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풍경을 봐야 한다

한국화가 이호신

2014-02-09     불광출판사

지리산 삼신봉에서
 
30여 년 가까이 꾸준히 우리 사찰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 온 이호신 작가가 오는 4월 전시회를 갖는다. 운명처럼 지리산에 자리를 튼 후 지리산을 그린 작품 200여 점이 ‘어머니의 땅, 지리산 진경 순례’라는 제목으로 전시된다. 전시회가 열리는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지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처음 보여준 색깔은 푸른 녹색이었다.
 

성철 스님 다비장 가는 길
 

한국화가 이호신
 
| 지리산의 속살
따뜻한 봄, 부랴부랴 도망가듯 서울을 벗어났다. 산에 오를 생각도 바다에 갈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하루쯤은 상쾌한 곳을 걸으며 햇살을 부드럽게 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말뚝에 묶인 강아지처럼 서울에서 멀리 가지 못했다. 간신히 발 내딛어 봐야 양평이나 청평 같은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의 곳들이다. 그래도 회색이 짓누르던 세계가 조금씩 천연색을 찾아간다. 서울 밖에서 만난 풍경은 쉽게 해독되지 않는다. 갑자기 내게 던져진 풍경은, 아름답지만 어딘가 푸석푸석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햇빛이 떨어져 반짝이는 작은 나뭇잎 하나에 감동한다.
자유에는 감동이 있지만 부러움도 함께 존재한다. 나를 묶어 놓았던 끈이 풀리면 허전하면서도 당장 상쾌함을 느끼고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미래에는 이보다 더한 자유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기분 좋게 나른하다. 그러나 이미 나보다 더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을 보면 서글픔과 부러움이 찾아온다. 왠지 따라가지 못할 것 같은 풍성한 자유는 동경의 대상이 된다.
한국화가 이호신 작가는 자유로웠다. 화가라는 핑계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의무로 지금까지 거의 30여 년간 전 국토를 떠돌았다. 1985년 남도기행을 시작으로 전 국토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고스란히 때 묻은 화첩에 켜켜이 쌓였다. 그 안에는 지금은 잊히고 사라진 풍경도, 앞으로 사라질 풍경도 있다. 4대강 사업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붓을 들고 강을 찾아갔다. 사라질 아름다운 강의 모습을 화폭에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 뒤로 1년간 우리나라 5대강의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걸으며 그림을 그렸다. 지리산에 있는 용유담은 지리산 댐이 들어서면 침수되어 사라질 곳이다. 환경단체와 정부가 실랑이를 하는 사이 용유담을 찾아가 200호짜리 큰 화폭에 담았다. 용유담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용유담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모르세요. 지리산 댐이 들어선다는 이야기에 그 길로 달려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은 사진과 달라서 용유담 전체를 담을 수 있어요. 저는 이런 심정이었어요. 관계자들이 직접 이곳에 와서 용유담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으니 제가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는 거예요. 자 봐라, 용유담이 이렇다. 제대로 알고 댐을 만들어라.”
30여 년의 지난한 국토순례는 ‘어머니의 땅’ 지리산에서 멈춘다. 지난 십 몇 년간 지리산을 그려왔지만 이제는 온전히 지리산에 뛰어들었다. 산청 남사예담촌으로 거처를 옮기고 수도하는 기분으로 홀로 그림을 그린다. 지리산에서 생활을 하게 되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명의 생활인으로서 지리산의 내밀한 것들을 담을 준비가 된 것이다. 3년 동안 쉴 틈이 없었다. 자연 풍광뿐만 아니라 구례, 하동, 남원 등 지리산 주변에 자리한 마을과 도시 풍경도 세밀한 필치로 화폭에 담았다. 인간은 자연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그는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지리산 진경들은 『지리산진경』 화집으로 묶여 얼마 전 출간됐다. 또 오는 4월 4일부터 28일까지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어머니의 땅, 지리산 진경 순례’라는 이름으로 전시된다. 한국화가로서는 드물게 진경산수화 200여 점을 선보이는 초대형 단독 전시회이다.
 

지리산 화엄사


청량산 청량사
 
| 후손도 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그가 천착한 것은 지리산뿐만이 아니다. 발길이 닿지 않은 사찰이 없을 정도로 전국 각지의 사찰을 그렸다. 사찰을 그릴 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풍경을 보고 베끼는 것이 아니라 사찰에 며칠씩 묵으면서 그 사찰이 가진 전통과 불교적, 풍수적 의미를 파악한다. 또 창건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어떤 마음으로 절을 지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해인사를 그릴 때는 절을 수차례 찾아 머물며 예불에 참석하고 수행하며 해인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말씀을 되새겼다. 그리고 나서야 붓을 들었다. 어떤 절은 20여 년이 걸리기도 했다. 마음은 먹었지만 어디서부터 붓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 실상사와 통도사가 그런 경우다. 실상사는 20여 년전부터 그리고 싶었는데 최근에야 방점을 찍었다. 실상사 회주인 도법 스님이 마을과 함께 있는 절이라고 한 말에 붓을 들 수 있었다. 주변 지인들은 이 사찰 그림들이 예술성과 함께 기록화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찰 증축이 많은 요즘 그의 그림에는 과거의 사찰 모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덕산 백련사


지리산 실상사

진경산수眞景山水는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1759)이 우리나라 강산의 아름다움을 그리기 위해 창안한 기법이다. 그 뒤로 진경산수라는 하나의 장르가 생길 정도로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아직까지도 겸재를 존경하는 한국화가가 많다. 하지만 이호신 작가는 진경산수의 기법을 따르지 말고 진경정신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진경산수라고 해서 산수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지형이나 산세를 골라 중요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화폭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입체적인 노력을 했다. 각종 인문서적은 물론 심지어 불교건축자료까지 참조했다. 남명 조식이 말한 “산을 보되 물도 보고 사람도 보고 세상을 보는 일”을 실천하는 작업이었다. 자신만의 사상이 없으면 깊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하고자 한다.
“불교의 무소유 사상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죠. 사찰 그림들은 모아두고 있어요. 인연과 뜻이 있는 곳에 기증하려고 합니다. 잡지나 신문에 연재하고 그 원고료로 그림을 그려요. 그저 생활할 정도면 됩니다. 저는 멀리 내다보고 끊임없이 정진하려고 합니다. 의상 대사가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했죠. 초발심이야말로 예술가와 수행자가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
그가 작업하는 방식은 말로만 들어도 쉽지 않다. 우선 대상을 정하면 그 주변 산세와 지형을 파악하고 각 부분에서 스케치를 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 스케치한 것들을 하나로 합친다. 그래서 자신의 그림은 사생이지만 사의화라고 한다. 대상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다. 한 화면에 대상 전체가 가득 들어온다. 산세, 지세, 물의 흐름은 물론 풀 한 포기까지 샅샅이 살피는 진경산수의 시간과 노력은 그대로지만 정선의 진경산수화와는 채색 방법이나 소재의 구성이 다르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갓을 쓴 선비 대신 자동차, 현대식 건물들이 자리한다. 이 또한 우리의 문명이고 모습이다.
우리 자연유산은 다른 나라와 다르다. 우리만의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수천 년 내려오면서 인간과 자연과 문화는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의 오래된 불교문화 중 하나인 사찰 같은 경우에도 인공과 자연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었다. 이 모든 것을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 있는 그대로라도 남겨주자고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자연과 지금까지 1,500년을 내려온 불교 유산은 후대에 전해져야 합니다. 저는 그런 바람으로 우리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와 사찰이 숨 쉬고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놓아요. 잘 유지해 나가자고 부탁하는 겁니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보여주자고. 이 아름다움과 전통을 후손들도 공유하고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이호신
한국 수묵화의 진경산수 전통을 계승하고 현대적 필치와 기법, 색감을 응용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열다섯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글쓰기에도 관심이 많아 『남사예촌』, 『우리 그림이 신나요』, 『산청에서 띄우는 그림편지』, 『우리 마을 그림 순례』 등 많은 책을 펴냈다.
 
‘어머니의 땅, 지리산 진경 순례’ 전시회

기간 | 2013년 4월 4일~4월 28일
장소 | 인사동 아라아트센터(02-733-1981)