뻗어나와 마치 리본처럼 휘날린다. 그 위는 극락의 입구이다.그림07 반야용선은 극락세계를 향해 기운차게 나아가고 있다.
 
| 심오한 철학과 풍부한 상상력
그림 하단부의 커다란 하얀 원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뻗어나간 누런 색 기운을 따라가면, 다시 검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로 수미산이 있다.그림02 수미산 양쪽으로 붉은 해와 하얀 달이 돌고 있어, 수미산의 크기가 얼마나 우주적인지 가늠케 한다. 그런데 산의 가운데에 한 청년이 보인다. 그는 두 노인을 한꺼번에 등에 업고 위태롭게 산을 오르고 있다.그림05, 06 절벽처럼 가파른 산벼랑 길,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 거친 파도가 위협하고 있다. 다시 하얀 원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어두운 갈색 기운을 따라가면, 그 쪽 구획은 잘려 나가고 없다. 작품은 본래 세 구획으로 나눠져 그려졌으나, 오른쪽 구획이 의도적으로 잘려나가 현재는 두 구획만 남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운데 해당하는 구획에는 ‘극락세계’가 묘사되었다. 반야용선이 진입하는 극락의 입구에는 관세음보살이 먼저 나와 맞이한다. 연못에는 새하얀 아기의 모습으로 왕생하는 영혼의 모습이 보인다.그림04 극락 중심에는 항마촉지인의 부처님이 계시다. 극락이니 당연히 아미타불을 모셔야 할 텐데 ‘석가모니불’을 모셔, 우리 불교미술의 가장 핵심 존상의 맥을 잇고 있다.그림07 그런데 중층의 전각 윗지붕에는 ‘광명전’, 아랫지붕에는 ‘무량수전’이라 쓰여, 전각 안의 존상이 ‘비로자나불’ 또는 ‘아미타불’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 삼신귀일三身歸一, 모든 부처님은 하나로 귀일한다는 ‘회통’의 불교 철학을 절묘하게 표현한 수준작이다
 

04 작품의 중간 부분. 극락의 연못. 구원받은 영혼들이 새하얀 아기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05 부모님을 업고 뼈와 살이 다 닳도록 수미산을 올라도 그 은혜는 다 갚을 수 없다는 ‘주요수미’의 내용.
 

06 한 청년이 가파른 벼랑길을 늙은 부모님을 업고 오른다. 수많은 인연 중에 가장 큰 인연으로 꼽는 ‘부모 자식’간의 인연. 이 인연을 통해 우리는 세상으로 나왔다.
 
| 부모와 자식, 수많은 인연 중 으뜸
‘두 노인을 업고 수미산을 오르는 청년’의 장면은 『부모은중경』의 ‘주요수미周遶須彌’에서 나온 것이다.그림05 해당 대목을 보면, “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는 아버지를 오른쪽 어깨에는 어머니를 업고, 살가죽이 닳아 뼈가 드러나고 또 뼈가 닳아 골수가 드러나도록, 수미산을 백천 번 돌고 또 돌아도 부모의 은혜는 다 갚을 길이 없다”라고 한다. 세상에는 많은 인연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진중한 인연이 ‘부모 자식’간의 인연이라 한다. 부모은중경 은 특히 어머니의 은혜를 강조하는데, 본문은 ‘여러 겁의 인연이 지중하여 이번 생에도 다시 모태에 의탁했네’라고 시작된다. 그림 속의 나이든 부모는 아들의 등에 업혀 매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그림06 그림 속 주인공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업의 인연을 홀로 감당하며 기운차게 수미산을 오른다. 이 인연의 짐을 지고 험한 인생의 산길을 무사히 통과하면, 거기엔 꿈같은 도솔천이 펼쳐진다.그림02 아름다운 하늘 여인이 꽃비를 뿌리며 맞이한다.그림08 주인공은 자신이 가진 온 힘을 다해 부모를 도솔천으로 안내하고 있다. 이 장면은, 우리가 부모와의 인연으로 태어나 살게 된 ‘현실세계’를 상징한다.
 
| 극락・지옥・현실, 세 개의 세상
작품 속 양 구획의 내용을 살피고 나니, 오른쪽의 잘려나간 구획의 내용이 무엇인지 감이 온다. 하얀 원에서 시커먼 갈색 기운이 뻗어나간 쪽은 분명 ‘지옥세계’다. 그런데 무언가 검열에 걸리는 장면이 있어 (작품이 제작된 시기가 1921년 일제강점기이므로) 의도적으로 잘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감로탱> 등의 작품에도 전쟁, 살육의 장면으로 추정되는 부분들이 칼로 도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작품은 본래 극락・지옥・현실의 세계를 세 구획으로 나누어 그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현란한 세계는 모두 아랫부분의 하얀 원에서 비롯되고 있다. 작품의 핵심은, 우리의 눈을 현혹케 하는 색색 다채로운 장면들이 아니라, 바로 이 하얀 원 ‘일원상’에 있었다. 작품 주변을 맴돈 지 오래, 그러나 이 ‘일원상’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버젓이 눈 앞에 보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07 극락의 궁전. 부처님과 보살님이 몸을 나투시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 피어오른다. 
 

08 도솔천의 입구에서는 하늘 여인들이 꽃비를 뿌리며 상생한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 일체만물의 바탕, ‘일원상’의 여의주
이 작품은 극락이건 지옥이건 속세이건,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불교의 핵심 진리를 한 폭의 그림으로 모두 담아버린 것이다. 그제서야 왜 작품 명칭이 <일심삼관문탱一心三關門幀>인지 알 수 있었다. 공空・가假・중中의 ‘삼관’은 모두 ‘일심一心’에서 비롯되고 다시 일심으로 귀결된다는 말이다. 하얀 원으로 표현된 ‘일심’의 도상은, 법성・법신・마음자리・적멸보궁・부처님 등으로 불리는 ‘궁극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었다. 의상 조사는 법성게 에서 ‘둥글고 오묘한 법 / 진리의 모습이여 / 고요뿐 동작없는 삼라의 바탕이여’라고 말하고 있다. 고려시대 나옹 화상은 완주가玩珠歌 에서 이를 영롱한 여의주에 비유하고 있다. ‘신령스런 구슬, 영롱하기 그지없네 / 본체는 하천과 모래사장, 세상 두루 있지만 안팎은 비어있다네 / 사람마다 몸 부대 속에 당당히 간직해 / 오며가며 참으로 변재 많아도 다함이 없네 / 혹은 마니라 하고 혹은 영주靈珠라 하네 / 이름과 모양 많고 많지만 본체는 같네 / 찰나마다 티끌마다 밝고 또 밝아 / 마치 가을 강 속 가득한 보름달 같네’
 
| 출가자 본연의 길
작품 사진을 연방 찍고 있는데, 주지스님도 사진기를 들고 나오셨다. 사진에 일가견이 있으신 듯. 스님은 소싯적 사진작가 소리 들으실 만큼 사진에 푹 빠지셨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세 박스 분량의 필름을 모두 소각해버리셨다 한다. 한 때 음악에 빠져 LP판을 약 천 장 가량 모으신 적도 있는데, 역시 한순간에 모두 처분해 버리셨다. 왜 그러셨어요? 여쭙자, ‘업’이 되어버려서 모두 치워버리셨다 하신다. “너무 열심히 하다 보면, 빠지게 되고, 집착하게 되고.” 출가자 본연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질라치면 아무튼 무엇이든 놓아버리셨다.
스님, 그럼 본연의 길은 무엇입니까? “이유가 어떻든 출가했으면 최소한 내가 누군지는 찾아야지.” 스님은 동안거・하안거 결제한 후에는 토굴에서 계속 참선 생활을 하셨다. 스님이 얼마나 치열하게 구도의 길을 걸으셨는지 절절히 느껴져 왔다. “수행은 습習이야! 자기 습관을 바꾸어 가는 것이 수행이지. 새로운 업을 만드는 거지.” “중은 ‘한 생각’ 넘으면 안 돼. 그리고 좀 가난해야 해.” ‘스님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라는 투철한 관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내게 ‘마삼근’이란 화두를 주신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스님의 말씀이 계속 맴돈다.
“화두를 받으면 평생 살림밑천 받은 거야. 주변의 내 것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그냥 잠시 관리하다 가는 거야. 하지만 ‘화두’는 다음 생, 그 다음 생에도 없어지지 않는 살림밑천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